“근데 너 눈이 좀 부은 것 같다?”
“피곤해서 그런가 봐.”
“아, 하긴 너는 처음 왔을 때부터 거의 못 쉬었으니까. 게다가 불침번까지 서서 더 그렇겠네.”
붓기도 많이 가라앉은 터라 사람들은 별 의심 없이 리온의 말을 믿었다.
게다가 게이트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고생한 사람이 리온인 것 역시 사실이었다.
“우리도 너 좀 덜 고생하게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언제까지나 못 하겠다는 소리만 할 수는 없지.”
“아니에요. 다들 말은 그렇게 해도 열심히 하고 있었잖아요.”
“그래, 그래. 보기 좋네.”
태환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리온의 어깨에 손을 올린 태환이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너무 부담 가지지 마. 다들 죽는소리해도 S급, A급 에스퍼들이야. 자기들이 한가락 한다고 생각했는데 S급 게이트는 본인이 겪어 온 것과 다르니까 혼란스러워하는 거지. 나 때도 다 그랬다.”
“특히 저기 있는 저 아저씨가 제일 심했어요.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자기 일 그만두겠다고 울고불고.”
희수가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 우는 시늉까지 하며 태환을 놀렸다.
“전 이 일이랑 안 맞는 것 같아요. S급이면 뭐해요. 전 쓰레기라고요. 그냥 그만둘래요. 나가면 바로 사표 쓸래요.”
“아니, 21년 전 일을 가지고 그렇게 놀리면 재미있냐? 그러는 너도 ‘전 에스퍼도 아니고, 여차하면 도망칠 체력도 없다고요. 엉엉.’ 이러면서 울어 놓고.”
“나도 철판을 종잇조각처럼 접어 버리는 힘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울지는 않았지. 게다가 난 갓 스무 살이었다고.”
“저기 똑같이 스무 살인 유원이는 아주 씩씩한데?”
“아, 철판이라도 반으로 접는 힘이 있었어야 해. 그럼 누구를 콱 접어 버렸을 텐데.”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린 두 사람의 논쟁에 후배 에스퍼들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자신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안도감,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아직까지 사람들을 돕고 있는 선배의 존재가 그들의 불안감을 진정시켜 주었다.
“유원 씨가 특이한 거지. 그리고 유원 씨는 일반인치고는 힘도 좋은 편이고. 저번에 보니까 근육도 장난 없던데?”
“에이, 호들갑은. 딱 봐도 말랐는데.”
“아냐.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자기를 기준으로 삼고 말하면 어떡해? 저 정도면 대단한 거지. 저번에 셔츠에 뭐가 묻어서 잠깐 벗은 걸 봤는데, 근육이 아주…….”
“아들뻘인 애한테 지금…….”
“아니, 그냥 팩트만 말한 거잖아요, 팩트만.”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진 분위기에 그 모습을 보던 팀원들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겼다.
“이 아저씨가 예전엔 어땠냐면…….”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일단은 이동할까요? 지금 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얼른 여길 끝장내고 그 고깃집 가서 듣고 싶은데요.”
“맞아. 이런 이야기엔 술이 있어야지. 하, 빨리 나가서 다시 이야기해야겠다. 나도 저 아줌마가 예전에 어땠는지 얘기할 게 아주 많거든.”
태환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동하기 시작한 일행들의 발걸음은 분명 어제보다 가벼웠다.
“어제 괜찮았어?”
“뭐가?”
“유원 씨랑 어색하잖아.”
선두에서 리온과 발을 맞추어 걷게 된 진하가 리온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 같았다면 어색해 죽는 줄 알았다며 유원의 험담을 진탕 퍼부었을 리온이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음…… 뭐, 내 생각보다 나쁜 애는 아니었던 것 같아.”
“저번엔 다시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미친놈이라더니?”
“아, 그랬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면 간단할 문제였지만 그러려면 자신이 힘들어 울었던 이야기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과거까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리온은 웃음으로 상황을 얼버무리려 했다.
“하하. 뭐, 인생이 그런 거지 뭐. 그냥 주찬이는 자고 있는데 혼자 그러고 있는 게 좀 대견해 보였기도 하고.”
“그래?”
진하가 수상하다는 눈을 하고 말했다.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라고, 다시 쟤랑 잘 지내려고 하면 그땐 내가 강리온이 아니라 산리온이라며 길길히 날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으니 수상할 수밖에.
무언가 숨기는 것이 분명한 리온만이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그렇지만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진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러는 걸 보고 있으면 재미있기도 하고.’
“뭐, 뭘 그렇게 봐?”
“근데 진짜 괜찮아? 피곤해서 얼굴까지 부어서는. 특히 눈이 많이 부었어. 누가 보면 어제 밤새 울기라도 한 줄 알겠다.”
“……진짜?”
농담이었는데, 진지하게 받는 리온이었다.
진하는 어젯밤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유원 씨랑 싸우기라도 했어?”
“아냐. 내가 뭐하러 걔랑 싸우겠어.”
“자주 싸웠다며.”
“……요즘은 별로 안 싸웠어. 대화도 거의 안 했는데 뭘.”
리온이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고 꿍얼거렸다.
평소에 해 둔 말이 있어서 왜 그렇게 말하냐며 따질 수도 없었다.
“그냥…… 불침번을 같이 서다 보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듣다 보니까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서…….”
“그래?”
“여태 그냥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는데, 본인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더라고…… 음?”
이야기를 하다가 느껴진 위화감에 리온이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걔가 나를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걱정을 했다는 건데, 왜?’
“왜 그래?”
“아, 아니야. 그냥…… 쓸데없는 생각.”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던 리온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다혈질인 것처럼, 유원에게도 예민한 부분 하나쯤은 있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화낼 일은 좀 줄어들 것 같아. 어차피 이유원이 내 매칭 가이드란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잘 지내면 좋지 뭐.”
“그래. 그렇지. 태환 선배랑 희수 선배 보면 티격태격하면서도 되게 잘 지내시잖아. 꼭 죽고 못 사는 사이가 아니어도 되지 뭐.”
“죽고 못 사는 사이라면, 수진 누나랑 민호 형 같은 사이?”
리온이 뒤에서 깨를 볶으며 따라오고 있는 커플을 보며 말했다.
이 팀에는 세 쌍의 매칭 가이드, 그리고 두 팀의 페어가 있었다. 하나는 태환과 희수 페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진과 민호 페어였다.
사이가 좋다 못해 가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애정 행각을 일삼는 수진 민호 커플을 볼 때면 기분이 이상했다.
엄청 유난스럽기는 해도 보통 매칭 파트너끼리는 저 둘처럼 사이가 좋은 것이 정상이라는데, 자신과 유원은 사이가 좋기는커녕 대화만 나누면 싸우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저렇게까지는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저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다음으로 시선이 간 곳은 아직도 서로 으름장을 놓고 있는 태환과 희수였다. 툭하면 서로를 디스하며 싸워 대긴 하지만, 두 사람에게서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 온 신뢰와 서로를 향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렇지. 저 둘 같은 사이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기왕 매칭 가이드인 거, 잘 지내면 좋잖아.”
“맞지. 맞아……. 내가 선배고, 형이니까 내가 먼저 좀 다가가고 그래야겠지? 후, 이번 게이트에서는 진짜 같이 사이좋게 나가고 싶다.”
리온이 지난 반년간 게이트를 클리어할 때마다 벌어진 헤프닝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리온이 의식을 잃은 채로 나온 적도 있었고, 유원이 의식을 잃은 채로 나온 게이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둘이서 싸우고 리온이 먼저 뒤도 안 돌아본 채로 게이트를 빠져나가곤 했었다.
이번 게이트에서는 싸우지 않고 서로 수고했다고 다독이며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물론 그러려면 게이트를 잘 끝내야 할 테니까, 제대로 클리어하는 걸 1순위로 삼아야겠지?”
리온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의욕이 불타는 모습이 평소보다 말이 없던 어제보다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한 진하가 웃으며 그런 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멋지네.”
“둘이 분위기 좋네. 누가 보면 유원이가 아니라 둘이 매칭 가이드인 줄 알겠어.”
“선배도 참, 쓸데없는 얘기를.”
민철의 생각 없는 발언에 리온이 뒤따라오는 유원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유원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듣지 못한 것인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선두에 선 사람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못 들었겠지……? 아니 뭐, 들었어도 내가 한 말이 아니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만…….’
“됐어요. 매칭 가이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인데요, 뭘.”
“그렇긴 하지. 둘이 동갑이라 그런가, 되게 빨리 친해진 것 같아서 부러워서 한마디 해 봤어. 나랑 동갑인 사람은 임자 있는 몸이라 말 한마디 걸기 힘들거든.”
민철과 동갑인 사람은 다름 아닌 수진이었다. 수진과 민호는 거의 본인들끼리만 대화를 나누는 탓에 전투 중이거나 다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고서는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번 말해 봤다. 뭐.”
“심심해서 그래요? 어휴, 불쌍하니까 내가 놀아 줘야지.”
“그래, 좀 놀아 줘.”
민철이 어느새 리온의 바로 옆자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리온이 그런 민철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는 그와 이야기를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