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급시계 >
‘게다가 하이퍼 FPS는 기존의 FPS에 비해서 보는 맛이 있지.’
이 말은 e-sports로의 가치 역시 가지고 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멋진 그림이 그려진다.
닥터 스티븐레인지가 마법을 펼쳐서 방어하고, 하늘 위에서는 라이언 맨이 미사일을 쏘아댄다. 그리고 상대 진영에서는 캡틴 실드가 방패를 들고 라이언 맨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돌격하고 그 뒤를 다크 위도우가 지원해주는 게임!
‘고급 시계에 대한 정보야 확실하게 있어. 이걸 바벨의 슈퍼히어로들에 최대한 대입하면 충분히 매력적인 게임으로 완성될 거야.’
언제나 그렇듯 기존보다 더욱 나은 작품을 만드는 거다.
[윤 회장님이 게임에서 굉장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부분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그걸 믿고 바벨을 맡기고 있는 거고요. 그렇지만 이제 와서 게임을 새로 만들고 그것으로 부가 효과를 본다는 건 저희로서 납득하기가 어렵군요. 그보다는···]
[생각해둔 바가 있어 보이는군요.]
[네. 이미 굉장히 성공한 게임이 있지 않습니까? 그 레전드 오브 뉴 어스라고 했던가요? 아무튼 그 게임도 많은 캐릭터들이 싸우는 게임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라이언 맨 만 추가하면 훨씬 쉽고 간단하게 인지도를 높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이도 지긋한 뉴욕 금융가의 이 양반들이 이 게임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다?’
이후로 나에 대해 제법 조사를 한 모양인 것 같다. 어찌 보면 애초부터 저런 제안을 하려고 준비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견 괜찮아 보이는 저 방안에는 큰 문제가 있다.
[그건 곤란합니다. 실패가 뻔하니까요.]
[어째서죠?]
[지금 론 온라인에 캐릭터가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많다고 했으니까 한 50개는 넘겠죠?]
[저희가 베타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에도 50개는 넘었습니다. 지금은 정확히 89개의 캐릭터가 업데이트된 상태지요.]
어마어마한 캐릭터의 숫자에 다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가 지적하는 바를 눈치챘다.
[여기에 라이언 맨을 추가 한다면?]
[···과연 그렇군요. 주목을 받기가 어렵겠습니다.]
요리에서 모든 메뉴가 메인 디쉬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게임에서도 89개의 캐릭터가 전부 동일한 지분으로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캐릭터는 자주 사용되고 또 어떤 캐릭터는 외면받는다.
그것이 이런 게임의 특징이다.
‘고작 10개 정도밖에 안 되는 대전 게임에서도 거의 사용되는 캐릭터만 사용이 되는데, 이건 비교도 할 수 없지.’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라이언 맨을 넣고 이 녀석이 주요 메타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측에서 꾸밀 수는 있으니까.
‘그냥 얘가 엄청 좋게 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이렇게 게임사에서 의도적으로 하나의 캐릭터를 몰아주면 그것이 게임의 인기를 해치는 일이 된다. 결코, 좋은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저들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개발을 시작한 게임으로 언제쯤 빛을 보겠습니까? 회장님은 아주 멀리까지 보고 사업을 하시겠지만, 투자자들은 그렇게 멀리만 보고 투자를 할 수 없습니다.]
끈질기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이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투자자들의 간섭 없이 거의 모든 게임은 나의 자본으로만 이끌어오다 보니까 이런 경험이 없었을 뿐. 다른 게임사들은 늘 이런 회의를 통과해서 게임을 만들고 있었을 거다.
‘이상한 게임들이 판을 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게임이든 뭐든 투자자들이 자꾸 좁은 시야로 눈앞의 이득만 이야기하니까.’
역시 돈이 문제다.
[그렇게 멀리만 보실 필요 없습니다. 미약하긴 하지만 삼 개월이면 충분히 성과를 보여드릴 수 있으니까요.]
[삼 개월이요?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게임을 완성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졸작으로 만들어져서 오히려 캐릭터의 가치만 더 떨어질까 우려되는 군요.]
‘이 자식들이 자꾸 무시하고 드네?’
무슨 한국 특유의 부실공사 시공을 이야기하듯이 나를 보고 있다. 이건 아주 불쾌하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삼 개월 후에 LA에서 진행될 거대 행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삼 개월 후에 LA라면··· 게임쇼요?]
[오호. 아시는군요. 그렇다면 설명이 좀 쉬워지겠군요. 이 역시도 아는지 모르겠으나 본래 게임이라는 건 꼭 출시되어야만 해당 게임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GF처럼 게이머들에게 인정받는 게임사에서는 게임을 출시한다는 정보. 오직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파급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이는 아이스 스톰에서 공개했던 게임의 트레일러들이 얼마나 큰 효과들을 불러일으켰는지를 회상하면 충분히 알 수 있다. 2003년에는 결국 나오지도 않았던 게임들이건만 그 일러스트로 만들어진 차양막이 피시방을 도배하기도 했을 정도다.
[게임쇼에서 새로운 게임 개발을 공개하는 겁니다. 물론. 기본 공개이니 게임 플레이를 보여주거나 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이 게임이 어떤 콘셉트인가에 대한 부분은 애니메이션으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담당자들이 슬슬 고개를 끄덕였다.
다 넘어왔다는 제스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가볍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만 앞서는 게 아니라 체계적인 단계와 촘촘한 그물망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바벨을 이끌어줄 아이템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투자자의 관점에서 이보다 좋은 조건을 다른 곳에서 찾아내기란 기적과도 같을 것이다. 비로소 저들의 표정이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이거, 저희가 별것도 아닌 일로 괜히 오해하고 여기까지 무례하게 찾아와서 회장님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처음 사과보다 훨씬 정중해진 태도다. 그리고 지금의 일로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 역시 덤덤하게 받아주었다.
적을 응징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힘이 있다고 해서 적의 숫자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저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핵심 주동자를 쳐낼 뿐, 모두를 적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괜찮습니다. 거금을 투자한 투자사에서 리스크에 대한 걱정을 안 할 수 없었을 테지요. 다만, 다음부터는 오실 때 미리 연락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이야 제가 이곳에 있었으니 다행이지만··· 아시다시피 제 사업체가 좀 많지 않습니까?]
[네, 잘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재차 사과하며 어찌어찌 좋은 분위기를 가장하며 저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다 같이 사무실을 나가려고 할 즈음, 나는 슬그머니 섞여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루카스 다스포네 부사장님. 어디 가십니까?]
[네? 아··· 그게··· 그래도 저와 함께 오셨는데, 제가 마중을 해드려야···]
[귀한 분들을 마중하는데 부사장을 보낼 수는 없지요. 그건 우리 최종인 대표님이 하실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앉으세요.]
[그···]
[당장 않으십시오.]
지금 상황이 루카스 다스포네의 뒷공작이라는 건 동네 꼬맹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굳이 함께 오지 않아도 됐을 장소에 함께 왔다는 건 자신의 작전이 100% 먹힐 거라는 확신을 가졌던 모양인데, 저게 얼마나 경솔한 짓인지는 지금의 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전략가로의 재능조차도 없는 놈 같으니.’
꿀꺽.
긴장한 루카스 다스포네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린다. 긴장감에 크게 삼킨 것도 있지만 모두 나가고 단둘만 있게 된 사무실은 그만큼 적막했다.
묵묵히 보고 있다가 내가 천천히 말했다.
[저는 이 회사의 임원진들이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회사를 이끌어오고 바벨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라 믿었습니다. 하여, 참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곤란한 거 같군요.]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 그··· 나중에라도 메릴리치에서 이거로 물고 늘어지면 곤란함이 생길 것 같아서 미리 움직인다는 게···]
[아니지요. 이거, 왜 이러실까? 그런 의도가 아닌 것쯤은 내가 알고 당신도 알고 함께 왔던 투자사 담당자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한 차례 크게 웃어넘겼다. 눈은 여전히 내려다보면서 입으로만 공허하게였다.
[일주일을 드리지요. 자리 비우고 알아서 나가세요. 재차 말하건대 딱 일주일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회··· 회장님!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제게 주시면···]
[더 말할 필요 없습니다. 저는 말이지요. 사업에 실패해서 수천만 달러의 손해를 가져와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생각했던 대로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서 엄청난 손실을 제게 입혀도 개의치 않는 녀석입니다. 나랑 의견이 맞지 않아서 내 의견에 반대해도 좋습니다.]
하나, 둘, 셋, 넷···
펼친 손의 손가락을 접으며 말을 이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내 뒤통수를 치는 사람과는 일 못 합니다. 이건 당신이라도 마찬가지일 거 아닙니까?]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나서 당장 무릎이라고 꿇을 자세로 다스포네 부사장이 내 앞에 섰다. 어디서 무슨 영화를 봤는지 무릎 꿇고 절을 하면 통할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용서를 받아주고 기회를 자꾸만 주는 일은 가족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에 불과하다.
[나가세요.]
[회장님! 부디 제게 기회를···]
안 되겠다. 고운 말로는 괜히 대치 상태만 길어질 따름이다.
[이 새끼가.]
[회··· 회장님?]
[좋게 말하니까 말이 말 같지가 않냐?]
지금까지의 포멀한 말투를 버리고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자 딸꾹질까지 하는 다스포네 부사장. 나는 그에게 지금까지 사용할 일이 없어서 내세운 적 없던 육체 능력을 잠시 맛보여주었다. 어설프게 엎드린 그를 옷만 잡아서 장난감처럼 번쩍 들었다가 확 내려놓았다.
엉거주춤하다 벌러덩 넘어진 그의 낯은 창백하리만큼 하얗게 질려있었다.
[당장 내 회사에서 꺼져라.]
성큼 다가가자 겁에 질린 다스포네는 더 대꾸하지 못하고 재빨리 사장실에서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이윽고 2분여가 흘렀을 즈음, 최종인 대표가 만면에 미소를 가득 지은 얼굴로 돌아왔다.
“다스포네 부사장의 상태가 이상하던데, 정말 호되게 야단치신 모양입니다.”
“야단이라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네? 그런데 표정은···”
“그냥 해고했죠.”
“···나라 잃은 백성의 얼굴인 게 당연하군요.”
직장인의 비애를 크게 실감하며 그가 쓰게 웃었다.
“잘하셨습니다. 저런 놈은 회사에 있어봤자 도움도 안 됩니다. 그나저나 아까 말씀하신 게임은 진짜 하시는 겁니까? 사실 금시초문이었던 터라 긴가민가하고 헷갈리고 있거든요.”
“미리 언급하지 않았을 수밖에요. 조금 전에 막 떠올린 거거든요.”
“그냥 임기응변이셨군요?”
“아닌데요?”
“네?”
“진짜로 만들 겁니다.”
“저기, 회장님. 아까 대화하다가 매우 급하게 떠올린 게임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걸 진짜로 만드신다고요?”
황당해하는 그에게 크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다 그렇게 시작해서 짜임새 있게 맞추다 보면 그게 대작이 되는 겁니다.”
“아니··· 그건 그렇지만···”
“문제 될 거 있습니까? 재미만 있으면 되는 거죠. 그리고 기왕 재미있는 게임 만드는 김에 우리가 판권도 대량으로 가지고 있다는 걸 자랑 좀 합시다.”
그렇게 GF의 모든 개발자와 아티스트들에게 지옥 같은 일정을 만들어 줄 게임의 기획이 시작되었다.
*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캐릭터를 활용할 때의 장점!
이건 해당 캐릭터의 과거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작업 시간을 대폭 감소해 주는 부분이었다.
[이야~ 그럼 바벨이 아니었다면 원래 각 캐릭터마다 고유의 히스토리를 창작해서 다 넣어주는 거라는 뜻이네?]
[그렇지요.]
[와우~! 이건 놀랍네. 진짜야. 나 완전히 놀랐어. 그럼 그 레전드 뭐 하는 게임도 89개나 되는 캐릭터들이 전부 각자의 사연이 있다는 거잖아?]
[맞습니다만······.]
물어보는 대로 답변은 해주고 있다만, 이쯤에서 나는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여기까지 따라와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제가 상급자인데 너무 편하게 행동하는 거 아닙니까?]
[응? 에이.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고 그래? 그냥 편하게 하자고 편하게. 이건 진짜 내 주변 극소수 사람만 쓸 수 있는 호칭인데 앞으로는 나를 팝이라고 불러도 되게 허락해 줄게. 어때? 끝내주지?]
뉴욕에서의 급한 것들을 대충 처리한 후, 지금 내가 있는 곳은 LA의 펜트하우스였다. 그리고 이런 내 옆에서 정신 사납게 말을 걸고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다.
< 고급시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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