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돋보기 >
172. 돋보기
GF는 작금의 사회에서 볼 때 여러모로 이질적이다. 사주의 이익을 무한정 추구하기보다는 직원들의 복지에 투자하고 정규직 고용을 망설이지 않으며 근무시간의 연장보다는 근무 인력의 확충을 과감히 결정한다.
그 덕분에 도심 속 꺼지지 않는 등대의 역할 대신 우리 회사의 직원들은 여가가 있는 삶을 즐길 수 있고 두둑한 월급도 받는다.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이유이고 글로벌한 기업문화의 상징으로 여러 번 다큐멘터리에 GF가 거론된 이유이기도 했다.
‘이게 다 앞일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내가 무슨 성인군자라서 그런 게 아니고.’
나는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을 진리라고 믿는다. 여타 기업이 효율을 추구하며 비정규직은 선호하고 박정하게 구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유사시에 대비한 보유자본을 확보해야 해서다.
이번 신상품이 대성공해도 다음 상품이 쫄딱 망해버릴 수 있는데 그때 여력이 없다면 망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업은 징검다리처럼 한 번 성공하고 다음에는 실패했다가 성공하는 규칙이 일어나지 않는다. 실패의 늪에 연거푸 빠질 때가 더욱 많다.
이때 고정 지출이나 마찬가지인 정규직이 많다면 이보다 숨통 조이는 일이 또 어디 있으랴.
그런데 나는 미래의 정보 덕분에 망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꽤 오래 실패를 겪을 일이 없었다. 여타 경영자들이 보는 사람만 좋고 실속은 없어 보이는 작금의 운영과 복지는 그래서 가능했다.
“게다가 매번 내놓는 결과물도 아주 빠르거든.”
잠깐 명상하며 기억을 되새긴 후 평균 타자속도 345의 속도로 키보드를 거침없이 두드렸다. 이윽고 마침표를 찍었으니 이번 파일의 제목은 ‘영화 시나리오 : 울버렌(가제)’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이걸 무서운 레이첼 선생님한테 가져가서 잘 부탁드린다고 하는 일뿐이었다.
‘우리 회사의 작품들이 완성도도 높으면서 속도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빠르게 나오는 이유가 이거지. 내가 미래의 결과물을 초안으로 내놓고 그걸 시작점으로 삼아서 직원들이 수정하고 완성도를 높이거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에 비하면 난도가 한층 낮아지는 작업방식이라 하겠다. 아울러, 수많은 인력을 빈틈없이 일하도록 오너로서 청사진을 그리는 데도 결정적인 배경이 되기도 했다. 즉, 외부에서 말하는 나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모두 미래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셈이었다.
‘대모님한테 또 한 소리 들으면 안 되니까 한 번만 더 검토하고 가져가자.’
날 선 대화로 내게 일침을 가했던 레이첼이지만, 그녀로서는 당연한 지점을 짚고 충고했을 뿐이다. 그런 일로 소심하게 삐쳐있을 만큼 나는 멍청이가 아니니 여느 때처럼 초고를 그녀에게 줄 요량이었다.
이걸 반려하건, 난도질해서 재구성하건 레이첼이 알아서 잘해줄 것이다. 그리고 스토리와 관련해서는 무조건 나보다 그녀가 옳다.
‘어디보자~ 어디부터 볼 차례더라~’라며 중얼거리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혼잣말은 유독 한국인들만 하는 거라던데,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관찰 예능처럼 내가 왜 이러지?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서 그러나.”
비식비식 웃다가 잡생각들을 버리고 진한 커피를 마시며 시나리오를 보았다.
본래 역사에서 울버렌은 일본 사가를 모티브로 각색하여 만들어진 영화였다. 당연하겠지만, 일본 사가인 만큼 배경부터 대부분의 인물이 전부 일본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나는 철저하게 이것들부터 바꿔가며 손을 봤다.
일례를 들면 원래는 히로시마 폭격으로부터 영화가 시작되는데 내가 작업한 시나리오에서는 6·25 전쟁을 활용했다. 또한, 원작은 히로시마 폭격으로부터 울버렌이 일본군 장교를 살려주는데 이때 울버렌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한 일본 장교가 훗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빌런이 된다.
‘나는 팔이 안으로 굽는 한국인이라서 어쩔 수가 없더라. 한국인으로 샥~샥~ 바꾸는데 빌런은 좀··· 그렇더라고.’
빌런은 히어로물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에서의 빌런은 매우 추해서 고스란히 한국과 한국인으로 대체하면 문제가 생겨버린다.
안 그래도 국제적으로 명확한 이미지가 잡힌 게 없는 한국인데 영화의 메인 빌런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캐릭터’라면 호텔이라는 고어 영화 때문에 위험한 이미지로 낙인찍힌 슬로바키아의 꼴이 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빌런 자체를 재구성할 만큼의 작가적인 역량은 내게 없다.
그래서 내린 결론!
“아 몰라. 대모님이 알아서 잘 해주시겠지.”
그냥 안 좋은 건 다 일본의 역할로 넘겼다. 울버렌이 워낙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인물이니 일본에서 그런 일도 겪고, 또 한국에서는 6·25 전쟁도 겪은 거로 한 것이다.
빌런은 그런 울버렌이 한국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가진 불사의 힘을 빼앗기 위해서 한국을 찾은 식으로 바꿨다.
‘어설퍼. 내가 봐도 이건 설정 구멍이야.’
하지만 레이첼님이라면 어떻게든 해주실 거다. 그리 믿으며 누더기 같은 시나리오를 들고 갔다.
안경을 고쳐 쓰고 유심히 읽어본 그녀가 시나리오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PC와 관련한 모습을 보고 우려되는 마음이 꽤 있었어요. 자기 확신만큼 위험한 사고도 없기 때문이죠. 윤 회장께서 어련히 잘하겠느냐만, 그래도 노파심에 이런 말을 하게 되네요. 부디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하세요.]
[충고해주셔서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페미니즘도 처음부터 저러지 않았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든 조언해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그녀는 프린트물을 탁자에 두고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대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곤란하죠. 조언이 많다는 건 그만큼 실수가 잦다는 말인데, 윤 회장님이 자주 그러면 정말 많은 이들이 휘청거릴 거예요. 견제할 자격만 허락해주되 그럴 일이 없도록 스스로 경계하세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다른 작가들과 함께 있는 회의실에서의 목소리와는 정반대였다. 흡사 손자에게 조곤조곤 알려주는 할머니 같았고 그녀의 마음이 물씬 느껴졌다. 내 대답은 ‘그러겠습니다’라며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레이첼은 주름진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법 공부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한국인이 품은 일본에 대한 감정은 짐작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네요.]
[그냥 초안일 뿐이니 저의 스토리는 참고만 해주셔도 됩니다. 그런데 진실만을 다뤄도 한국보다는 일본 쪽이 훨씬 심하긴 하거든요.]
[알고 있어요. 더군다나 지금 역사물이나 시대극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 그런 우려는 그만해도 괜찮아요. 이제 그때의 일은 접어두고 이 시나리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죠.]
[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평소에는 잘만 노래하다가도 진짜 가수가 앞에 있으면 괜스레 긴장하게 되듯, 그간 게임부터 애니메이션, 영화 등등에 참여하며 훈수를 둬왔는데 레이첼이 한마디 해주겠다고 하니 여간 긴장되는 게 아니었다.
교수님 앞에 선 학생의 심정이 이럴까 싶다.
[생각보다 탄탄하고 영화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잘 구성했어요. 작가로서 정말 소질이 있으시네요.]
[다행입니다. 그럼 보완해서 극본으로 제작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당장은 어렵고, 한 가지만 충족된다면 두 달 뒤에는 가능해요.]
[무엇인가요?]
[정확한 지식이죠. 조금 전에 언급했던 대로 한국에 대해서 외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정서가 있고 일본과의 관계나 서로 차이가 나는 역사관이 적잖아 보이더군요. 당장 시나리오에서 언급된 일본과 제가 조사한 일본의 자료부터 그러하듯이 말이에요.]
[충원될 경우의 시일이 두 달인 거고요?]
[꽤 잘 쓴 이야기이긴 하지만 설정 구멍이 꽤 많으니 보완해야 하죠. 경험상 최소 20번은 수정고를 주고받으며 동반 작업을 이루어야 해요.]
‘간단하네.’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려주니 해결법 역시 금방 나온다.
[가장 빨리 찾을 수 있는 적임자는 저군요.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좋아요.]
이날부터 작가진과 나의 동반 집필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내가 미래 정보를 통해서 그려놓은 청사진을 언급하면 레이첼을 비롯한 작가들이 변형하고 적용해나가는 작업이 매번 이루어졌다.
아울러, 작품 외적인 어른들의 현실적인 사정도 시나리오를 구성할 때 고려해야 했다.
[리벤져스와의 연결고리는 왜 없는 거죠? X팀은 원래 바벨 세계관에 있는 슈퍼 히어로들이고, 리벤져스의 원작에도 등장하는데?]
[그건 맞지만, X팀은 10년 후에나 우리 손에 들어옵니다. 지금 리벤져스로 이들을 묶게 된다면 디지니 측에서 어떤 욕심을 부릴지 알 수 없습니다.]
어차피 향후 10년간 사용 될 리벤져스의 히어로들은 충분하게 있다. 당장 X팀이 바벨에 들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스토리를 이어가는 것이 가능한 상황이었기에 굳이 무리해서 이들을 리벤져스에 합류시킬 이유가 없다.
[10년이면 1기 리벤져스들의 시대가 끝나고 2기 리벤져스의 시대가 오겠네요.]
[그리될 겁니다.]
[그럼 우리는 이후 X팀이 손에 들어올 때 리벤져스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X팀을 만드는 것을 적용할게요. 그런데 이러면 자연스럽게 세계관은 독립해서 구성해야겠네요.]
[그렇게 되는 겁니까?]
내 물음에 작가들이 상의하며 대답해주었다.
[추후 X팀의 새로운 멤버들을 리벤져스에 합류시키면 필연적으로 설정 구멍이 생기게 되거든요.]
[최대한 그 구멍을 없애려면 현재 X팀에 존재하는 멤버들을 다 포기해야 하는데···]
[X팀 1, 2, 3에 출연하는 멤버를 제외한 인원 중에서 인기 있는 슈퍼 히어로가 있었나요?]
[쓸만한 애들이 없어요.]
가장 인지도가 높고, 매력적인 능력을 보유한 돌연변이들은 이미 1, 2, 3편을 통해 전부 등장했다. 그렇기에 이 스토리는 절대 바벨의 확장 유니버스 세계관에 합류되어서는 안 된다. 한 번 꼬여버린 설정 오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풀기 어려워지는 법이니까.
[시간 여행 같은 소스로 오류를 메꿀 수는 있겠지만, 타임 패러독스는 그 자체로 오류를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이미 X팀이 진작부터 수많은 설정 오류들을 보유한 상태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고요.]
이들의 말이 옳다. 그 탓에 프리퀄 시리즈에서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를 바꾸고, 그것으로 설정 오류를 수정하면서 엄청난 호평을 받게 되기는 했다.
하지만 리벤져스 시리즈의 스토리는 과거를 바꾸게 되면 바뀐 역사를 지닌 또 다른 평행우주가 생기는 것이지 미래가 바뀌는 건 아니다.
[온전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선 두 영화가 정의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달라야만 해요.]
레이첼이 옳은 말로 단언하는데 내가 뭐라 하겠는가. 내 목소리가 크다고 여기서 주장하는 건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이고 나로서도 수긍이 저절로 가는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당장은 맥거핀으로 여겨질 테지만, 10년 이후에는 치밀한 복선임이 드러날 요소들이 추가됐다.
일련의 작업을 진행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X팀을 대신한 언휴먼스를 제작한 상태잖아. 그러고 보니 상황이 묘하네. 언휴먼스는 원래도 기껏 제작했더니 디지니와 울프의 합병으로 X팀이 복귀했는데 지금도 딱 그 꼴이 났거든.’
어쩌면 이런 것도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언휴먼스에게 다행인 것은 시즌 1을 끝으로 제작이 중단된 디지니에서의 언휴먼스와 달리 내가 제작한 언휴먼스는 앞으로 계속 제작될 것이라는 점이다.
더욱 치밀하면서도 완성도 높게!
그러면서 한국인의 감정도 담았다.
[야스다가 한국에서의 테러를 과감하게 벌이기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영향력 있는 일본의 기업이 필요한데. 그런 것이 있나요?]
[있습니다.]
한국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일본의 기업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그 많은 기업을 다 나열할 필요는 없었다. 두 나라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제대로 성장하고 있는 아주 확실한 기업이 존재하니까.
[대한민국 최대의 유통 기업이 일본의 기업이거든요.]
[최대라 하면 어느 정도죠?]
[연간 매출액이 500억 달러 정도 될 겁니다.]
[상당하네요. 그 기업을 모티브로 10배 정도 규모를 불려서 만들게요.]
매출액 500억 달러면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거대 기업이지만, 야스다 그룹은 설정상 아시아 최대 규모의 기업이다. 현실의 일본에는 오성이나 GF보다 큰 규모를 가진 기업이 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니까.
그럴만한 설정을 넣어서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10배의 매출액이면 무려 연 매출 5,0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무려 600조다.
< 돋보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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