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애들이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에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병원 한번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너도 빨리 인사드려.”
“가, 감사합니다…….”
아직 놀란 마음이 다 진정되지 않았는지 눈물방울을 찔끔 매단 학생이 리온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신입일 때 병원에 데려다줬던 그 애 생각나네. 아, 근데 그 애…… 아무리 생각해도 익숙한 느낌인데, 얼굴이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온이 얼마 전 생각했던 신입 시절에 만난 그 중학생을 다시 떠올렸다. 지금 부모님의 걱정을 받고 있는 저 아이도 중학생이나 고등학교 1학년쯤 된 것 같아 보였다.
신입 시절, 각오를 다질 때나 한 번씩 떠올리던 아이였는데 한번 의식하고 나니 계속 생각이 났다.
‘아, 기억 안 나. 걔가 몇 학년이었는진 모르지만…… 아마 고등학교 2학년에서 스무 살 정도 됐겠네.’
할 일이 없어서 더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게이트가 다 정리되지도 않은 학교에 들어가서 책을 챙겨 나올 정도로 공부에 열심인 아이였으니 아마 지금도 공부밖에 모르는 학생이지 않을까 싶었다.
“한번 생각하니까 뭐 하고 사는지까지 궁금해지네.”
“누가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함께 지원을 나왔지만 리온의 활약에 할 일이 없어진 에스퍼 하나가 기웃거리다 리온에게 말을 걸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리온이 정신 줄을 잡았다.
“상황 잘 정리돼서 다행이에요. 능력 꽤 크게 썼는데,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가이드분은 게이트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유원이 게이트에 들어가고, 그나마 매칭률이 괜찮은 진하마저 오늘 아침 게이트로 출발해 버렸기에 며칠 동안은 유원에게 유의미한 가이딩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게이트 밖에서는 힘을 크게 쓸 일이 없다 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큰 힘을 써야 할 만한 일이 생겼으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 걱정이 될 법도 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꾸준히 가이딩 받아 왔으니까 예전만큼 몸 상태가 안 좋지도 않고.”
리온이 걱정하는 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기는 했지만 정말 몸 상태가 나쁘지 않기도 했다.
능력을 쓰기 전보다 조금 피곤하지만, 컨디션에 타격이 가지도 않을 정도의 피로감일 뿐이었다. 꾸준한 가이딩이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매칭 가이드가 있다는 게 좋아. 물론 예전만큼 가이딩 없이 오래 버틸 수는 없지만…… 똑같이 능력을 써도 피곤한 정도가 훨씬 줄어들었어.’
최적의 상태를 알아 버린지라 예전처럼 별 의미 없는 가이딩만 받으면서 버틸 수는 없게 됐지만, 대신 능력의 저장 공간 자체가 늘어난 기분이었다.
예전에 이만한 힘을 끌어오고 나서 느낀 피곤함이 10이었다면 지금은 1 정도랄까.
가이딩의 중요성이야, 유원이 나타나기 전 골골대던 시절에도 알고 있었지만 이젠 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겠지.”
그리고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최근 행동을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합당한 사유가 되어 주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거린 리온이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상황을 마저 정리했다.
* * *
그렇게 또 이틀이 지났다. 게이트 안에 있을 때는 시간이 그렇게도 빨리 가더니, 밖에서 들어간 사람들을 기다릴 때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이딩은 아직 크게 모자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원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보면 애인이라도 게이트에 보낸 사람 같아 보인다는 말에 화를 내기가 뻘쭘할 정도로 그랬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5일째, 보통 평균적으로 5일째에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됐다. 물론 A급 게이트라는 걸 생각하면 좀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S급과 A급이 각각 하나씩 들어갔으니 그리 어려운 공략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띠링―.
“아, 뭐야. 스팸이잖아.”
알고는 있지만 센터용 알림 소리와 개인 연락용 알림 소리를 다르게 설정해 놓은 것도 잊고 핸드폰에서 소리만 나면 곧바로 알림을 확인하고 실망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이 또한 핑계는 여러 가지 있었다. 우선 제집도 아닌, 이제 막 익숙해져 가는 집에 혼자 달랑 남겨진 것이 어색했다.
그리고 앞으로 게이트가 또 여럿 발생하면 리온도 게이트에 들어가야 할 텐데, 그럼 유원이 없는 게 조금 힘들 수도 있었다. 게이트에 들어가면 하루 종일 힘을 써야 하는데 유원도, 유원보다 더 늦게 게이트에 들어간 진하도 없으면 분명 지금처럼 속도를 내서 일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타당한 핑계들보다 그냥 유원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부정하기엔 너무 명확한 마음이었다.
왜 그런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적어도 유원이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적어도 얼굴을 보면 지금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지는 않겠지.
리온은 그런 생각으로 유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리온의 핸드폰을 울린 것은 이번에도 기다리던 소식이 아니었다.
[센터장님 : 할 얘기 있으니까 잠깐 올라와] 오후 4 : 12
“뭐야, 바쁘니까 막 찾아오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이번에 핸드폰을 울린 것은 센터장의 문자였다. 리온은 툴툴거리면서도 착실하게 발을 돌려 센터장실로 향했다.
‘당분간 바쁘다고 하셔 놓고 갑자기 왜 부르시는 거람. 잠깐, 혹시…… 새 게이트가 생길 징조가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그게 가장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게이트 세 개가 연달아 생긴 후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슬슬 다른 게이트가 열려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유원도 빠르면 오늘, 늦어도 이틀 내로 돌아오니 새로운 게이트가 생긴다면 그때는 리온도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B급 게이트 정도면 내가 없어도 해결되겠지만…… 부르시는 걸 보니 또 A급 게이트인가 보네.’
그러고 보니 유원이 언제 돌아오는지 생각하느라 그렇게 기다리던 게이트 복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일 생각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낸 게 도대체 얼마 만이었지. 세상에, 사람들 말대로 내가 확실히 맛이 가긴 갔나 보다.’
유원이 새삼 놀란 채 걸음을 멈추었다. 센터장실을 코앞에 두고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리온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센터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어라, 분위기가 영…….’
들어가자마자 센터장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기롭게 문을 연 리온이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당분간 바쁘니까 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하아.”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생겼지, 생겼어.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센터장이 답지 않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눈치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구나. 본능적으로 알아챈 리온이 장난기 싹 가신 얼굴을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센터장이 이렇게 진지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일은 드물었다. 기본적으로 성격이 그렇기도 했지만, 센터장은 자신이 불안한 티를 내면 센터 전체가 흔들린다고 생각했기에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이런 표정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센터장의 진지한 얼굴을 본 게 언제였더라. 아마 S급 게이트가 생길 조짐이 보인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
“설마.”
리온이 의식하기도 전에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불길한 예감에 리온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 상황이 뭐든…… 지금 상황보다 더 최악이기는 힘들 것 같은데.”
센터장이 복잡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센터장이 리온을 불러서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이야기. 무슨 생각을 해도 더 최악이기는 힘들 이야기.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직 두 달도 안 지났는데.”
리온이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을 애써 부정하며 말했다. 그러나 센터장은 그런 리온의 말을 부정해 주기는커녕 깊은 한숨을 쉴 뿐이었다.
“게이트라는 게…… 주기적으로 생기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한 해에 안 좋은 일이 몰릴 수 있는 거였나 싶네.”
두 사람 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짧은 대화만으로도 서로가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S급 게이트가 열릴 조짐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어. 이번엔 부산에서.”
센터장은 결국 리온이 생각하던, 제발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이기를 바라던 그 일을 입에 올렸다. 그동안의 고민 따위는 사치였다고 느끼게 할 만큼 거대하고 가까운 재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