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걱정돼요?”
유원이 진하의 말에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어깨를 움찔했다. 상대하고 싶지 않은 듯한 태도였지만 진하는 유원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 없었다.
‘다들 바보 같다니까.’
다른 사람들은 유원을 무뚝뚝하고, 어른스럽다고 말하지만 진하에게 유원은 전혀 어른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른스러운 척하려고 애쓰는 어린애라면 모를까.
“뭐 하러 걱정해요. 이 팀에서 제일 강한 게 리온이잖아요. 아까 민현이한테 들었는데, 오늘 전투도 리온이가 거의 다 해결했대요. 괜히 센터 간판 에스퍼가 아니라고요.”
“게이트는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오늘 괜찮았다고 해서 내일도 그럴 거란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원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유순해진 척이라도 하더니, 진하에게만 변함없이 날을 세우는 유원이었다.
‘뭐, 그런 모습 때문에 더 재미있는 거지만.’
“하긴 유원 씨가 리온이 많이 좋아하니까 그렇겠네요.”
“……!”
유원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당황한 기색을 숨긴 유원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제 매칭 에스퍼인 데다가, 역대 최강의 에스퍼니까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S급 게이트에서는 에스퍼 한 분, 한 분이 중요한 전력이 된다는 거 진하 씨도 알고 계실 텐데요.”
“당연히 알고 있죠. 하지만 유원 씨는 다른 사람보다 리온이를 더 많이 걱정하잖아요? 예를 들면…… 나도 이 게이트에서 꽤 중요한 전력인데 나한텐 별 관심 없죠?”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글쎄, 난 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지 모르겠던데. 이렇게 빤히 보이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이쯤 되면 유원도 진하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유원이 고개를 돌려 진하를 응시한 채 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는데, 전 류진하 씨랑 농담이나 하고 싶은 생각 없거든요.”
“난 있는데. 좀 어울려 주면 안 돼요?”
다소 예의 없는 말투였지만 진하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생글거릴 뿐이었다.
“난 유원 씨랑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요.”
“……저랑요?”
유원이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유원은 진하에게 그리 좋은 동료가 아니었다.
더불어 진하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을뿐더러,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그런 마음을 숨기려고 들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제 마음을 눈치채고 알아서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진하는 무슨 생각인지 그런 유원을 멀리하기는커녕 이렇게 말이나 걸고 있었다.
“유원 씨가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이유, 뭔지 알거든요.”
“그 이유가 뭔지 저도 궁금하네요.”
유원이 잔뜩 세운 날을 숨기지 않고서 말했다. 그러나 진하는 물러나기는커녕 유원에게로 한 발 더 다가섰다.
“근데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랑 리온이는 진짜 그냥 친구거든요. 아, 그래도 싫은 거면 어쩔 수 없나?”
“무슨 소리를…….”
“유원 씨, 리온이 좋아하잖아요. 난 사람들이 그걸 왜 모르는 건지 진짜 모르겠더라.”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유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유원은 표정을 제대로 숨기지도 못한 채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리온 형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죠. 멋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렇죠. 멋진 놈이죠. 그렇지만 유원 씨 감정이 그런 부류라고 하기엔 너무 진부한 변명인 것 같은데.”
진하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표정을 숨기지 못한 유원이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이곳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쓸데없는 이야기하실 거면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네요.”
“너무 흘려듣진 마요. 걱정할 일 없다는 건 진짜니까. 우린 그냥 친구고, 난……. 앗, 가 버렸네.”
유원은 진하의 말을 무시하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생각만큼 잘되지는 않았다.
‘바로 돌아가지는 못하겠네.’
유원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곡을 찔린 탓인지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곧바로 돌아갔다가는 이 심장 소리를 모두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 * *
16살, 중학교 3학년이 되고 한 달이 지난, 봄.
유원의 학교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떠들썩했다.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에 게이트가 생긴 것이다. 생각만 해도 오싹한 일이었지만 학생들은 게이트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일주일 넘게 휴교라니. 완전 개이득.”
“그럼 뭐해, 시험 기간인데.”
“시험이 무슨 상관이야, 특목고 갈 애들이나 공부하겠지. 우리야 상관없다고. 그리고 에스퍼들이 다 처리해 줄 건데 뭐 어때.”
현실성 없는 게이트 따위보다는 당장 등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대부분의 학생이 그랬지만 유원은 달랐다.
2학기라면 모를까, 1학기 성적은 고등학교 진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꼭 해야 하는 것도 없는 유원이었지만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후에 제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시험이 일주일 밀려서 계획들을 싹 다 새로 세워야 하네. 귀찮게…….’
뉴스로만 보던 게이트라는 것이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제 학교 한가운데에 생긴 것인지 짜증이 났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물론 학교가 아니라고 해서 공부할 수 없는 건 아니었기에 유원은 그 일주일 동안 집에서도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성적에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3년 내내 전교 1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방심하지 않는 편이 좋을 테니까.
“어?”
그렇게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공부하던 중, 유원은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곤란한 얼굴을 했다.
‘학교에 두고 왔던가. 2주 뒤에 풀 문제집은 미리 가져다 놓으니까…….’
유원은 꽤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편이었다. 3학년이 되기 전에 미리 스케줄 표를 짜 놓은 것은 물론, 문제집의 종류까지 미리 다 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문제집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학교 사물함에 넣어 놓은 것 같았다.
게이트 때문에 학교가 봉쇄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잘은 모르지만, 게이트를 처리하는 데 최대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상황이 정리되었을 것이었다.
‘가서 챙겨 와야겠다.’
아직 임시 휴교가 끝나기까지는 이틀이 남아 있었다. 지금 그 문제집을 풀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유원은 자신이 정해 둔 계획을 고치고 싶지 않았다.
게이트가 정리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학생들을 들이기엔 안전상 걱정되는 게 많아 휴교 기간을 넉넉히 잡아 둔 거겠지.
그러니 상황이 정리되었을 지금쯤 뒷문으로 슬쩍 들어가 책 몇 권을 가지고 나오는 것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유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모자와 안경을 챙겼다.
“역시 앞문은 막혀 있네.”
유원이 문을 막은 어른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쯤은 예상했다.
‘지각하면 여기로 몰래 들어오려는 애들 많거든. 그러니까 여기도 한 번씩 체크해 줘. 여기로 들어오다 걸리면 벌점 1점 아니고 3점이니까 그것도 알아 두고.’
작년에 했던 선도부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선생님은 이 틈으로 들어오는 학생이 없도록 감시하라며 알려 준 것이었지만, 아는 게 힘이라고 필요하면 써야지.
유원은 정문에서 떨어진, 눈에 띄지 않는 틈을 이용해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지나 익숙한 3학년 5반 교실로 들어간 유원은 사물함을 열어 찾던 물건을 꺼냈다.
“역시 여기 있었네.”
문제집은 유원의 예상대로 사물함 안에 있었다.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온 김에 다른 물건 몇 가지를 더 챙긴 유원이 가방 지퍼를 채웠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없는 학교는 또 처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운동장 쪽을 바라본 유원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게이트가…… 아직 남아 있잖아?”
뒷문 쪽에 난 틈으로 들어온 탓에 운동장에 게이트가 아직 남아 있는 줄은 몰랐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낀 유원이 서둘러 가방을 고쳐 메고 계단으로 향했다.
“깜짝이야…….”
그래도 게이트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거나 하지는 않겠지. 유원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1층 복도를 걸었다.
쿵.
그때, 복도 끝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유원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학교 안에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바람에 무언가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런 거여야만 해.’
유원이 잔뜩 긴장한 채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유원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이상한 소음은 점점 커져 갔다.
쿵, 쿵, 쿵, 쿵.
도저히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는 소리에 유원이 마른침을 삼키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돌아본 곳에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형태를 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무언가가 유원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