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모에서 >
67. 정모에서
- [귓속말] 지옥검 : 아! 진짜 열 받아! 평소에 검이 그녀석이랑 붙으면 열에 여섯 번은 내가 이긴다고! 근데 왜!
그 이벤트 중에만 검이 녀석이 랜타가 계속 터지는 건데17물분에 찬 지옥검의 하소연.
모든 조건이 대등했는데 정작 결과는 지나칠 만큼 검이 우월하게 승리해버렸다.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전부를 제대로 준비했는데 일어난 참극!
정말이지 하늘로부터 버림받았다고봐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당사자만 비통하지 옆에서 구경한 사람은 마냥재미있을 따름이다.
- [귓속말] 구운몽 : 그래. 그래. 니가 검이 보다 더 쎄다. 하지만 우승은 검.
- [귓속말] 지옥검 : 아아악! 알아! 안다고! 젠장! 근데 평소에 우리가 붙어서 내가 더 많이 이긴다는 걸 사람들은 모르니까! 사람들은 검이 그 놈이 켄헬서버 2인자라고 생각할 거 아냐!
- [귓속말] 구운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미난 점은 우리와 다른 유저들의 관심사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였다. 현재 게시판에서는 소문이 소문을 만들어내면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쭉쭉 볕어나가는 중이었다.
<친구가좋은사람들 길드에 있다. 구운몽에 대해서 들은 썰푼다.>
<동네킹 끝나고 구운몽이 1등, 2등 불렀데. 2:1로 짱 떴는데 운몽이 이김ㅋㅋ>
'짜샤. 그런 적 없다.'
지인이 우리 길드 소속이라는 이 게시물은 허언증 환자 가작성한 것이 틀림없었다. 2대 1로 싸워도 당연히 이기기는 할테지만, 굳이 그런 일을 자존심 뭉개버리면서 입증해
서 뭐하겠는가.
공공연하면서도 암묵적으로 나를 최강으로 인정하는 데괜히 힘자랑을 하는 건 멍청한 일이다. 하지만 유저들 입장에서는 이런 자극적인 글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에투덜투덜 거리던 지옥검이 느낌표가가득한 메시지를 보냈다.
- [귓속말] 지옥검 : 야야야! 총길드 마스터!!!! 이놈
아브브라보
- [귓속말] 구운몽 : 와이? why 왜 그러삼?
- [귓속말] 지옥검 : 언제쯤 얼굴을 비친 거냐? 무지무진장 바쁜 너만 빼고 우리만 계속 보고 있다고! 이쯤 되면 정모에 나와야 인간이라고 보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7!1!
'하긴. 너무 끌기는 했지?'
플레지만 하면서 뼈를 묻을 각오였다면 진작 현실에서도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길드가 확장하고 제대로 안정화된시점부터 사업에 치중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모이는 타이밍을 놓치다가 뉴 온라인 같은 다른 게임이 승승장구하였다는 점이었다. 게임 내에서야 '우리는 서로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길드원이다!"를 외치지만 실제로 인품이 어떨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가뜩이나외부 인터뷰를 극도로 자제하는 이유가 '플레지하는 타사 대표님"이라고 알려질까 봐다. 이런 판국이라 몸을 사렸던 것!
'그런데 우리는 안사락스 공략비밀마저 공유하는 사이니까"
년 단위로 지켜보고 최근에는 확신했다.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이탈 없는 우리의 길드원들은 직접 만나도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렸다.
- [귓속말] 구운몽 : 오케이. 콜!
- [귓속말] 지옥검 : 오오! 진짜지?
- [귓속말] 구운몽: ㅇㅇ 언제임?
- [귓속말] 지옥검 : 금요일 저녁 강남역! 매번 여기서함!
- [귓속말] 구운몽: ㅇㅋㅇㅋ
위치마저 딱 좋았다. 길드원들은 알지 못했을 테지만 강남역은 회사를 기준으로 볼 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가깝다.
나는 금요일 저녁 업무를 끝냄과 동시에 바로 이동했다.
"갈색 빈티지 티셔츠에 카고바지라고 했는데:......'
닉네임이야 꿈에서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잘알지만 실제 외모는 전혀 알지 못했다. 때문에 처음 오프라인 모임을 나가는 모든 이가 그렇듯이 오늘 입고 을 복장에 대해 숙지한 채로 강남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 가지를 간과했다. 자기만의 개성과 패션보다는 유행과 대세를 따르는 우리 한국남자들의 속성이었다.
"죄다 똑같은 옷이냐?"
갈색 빈티지에 카고 바지를 본 숫자만 30명이 넘었다.
고개를 돌리면 돌리는 대로 그 방향에서 꼭 발견할 수 있
을 정도다. 대세 패션이라서다. 이런 자리에서 지옥검을 찾아내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권수성찬이랑 같이 왔었으면 또 모르지만 이 자식들은 자판기 때문에 늦는다고 했고.'
하지만 지금은 문명사회이고 첨단 과학이 존재하는 새로운 21세기를 살고 있다. 한양에서 김서방 찾기 식의 맨땅에서 헤딩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나다. 구운몸. 여기에 너랑 똑같은 옷을 입은 클론들이 너무 많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지옥검이 한참 웃었다.
- 나도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다고. 이래서 남이 골라주는 옷을 입으면 안 된다니까. 에잇!
"시끄럽고, 손이라도 들던 가 해봐."
- 격정 하지 마. 이번에는 누가 봐도 나라는 사실을 알게 해줄게.
경쾌한 대답 이후, 크게 숨을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나 여기-! 있다-"
확 퍼진 목소리에 지나던 사람이 몽땅 한쪽을 보았다.
갈색빈티지티셔츠에카고바지를 입은길쭉한남자. 190센티미터는 되어서 더 말라 보이는 녀석이 휴대폰을 번쩍들고 있었다.
'으아아! 돌아이 새끼잖아!"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모습은 대부분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게임에서의 돌아이도 현실에서는 펑범하기 마련! 그런데 저 자식은 정반대였다.
군중 속으로 잠적한 뒤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 어. 방금 내 목소리 못 들었냐?
닥치고 뒤쪽 횡단보도로 와!"
- 하하하하!
자기 주관이 뚜렷한 웃음이 귓전을 울렸다.
"반갑다"
"너 정말 마이페이스구나."
"하하하! 늦은 사람들은 다들 알아서 오니까우리끼리 가자고. 벌써부터 목이 빠져라 너 보고 싶은 사람들이 한가득이거든."
악수하며다시금 통성명을하고는 이동했다. 지옥검만나를 마중하기 위해 나와 있었고 다른 길드원들은 '아페리티보'라는 장소에 대부분 모인 상태라고 했다. 느낌 있어 보이는 단어라서 '무슨 카페려나.'싶었는데 실상은 아니었다.
'고상한 이름의 고기뷔페네.'
메뉴에 비해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뷔페였다.
강남 스타일을 한껏 자랑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손님 많네. 어느 테이블이냐?"
실내에는 40여명이 되는 이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내 물음에 지옥검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손님? 여기 죄다 진상만 있는데?"
:어? 진상?"
지옥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려는 찰나, 녀석이 역에서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총군주님 오셨습니다!"
"오오!"
지옥검의 말 한 마디에 시끄럽게 떠들던 대화가 쏙 들어갔다. 집게를 들고 어떤 고기를 먼저 먹는 게 좋을까, 하며 담던 이들까지 탁 내려놓고는 일제히 우리 쪽을 보았다.
척!
"오셨습니까!"
나이 불문. 연배가 있어 보이는 이들까지 모조리 군기 잡힌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식당에 있는 모든 손님이 우리 길드원이었던 것이다.
"반감습니다. 구운몽입니다."
얼떨떨해하는 내게로 팔뚝에호랑이 문신을한서늘한눈매의 중년인이 다가왔다. 누가 봐도 전국구 조직 폭력배의 포스가 물씬 풍긴다.
"우리 총군주님 자리는 저쪽 중앙에 잡아뒀으니 바로 앉으시면 됩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따라서 이동하니 대학 교수님인가, 싶은 연배의 남성이 내게 말했다.
"좀 어색하시죠? 제가 구도자의 길입니다."
"네! 어색합니다!"
머리카락이 하얗고 턱까지 수엄만 나지 않았을 뿐 어조에는 연륜이 묵직하게 담겼다. 게임 정모라서 가볍게 나왔는데 된통 당한 기분이다.
물론 젊은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다만 테이블마다 중심을 딱 잡고 있는 어른들. 사업체 하나씩은 갖고 있음직
한 이들 때문에 나로서는 복잡 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플레지는 돈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게임이라더니.
미래에 있는 이야기지만 새 버전의 플레지가 나왔을 때 인터넷 유머처럼 돈 글이 있었다. 각자가볍게 현금 수억을 장전하고 '그 누구도 우리의 빅 머니를 이기지는 못할 겁니다:라고 호언장담한 길드의 선전포고문이었다.
그걸 보면서 서민 유저이던 나는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꼈었다. 아울러 '랭킹 1등은 저런 미친놈들이 하는 거구나-라며 자조했었다. 과정과 결과는 둘째 치고 그만한 재력을 망설임 없이 쏟을 수 있는 유저들이 두텁게 존재한다는건 그만큼 충격적이다.
그러다 아차싶었다.
'어? 그런데 남들이 보면 내가 미친놈 우두머리잖아?'
다시 보니 연배에 어울리는 출륨한 여흠을 가진 멋진 인생선배로 보였다.
'아무렴! 술집에서 돈 쓰는 거보다는 백만 배 좋지!'
그즈음. 내 헛웃음을 본 지옥검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했다.
"아무래도 총군주님은 정모를 처음 참석하셨기 때문에 서로서로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슴에 자신의 아이디를 적은 이름표를 패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이름표를 패용하시지 않은 분들은 이곳에 오셔서 이름표를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명찰을? 이 나이에?"
"에이. 무슨 대학교 엠티 온 것도 아닌데 그게 뭐냐?"
"어차피 여기는 우리밖에 없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이름표 달고 오늘 하루 신나게 먹고 마십시다!"
"먹고 마시자!"
"마시고 죽자!"
고서적에서도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이 실릴만큼 세대 차이는 시대와 관계 없이 항상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이 어색함과 불편함을 달래주는 신의 음료를 개발했으니 그것이 바로 술이다.
게다가 이곳에 지천으로 널린 메뉴가 무엇이던가.
바로 고기다!
씹고 뜯을 수 있는 육즙 가득한 음식에 술잔이 기울어지니 서먹함은 순식간에 지워져갔다. 플레지라는 공통의 주제도 있으니 시간이 흐르고 비워지는 병의 숫자만큼 자리에 함께 한 20대 초반부터 40대후반까지의 사람들은 짙은 우애를 자랑하게 됐다.
구석에서 볼이 터지게 고기를 흡입하는 '범'이는 디자인을 공부하는 대학생이고 교수님인 줄 알았던 구도자의길은 알고 보니 '아페리티보"의 사장님이었다. 놀랍게도 사차원이자돌아이로 보이는 지옥검의 직업은 모델!
'난 쟤가 나온 잡지가 잘팔린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데?'
패션 센스로 볼 때 딱히 공감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함명환이라는 자기 이름석자만 내밀면 모델계에서는 뭐든 만사오케이 급의 슈퍼 엘리트라고 하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분명히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거라서 과장을 했으리라고 확신한다.
인기는 없지만 현직인 배우도 있었다.
"형님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들 하십니까?"
당장은 단역이지만 언젠가는 대배우가될 거라는 거창한 꿈을 꾸고 있는 훤칠한 친구.
플레지에서의 닉네임은 치명타.
현실의 이름은.
"총군주님 또 제 이름 까먹으셨나 봐요. 심영탁입니다!
나중에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될 겁니다!"
훗날 유명한 '덕업일치'라는 말에 꼭 들어맞는 대기만성형의 인재였다.
그에게 지옥검이 어깨동무를 했다.
"넌 참 정모에 빠지지도 않고 잘 나온다?"
"에이~형님! 전 우리 사람들 길드 정모가 세상에서 제일좋다니까요?"
"돈 안내고 마음껏 먹고 갈 수 있어서?"
지옥검의 말을미루어볼 때, 그는 이 모든 정모에 한 번을
빠지지 않고 모이고 있는 모양이다. 녀석의 말에 치명타가 넉살좋게 웃었다.
"그렇죠! 게다가 여기 구도자의길 형님이 운영하시는 고기 뷔페는 정말 대단한 고기 뷔페라니까요!? 이런 질 좋은 소고기들이라니!태어나서 이렇게환상적인 곳은 처음입니다!"
무명 배우 생활이 길었다고 하더니 생활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중에 플레지를 접게 되면 홍보 모델같은 걸 시켜도 괜찮겠네.'
그에 대해 오래 생각할 수 없는 건 아직도 소개받을 인원이 수두룩해서였다.
처음 딱 봐도 '형남'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포스의 주인공은 바로 담덕.
좋은 사람들의 활 엘프 지휘관인 그는 나는 몰라도 아는 이들은 잘 아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율리아나 나이트 클럽 사장님!"
강남 일대의 유흥을 책임지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어른이시다.
"뀌호법이라 합니다."
날카로운 눈매. 건달과는 다른 차가움을 보이는 최강 마법사 고정수. 직업은 무려 변호사라고 한다.
이외에도 사회 각츰의 직업들이 총망라했으니 오히려 대학교에 재학 중인 평범한 학생들이 반가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다들 화기애애하게 잘 어울렸다. 각각의 직장과삶이달랐으나플레지와길드라는 이름으로끈끈하게뭉쳤기 때문이었다.
<정모에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