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빠졌다 >
[그렇군요. 그럼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일본에서 2주 뒤, 몬스터 프레데터스 대회가 열립니다. 해당 대회와 동일한 조건으로 미국에서도 대회를 주최할 계획입니다.]
말하며 경쟁심리가 느껴지도록 유도했다.
[첫 대회는 11월 초. 조건은 상급 난이도 입장. 참여 외에 대회 관람도 가능하니 많은 분이 참석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호응해주시는 만큼 더욱 좋은 행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내 말이 로렌즈 제인가 가진 게이머로서의 자부심을 잘 건드렸나보다. 그녀가 물었다.
[일본은 2주 뒤에 하는데 왜 미국은 한 달 뒤에 하는 거죠?]
[플레이어의 성향 때문입니다.]
[일본보다 미국의 게이머의 스타일은 여유롭게 게임을 즐기는 겁니다. 그런 분들에게 2주 이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과 상급 난이도의 진입이라는 조건을 건다면 어떻게 될까요? 즐기려고 산 게임으로 즐기지 못하고 대회준비만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차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저희 게이머스 포럼은 게임의 흥행을 위해 기본적인 것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거였군요.]
로렌즈 제인 기자는 제법 감명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는 좋게 포장해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해지자면 ‘너희 미국은 일본보다 게임을 못 하니까 2주 뒤에 하면 답이 없는 대회가 돼. 그래서 시기를 늦춘 거야.’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선의의 거짓말이 존재한다. 필요할 때는 아낌없이 써주는 게 좋다.
[정말 좋은 신념이시네요. 게임의 흥행보다 게이머의 재미를 더 중요시하는 게임회사라니··· 알겠습니다. 그럼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저희야 말로 감사합니다. 좋은 기사 부탁드립니다.]
싱긋 웃으며 그녀가 떠났다. 발걸음이 경쾌하고 표정이 밝았던 것을 보면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일요일을 지난 월요일.
로렌즈 제인의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게임 개발에 진정성을 가진 게임회사 게이머스 포럼. 몬스터 프레데터스를 말하다.』
그녀는 우리와의 인터뷰 자체보다 내가 말했던 몇 가지를 더욱 중점적으로 다뤘다. 로렌즈 제인은 게이머들이 원하는 사항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글로 표현하는 데 정통한 사람이었다.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드는 기자이며 기사였다.
“이거 반응 괜찮겠는데?”
내가 봐도 몬스터 프레데터스에 혹하게끔 써진 글.
하물며 지금 ZBox를 구매하고 게임을 선택하지 못하는 게이머들에게는 얼마나 매혹적이겠는가?
부푼 기대심리를 간직하고 추이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결과가 드러났다.
‘주간 판매량 200만 장 돌파!’
몬스터 프레데터스의 판매량은 그야말로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200만 장을 넘어서기에 이르렀고 더 놀라운 점은 일본에서의 약진이다. 벌써 30만 장이나 팔렸다고 한다.
이러한 희소식에 마이크루는 우리보다 더욱 신이 났고 게임을 50만 장씩 4번으로 나누어서 200만 장이나 더 발매하자는 통 큰 제안을 해 왔다. 나 역시 400만 장까지는 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이를 수락했다.
‘이거 500만 장 돌파하는 거 아냐?’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본다. 지금 찍히는 이 숫자들은 남들 보기 좋은 정도의 트로피에서 멈추지 않는다. 내게는 하나하나가 진짜배기 돈다발이나 마찬가지다.
98. 바빠졌다
일본에서 몬스터 프레데터스가 성공하며 ZBox를 견인하는 것은 물론 마이크루의 입지마저도 늘려주었다. 이는 게이머스 포럼 내부에도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 역시 홍보해야 합니다!”
“깃발을 세우기 딱 좋은 최적의 타이밍입니다!”
덕분에 이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해서 일본 게임 시장에 게이머스 포럼의 게임들을 알려야 한다는 의견들이 올라왔다. 그 탓에 여유 있게 쏘우리스트의 개봉까지 미국에 있으려던 내 스케줄에 일거리가 밀려들었다.
“드라마의 회장님들은 잘만 놀던데 왜 현실에서는 일이 더 많은 거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맡기며 ‘아직은 더 많이 벌어들일 때겠지.’라는 식으로 스스로 위로했다. 사실 이건 배부른 불만이다. 장사가 되지 않아서 파리만 날리다 고사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지 않던가.
‘여유가 사라진 건 아쉽지만, 이런 아쉬움은 언제라도 환영이야.’
그렇게 아쉽지만, 기분은 좋게 회사로 돌아왔다.
“현재의 추이로 볼 때, 올해 안에 일본 판매량이 50만 장을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전략적인 회의는 게임을 발매하기 전에 하는 게 옳지만, 지금은 조금 어수선했다. 예상치 못한 흥행은 우리에게 한발 늦은 회의를 진행하게끔 만들었고 그 탓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으로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고진환 부문장이 말했다.
“거기에 크리스마스와 신년의 특수성까지 고려하면 내년 1분기까지 80만 장도 가능할 거라고 판단됩니다.”
350만 장의 판매량을 기대하고 있는 미국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작은 규모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서 판매된 Zbox의 수량이 50만 장임을 고려하면 이 숫자는 30만 장이나 부풀린 말도 안 되는 기대치인 셈이다.
‘일본이 우리한테 미쳤어. 이런 식이면 나도 일본을 사랑하게 될지도?’
미국에서의 Zbox 판매량은 무려 500만 대. 게다가 마이크루의 공격적인 할인정책 덕분에 기기가 실시간으로 급격하게 팔려나가는 중이다. 그런데도 350만 장을 기대치로 잡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기기의 판매량을 넘어서는 수치를 점 칠 정도였다.
‘미친 상황이야. 이런 데도 다들 그쯤은 팔 것으로 볼 정도니까.’
말 그대로 비현실적인 열광이며 기대치인 셈이다.
“지금 이 상황을 최대한 활용할 방안을 기획해야만 합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번에 회장님께서 안배하셨던 아주 좋은 무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대회 말이군요!”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예! 이것의 효과를 극대화할 방안을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간부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크게 감탄하고서 심도 있는 의견들을 주고받았다.
‘넘어지니 황금이 떡 하니 떨어져 있는 경우이기는 하다만, 이쯤되면 민망하단 말이야.’
나도 사람이니 칭찬을 들으면 당연히 기분 좋다. 그런데 지록위마(指鹿爲馬)도 아니고 뭘 해도 내가 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건 민망한 것을 넘어서서 부담될 정도였다.
‘충성심은 적당히 보이라고.’
은근히 째려보는 표정으로 고진환 부문장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 눈치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지 않는 사람이라 그런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여간 마이웨이야.’
그의 관심은 오직 다른 간부들이 내는 의견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내가 이런 식의 잡념으로 시간을 보내도 우리 회사가 잘 돌아가는 것이지만 말이다.
“일본에서는 남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확장팩을 여성의 에로틱함을 더욱 부각하여 만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몬스터 프레데터스 개발팀의 한 과장이 낸 의견.
‘틀린 말은 아니지.’
비단 일본만의 사례가 아니다. 더 크게 보아도 주류 게이머들은 남성들이기에 세계 시장에서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게임은 인기 있다. 나중에는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여자들이 ‘이게 다 게임 개발을 남자들만 해서 남성 중심의 게임만 나오는 거다! 여자에게도 즐길 권리를 달라!’고 하는 촌극도 생긴다.
그에 대한 반론은 ‘너희 여자들이 직접 만들어!’였고 말이다.
‘아무튼, 섹슈얼리티 확장팩은 틀린 소리다.’
그간 우리 회사의 개발자들에게 어떻게든 한국적인 사고방식에서 깨어날 것을 요구하고 자극도 여러모로 줬다. 하지만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포르노와 남성성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섹슈얼리티를 무작정 거부하는 건 아니야. 단지 아무 곳에서나 써버리면 곤란해. 그건 포르노나 마찬가지다.’
저 의견이 수용되는 방향으로 회의가 진행되면 내가 끼어들어서 딱 잘라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역시 우리의 능력자인 고진환 부문장이 단호히 거부했다.
“그건 안 됩니다. 일단 확장팩의 개발에 시간이 걸리는 건 둘째 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콘텐츠를 활용하여 더 재미를 느끼게 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합니다. 새로운 요소를 개발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커뮤니티 사이트를 개설하는 건 어떻습니까? 게이머스 포럼이 한국에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내 유저들과 빠른 커뮤니티를 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도 게이머스 포럼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를 개설한다는 안건.
“좋은 의견입니다. 하지만 게이머스 포럼 같은 규모의 사이트는 구축만 해도 꽤 시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진행하기는 하겠으나 그 외의 의견이 또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연이은 고진환 부문장의 반려였다. 게임을 출시하기 전이었다면, 가능한 전략이었지만 지금은 늦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냐. 이건 가능해.’
가볍게 손을 움직여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고진환 부문장님.”
가만히 회의를 지켜보던 내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다. 곧 모든 회의가 멈추어졌고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그 의견은 조금만 변경하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겠습니다.”
권력을 쥔 상급자는 더욱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근거 없이 밀어붙여도 일을 진행할 수 있지만 남용하다가는 상호 간의 신뢰를 저버리게 되어서다.
저들만큼의 근거와 이유조차 제시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거잖냐.’라며 직원들이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열의조차 저하된다.
“고진환 부문장은 일본 게이머와 한국 게이머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는 솔직한 답변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시점이다. 지금보다 훨씬 나중에 출시 될 게임 역시도 이 차이를 몰라서 망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로 발생한다. 그러니 지금의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모르는 게 마땅했다.
‘그래서 내가 아직은 할 역할이 많은 거고.’
꿈속 미래로 확신할 수 있는 그 시기까지는 안전하게 회장 노릇을 해도 될 것이다.
국내의 게임회사들이 많은 시행착오 끝에 깨닫게 되는 실패의 원인! 나는 이를 알려주었다.
“한국은 대규모 전쟁이나 대규모 길드, 그리고 대형 커뮤니티들을 좋아합니다. 여기서 반복된 저의 표현을 통해 짐작하셨겠지요?”
“대형이군요?”
“맞습니다. 반대로 일본은 소규모 길드를 통한 친목 행위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게임을 홍보하기 위한 커뮤니티 그 자체에도 영향을 끼치지요.”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 전에 나온 의견처럼 우리 회사의 성장 배경에는 게이머스 포럼이라는 대규모 커뮤니티 사이트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또한, 요즘 나오는 모든 게임은 사이트 홍보에 덕을 크게 입고 있지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게이머스 포럼이 아닌 국내 유저들의 성향입니다.”
오로지 사이트의 힘으로 일궈낸 결과가 아니다.
“유저와 게이머스 포럼의 성향이 같았기에 성공했음을 재차 강조합니다.”
한국의 온라인 게임 퍼블리셔가 게임 커뮤니티를 중요시하는 배경.
이는 게임을 플레이하기 전에 게임 정보를 습득하거나 유저가 직접 추천하는 게임을 알 수 있는 곳이 게임 커뮤니티라서다. 또한, 공통의 관심을 가진 유저들이 모이는 무대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지. 본토행티켓 같은 이들이 있거든.’
전자기기에 얼리어답터가 있다면 게임에는 오피니언 리더, 혹은 네임드가 존재한다. 이들은 많은 게이머에게 지지받는 게이머 또는 관리자다.
영향력이 상당하기에 이들이 인정하는 게임이 있다면 해당 커뮤니티에 활동하는 사용자들은 그 게임으로 대거 이주하는 기적이 벌어진다. 이것이 한국 게임 시장의 특성이며 게이머스 포럼의 성공 가도를 튼튼하게 떠받치는 토대다.
반면, 이 성공공식을 일본에서 적용하면 처절하게 박살 나고 만다.
‘많은 게임사 혹은 퍼블리셔들이 한국의 특성만 생각하고 일본에 진출했다가 낭패를 무진장 봤었다더라. 그러니 우리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해.’
성공적으로 일본에 진출하기 위한 개선 전략!
실패의 역사 없이 내 주장과 논리로 이루어지는 현실의 미라클인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고진환 부문장 같은 충신들이 생기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나중에 밑천 떨어지면 시원하게 물러나야겠어.’
20년은 더 해먹고 박수 칠 때 꼭 떠나야겠다.
“다양한 정보가 필요한 사이트? 그건 천천히 준비해도 됩니다. 사이트는 아주 가볍게 제작합시다. 작은 유저들이 소규모로 모여서 놀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모든 것을 우리가 다 준비해줄 필요가 전혀 없다. 일본은 오히려 개발사 측에서 몽땅 만들어주면 흥미를 잃는 나라다. 그러니 ‘이 게임은 너희가 어떠한 방향으로든 즐길 수 있어!’라는 점을 알려주면 된다.
< 바빠졌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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