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퍼와 가이드들은 최소한의 배려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각자의 위치로 이동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는 건 알지만, 유원은 한참 동안 리온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크흠.”
그러던 중, 눈치를 주는 것 같은 헛기침 소리가 유원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긴 심호흡 끝에 유원이 리온에게 입을 맞추었다.
붉고 말랑한 입술이 리온의 입술 위로 맞닿았다. 리온은 그때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다리에 힘을 주지도 못하고 그저 유원의 손짓대로 움직이기만 하고 있었다.
“으응…….”
그 정도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리온이었으나 입술이 맞물리고 입안으로 말캉한 혀가 들어온 순간 본능적으로 유원에게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 가이딩을 받았던 날 느꼈던 청량함처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아찔한 감각이 리온을 감쌌다.
당장 이 품에, 맞닿은 입술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느새 리온은 유원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그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입맞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분명 유원이 입을 맞춘 것으로부터 시작됐는데, 어느 순간부터 유원은 바닥을 디딘 무릎에 힘을 준 채로 리온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리온은 매달리다시피 한 채로, 이대로 유원과 떨어졌다가는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입맞춤을 이어 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 컨디션이 안 좋았냐는 듯 리온의 눈이 다시금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
그리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리온이 유원을 밀쳐 냈다. 그리 세게 민 것도 아니었는데, 유원은 그대로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탄탄한 몸이 종잇장처럼 밀려 나간 것을 본 리온이 되레 당황할 정도였다.
“아, 아니, 그게…….”
리온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을 더듬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밀려난 모습 그대로 굳어 있던 유원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고집부리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재수 없는 목소리. 그러나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것이 더 기분 나빴다.
리온은 그 바람에 괜히 머쓱해졌다. 자신이라고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괜히 저 혼자 유난을 떨고 당황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고…….”
그래도 도와준 것이니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인사를 건네려던 리온이 무언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못 할 짓을 하기라도 했다는 듯 유원이 뒤돌아선 채 옷소매로 입술을 닦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리온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니, 꼴도 보기 싫다고 티를 내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건 리온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인공호흡이나 다름없는 일인데 저렇게까지 식겁할 일이냐고.
기분이 나빠진 리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고집을 부리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었으니 따질 자격이야 없었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것 아닌가.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 리온이 일부러 입술을 박박 닦으며 유원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리온은 이내 다시 유원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급한 불을 껐을 뿐, 아직 가이딩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 아직 가이딩이 좀 부족한 것 같은데.”
자존심 세웠다가 또 이런 상황에 놓이느니 조금 창피하더라도 제대로 가이딩을 받는 것이 나았다.
애초에 피해 다닌 것은 리온이었지, 유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원은 가이딩을 받으라고 자신을 귀찮게 하는 쪽이었으니 곧바로 손을 잡아 줄 거라고 생각한 리온이 뻘쭘하게 손을 내밀었다.
“야, 안 들려?”
그러나 유원은 돌아선 채로 한참 동안이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후 겨우 손을 내밀어 주긴 했지만 몸은 여전히 리온을 등진 채 무성의하게 손만 뒤로 내밀었을 뿐이었다.
리온이 왠지 모를 서운함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맞잡은 손을 통해 가이딩은 확실히 밀려 들어왔지만 조금씩 기력을 찾아가는 몸 상태와 달리 머릿속은 복잡해지기만 했다.
유원은 그 게이트를 클리어할 때까지 내내 리온을 무시했다. 평소라고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노골적인 무시로 일관했다.
누군 그게 좋기라도 했던 줄 아나? 차라리 평소처럼 빈정거리기라도 하면 자신도 보란 듯이 받아쳐 줬을 텐데, 유원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티가 날 만큼 리온을 피해 다녔다.
“진짜 날 어지간히 싫어하나 봐. 어떻게 보스를 잡을 때까지 얼굴을 한번 마주 보질 않냐고.”
“놀리지도 못하겠더라. 야.”
함께 게이트에 들어갔던 사람들 역시 어색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점막 접촉을 통한 가이딩 자체가 드문 일이기도 했고, 보통은 어색함을 상쇄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유난을 떨며 놀리곤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얼굴이 완전 하얗게 질려 가지곤…… 놀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던데.”
광현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장난기 많은 광현조차도 찍소리도 못한 채 게이트를 나와야만 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어땠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는데, 리온은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센터장에게 불려 가 또 유원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너희가 제정신이야⁉”
리온은 오랜만에 화난 센터장을 보았다. 리온이 신입이던 시절 앞뒤 가리지 않고 나서다 크게 다쳤던 날 이후로는 크게 혼난 적이 없었는데, 그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이딩 받기 싫어한다고 그냥 방치를 해? 너 센터 들어오기 전에 교육 받았어, 안 받았어.”
“받았습니다.”
“매뉴얼에 가이딩이 부족한 에스퍼가 가이딩 받기 싫어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보내 주라고 쓰여 있어?”
“아닙니다.”
먼저 혼이 난 것은 유원이었다. 유원이 담담한 얼굴을 하고 센터장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혼이 나고 있는 것은 유원이었지만 가이딩을 해 주겠다는데도 받지 않고 도망 다니다시피 한 것은 자신이었기에 리온의 마음 역시 편하지 않았다.
“페어로 처리만 안 됐지, 사실상 페어나 마찬가지인 거 몰라? 내가 뭐 너희들 싸우는 꼴 보자고 매번 조 짜서 게이트 보내는 것 같아?”
“…….”
“차라리 게이트 들어가자마자 그 사달이 나서 다행이지, 보스전 하는 도중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너 법학과 준비했다며. 근데 그 정도 생각할 머리도 없어? 그렇게 책임감이 없나?”
센터장이 화를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유원은 변명 한마디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혼이 나고 있었다.
조금 억울할 법도 한데 가만히 혼이 나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했던 리온이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받으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제가 피해 다닌 거예요. 죄송합니다.”
“그래, 그랬겠지. 강리온. 너 내가 언젠가 이런 사고 칠 줄 알았다.”
그 말 한마디에 센터장의 화살이 리온에게로 날아들었다. 제 잘못은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리온은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까지 괜찮았으니까, 그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어요. 게이트에서 민폐 끼칠 줄 알았으면, 절대 안 그랬을 거예요.”
리온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게이트 안에서 파티원들에게 민폐가 되었다는 것은 리온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제대로 된 가이딩이 뭔지 모르는 상태의 몸이랑, 가이딩 받고 살아난 몸이랑 같아? 듣자 하니 이 이야기, 강우한테서도 들었다며? 근데 그 지경을 만들어?”
센터장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 한 장을 리온에게 던지며 말했다.
“일 그따위로 할 거면 좋든 싫든 페어 등록하고 강제로라도 붙여 놓을 수밖에. 너, 내가 쉬라고 했을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냐? 네가 쉬면 센터 제대로 돌아가냐고, 너 없으면 센터 망하는 것처럼 굴더니 그 결과가 이거야? 몸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해서 일을 만드는 게 센터 잘 굴리는 거냐?”
리온의 발치에 떨어진 것은 페어 등록 신청서였다. 페어 신청은 본인들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센터라고 해서 등록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강제 등록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알아서 잘하겠다기에 알아서 잘하겠거니 맡겨 놨더니 돌아오는 게 이딴 거면, 나도 더 이상 너 못 믿어. 사명감 하나는 제대로 박힌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널 잘못 본 거였나 보지.”
늘 투덜거리면서도 리온을 믿고 있던 센터장이었는데, 이번만큼은 제대로 화가 난 것 같았다. 리온이 발치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들었다.
그래, 싫다고 해서 무조건 피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닌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유치하게 굴었다. 애초에 이 일을 시작한 이유가 뭐였는데, 겨우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뻔했다는 것이 스스로도 용납이 되질 않았다.
리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리온 자신에게 가장 두려운 것, 그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뻔했다고 생각하자 새삼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실감이 났다.
“……쓸게요.”
리온이 센터장의 책상 위 놓인 필기구 통에서 볼펜 하나를 빼 들었다. 이름, 나이, 소속기관명. 서류에 필요한 정보를 하나하나 기입해 나가는 리온을 유원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