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외) 촬영장에서 >
“아주 좋습니다. 자. 그럼 이제 나머지는 홍보팀에게 맡기시고 제작팀은 한국으로 휴가 다녀올 준비 합시다!”
- 와아!
“휴가 후에는 아시죠? 바로 차기작 준비에 들어갑니다!”
- 예! 알겠습니다!
- 이거야말로 금의환향이다!
- 하하하! 돌아가자!
격렬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었다. 어째 이를 보니 기쁨에 취해서 내가 마지막에 한 말인 차기작과 관련된 이야기는 누구도 듣지 못한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박스 오피스에 따라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다시금 올라왔다.
【미노를 찾아서 1위에서 하루아침에 3위로 추락!】
【허크! 관객 대부분이 실망!】
【3,660개의 스크린으로 시작한 허크! 다음 주부터는 3,200개로 줄일 예정!】
【미노를 찾아서와 허크의 빈 공간! 마다가스칼이 채운다!】
상승기류를 탄 우리의 영화는 화려하게 비상하는 데 성공했다.
【마다가스칼 개봉 후 6일. 박스오피스 대망의 1위!】
20일 금요일에 개봉했던 마다가스칼은 25일 수요일이 될 즈음, 1위에 올라섰다.
첫 주의 수익은 8,100만 달러.
미노를 찾아서가 첫 주에 9,7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과 비교하면 이는 매우 훌륭한 성적을 거둔 것이었다.
‘다 됐다.’
이제 미국에서 내가 더 할 일은 정말로 없었다. 남은 것들은 마이코닉스의 직원들이 처리할 것들이지 내가 직접 해결할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긴 출장이었어.”
반년이 조금 넘은 기간. 느끼기에는 몇 년처럼 여겨진 기나긴 타지에서의 업무를 비로소 마무리 지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성공이라는 큰 결실을 보면서였다.
(번외) 촬영장에서
스쿨 오브 밴드의 촬영이 시작하고 에밀리가 갈망하던 배우가 됐을 무렵의 일이었다. 열심히 애쓴 결과를 보고 즐겁게 연기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현장에 방문했을 때, 나는 의외의 장면을 보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은데?’
배우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완전하게 감정을 완전하게 제어하는 일은 숙련된 배우에게도 힘든 일이다. 당연히 아직 어린 에밀리는 촬영 외적인 무언가에 영향을 받아서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었다.
[에밀리의 표정이 저렇게 안 좋은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에밀리의 어머니에게 물으니 그녀가 기운 빠지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에밀리도 이제 영화배우가 됐으니까 영화배우 조합에 등록하러 갔었거든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에밀리 스틴이라는 배우가 이미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에밀리 스틴으로는 등록을 할 수 없다고 활동명을 만들어서 다시 오라네요.]
미국의 영화배우 조합은 규정 중에 같은 이름으로는 등록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 그래서 등록 거부를 당했고 그 탓에 오늘 저렇게 심통 맞은 모습을 보인다는 말이었다.
‘애는 애네.’
웃으며 물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많은 스타들이 가명을 사용하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에밀리라는 이름은 스타가 되기에 전혀 문제가 되는 이름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물론이고 가족들 전부 에밀리라는 이름에 애정이 깊은 모양이었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네. 그래서 저도 에밀리를 설득해 보았는데··· 영 반응이 좋지 않네요.]
에밀리는 미국의 나이로 13살이다.
한창 사춘기에 들어설 예민한 나이이기에 더더욱 예민하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에밀리 스틴으로 등록한 배우를 찾아가서 이름을 바꿔줄 수 없냐고 부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놔두면 알아서 엠마 스틴으로 될 일이지.’
콩트와도 같은 일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자아이의 마음을 성인 남자인 내가 섣불리 짐작한 건 실수였나 보다.
가볍게 극복하고 평소처럼 연기할 줄 알았던 것과 달리 에밀리는 촬영에 지장을 빚고 있었다.
초반에는 반장의 역할이 짐 블랙을 매우 마땅찮게 여기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라 티가 크게 나지 않았다.
[에밀리. 반장은 아직 새로 온 선생님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아. 아니 반장은 애초부터 선생에게 좋은 가르침을 받길 원하는 게 아니라 선생에게 좋은 성적표를 받길 원하는 학생이야.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선생에게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 되겠니?]
[죄송해요.]
이 정도의 지적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씬을 넘어갔을 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에밀리! 표정! 표정 좀 풀고 하라니까?]
[······.]
[에밀리! 대체 시선을 어디에 두는 거야!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반장이 땅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해?!]
[죄송합니다.]
[에밀리! 선생님에게 시선 고정하라니까? 아니 표정은 풀고 고정해야지!]
[진짜 죄송합니다.]
지적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에밀리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고 감독의 얼굴은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급기야 그가 고성을 질렀다.
[아니! 에밀리!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결국, 터지고 만 감독의 화.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어머니는 차마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부모의 마음으로는 당장 나서서 에밀리를 감싸고 싶을 테지만, 나서면 안 되기에 속상해하는 모습이었다. 에밀리를 보던 나 역시 씁쓸하게 혀를 찼다.
‘저러다가 울 것 같은데.’
우는 것은 그 자체로는 문제 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울게 되면 눈에 충혈과 함께 주변이 부어오르게 되는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 눈이 가라앉을 때까지 촬영이 중단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고···’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과 꾸지람을 듣는 것에 못 이긴 것일까, 결국 에밀 리가 우려하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감독이 입술을 질끈 깨물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니! 어휴··· 내가 말을 말자. 이봐, 마이티. 쟤가 연기 천재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저걸 보면서도?]
[아직 어린아이이고 이런 촬영이 처음이라서 그럴 거야. 금방 적응하겠지.]
[마이티. 우리는 지금 상업 영화를 촬영하고 있지 영화 교습소를 운영하는 게 아니야. 이런 식이라면 대본을 또다시 고쳐야한다고!]
짜증 가득한 감독의 모습에 에밀리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마이티 역시 무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감독과는 달리 마이티는 아직 에밀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미 다른 스태프들은 촬영이 길어지는 거로 벌써 에밀리를 향해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아이니까. 어리니까.
애석하게도 이런 사정은 1,000대 1의 경쟁률을 넘은 시점부터 한낱 핑계가 되고 만다. 합당한 결과물을 내야 프로이고 에밀리는 카메라 앞에서 소녀가 아닌 배우여야 했다. 그게 부모의 품과는 다른 차디찬 사회의 온도다.
[회장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에밀리를 조금 달래주세요. 저는 상황을 환기해 보도록 할게요.]
에밀리 어머니에게 말하고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이 오전 11시 30분이니··· 얼추 시간을 끌 수 있겠어.’
점심식사 시간을 가지기에는 이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에밀리를 달래는 것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아직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마이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잠시 대화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어차피 지금 당장 촬영을 이어나갈 수 없다면 점심을 미리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점심이요? 잠시만요. 이건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는 근방에서 스태프들을 관리하던 조감독을 데리고 왔다. 나는 같은 물음을 했고 그가 대답했다.
[지금 식사하면 중간에 다들 배가 고파서 집중력을 잃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갑작스레 식사시간을 당기면 준비가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오늘 식사는 제가 제공하기로 했고 이미 준비 역시도 완료되어 있으니까요.]
에밀리의 첫 촬영이다. 기왕 그녀를 밀어주기로 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을 최대한 주기로 했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런 음식 대접 같은 게 전부였다. 그랬는데 이게 이런 타이밍에 시간 벌이용이 겸해져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저녁이 되기 전에 다들 배가 고플 텐데···]
나는 고민하는 조감독에게 재차 말했다.
[그것 역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분들은 햄버거 실력도 아주 훌륭하거든요. 4시쯤에 햄버거와 콜라를 먹으면 배고픔의 문제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다이어트 콜라도 있습니까?]
[물론이죠.]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제가 당장 감독님을 설득하도록 하죠.]
‘됐다.’
에밀리의 상태도 좋지 않거니와 이쪽에서 식사를 시원하게 산다는 이야기이니 감독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곧 대화를 마친 조감독은 그를 손쉽게 설득했고 내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알렸다.
[우선 식사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시각은 11시 40분! 12시 20분까지 식사 마치고 촬영 준비해 주세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촬영장 앞의 공간으로 내가 준비한 푸드 트럭 세 대가 들어왔다.
군침 도는 갖가지 음식들이 정렬됐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았다. 다름 아닌 뷔페였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다양한 음식을 준비해봤어. 잘못 먹으면 내 탓이 아니라 본인 탓이라고.’
물론 메뉴들은 한국과 다른 미국인의 식성으로 맞춰진 뷔페다.
갖가지 빵부터 시작해서 샐러드와 고기 등이 수두룩했다. 푸짐한 메뉴가 나오자 촬영에 차질을 빚었던 조금 전의 사건은 금방 지워졌다.
[촬영장에서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우리 영화 저예산 아니었어? 식사를 이렇게 주다가 나중에 제작비가 없어서 영화 엎어지는 거 아냐?]
[이거 제작진에서 준비한 식사 아니래.]
스태프부터 배우들까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뷔페였기에, 모두의 입에서 기분 좋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 누가 준비했는데?]
[저기 있는 에밀리네 소속사에서 준비한 식사라는데?]
[진짜? 아까 촬영 중단되고 속으로 엄청 욕했는데, 미안해지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조심스럽게 에밀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울음은 그쳤지만, 손수건을 손에 꼭 쥐고는 놓아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니?]
[아니요. 저 지금 너무 바보 같아서···]
속이 상해서 다시 울먹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바보 같다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아까 다들 그런 말을 하는 거 다 들었어요.]
[틀려. 그건 에밀리가 진짜 바보같이 보여서 그러는 게 아니라 촬영이 길어질 것 같으니까 나오는 반사적인 불만이야. 사람들 입에서 나온다고 그게 다 진실이지는 않거든.]
[···정말요?]
[그럼. 에밀리의 대장님이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니?]
어깨를 펴며 콧대를 높이자 에밀리가 웃었다.
[못 본 거 같아요.]
[그럼 믿어도 되겠다. 그치?]
[···네.]
조금은 진정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에밀리를 챙겨서 적당한 자리로 옮긴 뒤에 식사를 시작했다. 어른이나 아이 모두 마음에 드는 음식이 들어가면 말문이 트이고 감정이 풀어지는 모양이다.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에밀리가 내게 물었다.
[감독님이 오늘 일로 배우를 바꾸겠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지.]
[그렇지만 그게 잘 안 되는걸요.]
[어머니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영화배우 조합에서 에밀리 스틴이라는 이름을 못 쓰게 됐다면서?]
[···네.]
그녀가 괜히 포크로 샐러드만 찔렀다.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에밀리는 배우가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해?]
[네?]
[배우가 되고 싶어 했고, 드디어 배우가 됐잖아? 그럼 배우가 뭘 해야 하는 걸까?]
[그거야 연기죠.]
[그래. 에밀리는 이제 평생 연기자로 살아갈 거고 평생 연기를 하게 될 거야. 모든 일을 마치고 일이 아닌 사생활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 모든 것이 연기가 되는 거지.]
[카메라가 돌아갈 때 말고도요?]
[그래. 카메라가 안 돌아갈 때도.]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는 무슨 연기를 해요?]
[에밀리 스틴이라는 이름은 못 쓰게 됐잖아? 그러니까 새로운 활동명을 정해야 할 거고. 즉, 에밀리는 이제부터 에밀리가 아니라 그 새로운 배우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거야.]
활동명을 자신이라고 인정하기가 싫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지켜나가면 된다.
새로운 이름을 받아도 여전히 자신은 에밀리이고 단지 배우로 활동할 그때에만 새로운 존재가 되는 거다.
나는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 (번외) 촬영장에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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