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꿔 간다 >
‘좋았어.’
반가워 귀신아.
이 영화는 특별히 대박을 낸 작품도 아니고 감독이 이 작품으로 대단한 성공을 이루지도 못했다. 그저 신인상 하나만 덜렁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내 평가는 세간의 말과는 조금 다르다.
첫 작품임을 고려하여 가산점.
저예산으로 촬영한 작품이 상업 영화계에서 나름대로 선방했던 작품이라서 가산점.
또 대진운이 상당히 나빴음에도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가산점을 주겠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재미있게 봤다는 거고.’
사실 그때는 서해를 보러 갔던 건데, 영화표를 못 구해서 어쩔 수 없이 봤던 영화였다. 그런데 웬걸! 이게 의외로 너무 재미있어서 한참 즐겁게 웃다가 나왔던 기억이 난다. 즉, 이 작품도 몇 가지만 잘 손보면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일단 영화제가 시작할 테니 지금 여기는 이야기를 하기 좋지 못할 것 같군요. 내일 회사로 찾아와 줄 수 있겠습니까?”
“네! 몇 시쯤 찾아가면 될까요?”
“되도록 일찍 오실 수 있으면 일찍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야기 끝에서 들은 그의 이름은 영화감독, 이형탁이었다.
이형탁 감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한편으로는 답답한 사람이었다.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와서 기다리신 겁니까?”
“얼마 안 됐습니다.”
‘김 실장 출근하고부터도 1시간 30분이 지났는데, 얼마 안 되긴 얼어 죽을.’
오전 7시 30분에 출근하는 김유천 실장이 출근해 보니까 이형탁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야 당연히 오전 9시까지 출근했다.
‘일찍 오라고 했다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오란 건 아니었는데.’
3월이지만 아직은 오전에는 여전히 쌀쌀한 편이다.
“보통 사회에서 이른 시간이라는 건 오전 아홉 시에서 열한 시 사이를 말하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그거로 죄송까지 하시고 그러십니까?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죠. 앉으세요.”
순진하기까지 한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도사 전우치와 전당포의 감독을 만날 때와는 다른 기분 좋은 느낌도 들었다. 아마도 온전히 새로운 사람을 발굴할 때의 쾌감과 같은 것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제가 감독님을 뵙자고 한 것은 반가워 귀신아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저기···”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디에서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이 말씀을 조금이라도 빨리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사실 어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해주신 제안이지만, 이 영화는 계약할 수 없어요.”
“네?”
“저를 좋게 봐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이미 시나리오 계약을 하고 작업을 했던 거거든요. 그리고 저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각본가고요.”
‘그러니까 원래부터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해오다가 감독으로 데뷔한 경우구나.’
반가워 귀신아가 데뷔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만 있어서 이전 작품 같은 건 아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계약하고 만들었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그게··· 원래 저희 같은 작가들은 먼저 시나리오를 쓰고 그걸 사 줄 감독님이나 제작사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번엔 감사하게도 제게 먼저 의뢰를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그냥 그 사람에게 주겠다는 겁니까?”
“네.”
나는 본인도 아쉬워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이형탁을 보며 생각했다.
‘이상해. 원래 내가 알고 있는 이 영화의 감독은 이 사람이 맞는데.’
그러니까 이형탁이 직접 쓴 시나리오로 영화까지 만들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왜 지금 시점에서 그는 자신을 시나리오 작가라고만 말하는 걸까?
‘아무렴 어때. 굳이 그런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해결하면 그만이지.’
돈은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
그러나 돈은 많은 일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시나리오를 팔면 얼마 받으십니까?”
“저 같은 작가는 보통 3,000만 원 정도 받습니다.”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
한국 특유의 헬적화를 통해서 대충 1,000만 원 정도를 받을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금액이다.
“시나리오에 3,000이고 연출에 7,000. 도합 1억 어떠십니까?”
“네?”
“저와 계약하시면 그렇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미 계약이···”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무슨 악덕 상인이 된 기분이다. 왜 보통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들 보면 이런 장면들이 있지 않나? 주로 이런 멘트를 치는 사람들은 악역이고 말이다.
“저기, 정말 외람된 말인데요. 굳이 이 시나리오를 왜 그렇게 사려고 하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
“오해가 있군요. 저는 시나리오를 살 생각이 없습니다. 작가님이 직접 그 시나리오로 영화를 제작하도록 만들 생각인 거죠.”
영화판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움직임이다. 아마도 이미 자리를 잡을 대로 잡고 나이가 들 만큼 들어서 지금까지의 시스템에 인이 박힌 감독을 데리고 작업을 해봤자. 그냥 그때 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신인 감독들을 데리고 작업한다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더 만들 수 있지.’
처음부터 이렇게 일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10년쯤 후,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다.
꿈속 세계와 내가 사는 현재는 확실하게 달라졌다.
뉴 온라인도 원래는 이맘때 완전 무료화 선언을 하고 이상한 캐시 아이템만 팔아대는 오토 게임으로 변하는 것이 원래의 역사였다. 하지만 GF와 함께하며 지금은 멀쩡히 게임이 유지되는 중이었다.
‘심지어 아직도 동접자가 1만 명이 넘어. 내가 듣고도 믿기질 않는다니까.’
그뿐이랴. 게임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해대던 언론사들도 지금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게임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셧다운 제도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도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
영화도 이렇게 조금씩 바꿔나가면 시간이 지난 후에는 많은 부분에서 변하게 될 수 있다. 이런 포부로 움직이는 내게 이형탁 감독의 우물쭈물함은 번거롭기만 할 뿐이다.
그냥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면 된다. 그러면 너 좋고 나 좋은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저 말고도 좋은 시나리오는 충무로에 있···”
“이미 마음에 드는 두 작품은 계약했습니다. 반가워 귀신아는 세 번째죠.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마음에요? 제 작품을 보셨나요?”
“네.”
“어? 어떻게요? 이건 공개된 시나리오가 아닌데. 제작사도 아직 못 봤는데.”
맙소사.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만 실수하고 말았다.
공개도 안 한 시나리오를 봤다는 소리를 하고 말다니.
‘너야말로 공개도 안 해놓고 봤냐는 질문은 왜 한 건데?’
대충 얼버무리기로 한다. 이럴 때 써먹으라고 오성 전자가 그토록 위대한 선례들을 남겼지 않던가.
“대기업이 가진 정보력입니다. 저희 정도 되면 원하는 건 대부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아! 역시 그렇군요!”
이 얼토당토않은 말이 먹히는 건 오성 전자의 그림자 덕분이리라.
한편, 이형탁은 참 영혼이 맑은 사람이었다.
“제 시나리오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는 칭찬을 얼른 듣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이며 내게 물었다.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요?”
“코미디 영화에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긴 합니다.”
“또 다른 이유라고 하시면?”
“신인 감독이니 영화판의 관행들. 이 중에서도 악습 같은 것들에서 자유로울 것이라는 기대감입니다. 제대로 된 환경에서 영화 촬영을 시작하면 앞으로도 계속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 있어서라고 할까요?”
“아! 너무 멋지시지만, 그래서 제가 해낼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네요.”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요. 게다가 지금 시점에서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작가님이 감독님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영화를 제작하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이지요. 사실, 어떤 투자자가 저처럼 기행을 벌이겠습니까? 그것도 이 한국에서 말입니다.”
드라마는 작가의 권한이 막강하지만 영화판은 전혀 다르다.
영화 제작에 들어가게 되면 감독과 제작사의 입김이 아주 강력해진다. 고심하고 고심해서 만든 장면이나 대사들이 감독의 말 한 마디에 수정되고 잘려 나가는 곳이 영화판이다.
이런 곳에 시나리오 작가가 자기 자식을 내보내고 그것들이 변질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매우 흔하다.
‘말하다 보니 홈쇼핑 광고처럼 지금 결정하라는 식이 됐지만, 이게 사실인 건 네가 잘 알 테지.’
이형탁은 크게 흔들린 모습이었다. 그동안 감독들이 수정하고 바꿔온 것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고 또 그중에 수정된 수많은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저와 계약을 하시고 저와 손을 잡으시면 그 영화는 순수 제작비로만 80억을 투자받을 겁니다.”
꿈속 미래의 반가워 귀신아는 아마 30억 정도의 제작비로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랬기에 너무 허접해서 못 봐주겠다 싶은 장면들이 은근히 많은 영화였다.
‘반대로 말하면 그런 악조건에서도 흥행했다는 뜻이고.’
잘 빠진 시나리오 덕분이다.
“의리 때문이라면, 당신에게 시나리오를 맡긴 곳에 괜찮은 다른 시나리오를 넘기고 사죄의 뜻으로 3억을 보내겠습니다. 분명히 작은 회사에서는 오히려 더 기뻐할 겁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아직 갈등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듣고 싶은 대답이 나왔다.
“좋습니다.”
계약서를 가지고 대기하고 있던 김유천 실장이 들어와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찾아오는 제안 중 보석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지만, 역시 밑바닥부터 발굴해내는 짜릿함도 색다르다니까.’
이쯤 되니까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변했다.
일상에 지치고 오직 게임 하나만을 취미로 가진 채 지내던 꿈속의 윤태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이 더욱더 많아졌고 정력적으로 움직이기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157. 바꿔 간다
영화나 드라마 제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캐스팅이다. 캐스팅되어야 투자가 붙고, 투자가 붙어야 본격적으로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영화를 제작할 모든 자금을 투자받은 상황이라면 무엇이 가장 어려운 것일까?
그래도 캐스팅이다.
영화에 있어서 배우의 선택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다.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배우는 나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캐스팅을 원하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진들은 캐스팅 보드를 A안과 B안 혹은 C안까지 만들어서 어떻게든 그들을 섭외하려 애를 쓴다.
현재 준비 중인 세 개의 영화 중 가장 빠르게 준비 과정에 들어가는 영화는 도사 전우치였다. 내가 계약한 세 작품 중 가장 빨리 계약한 사람답게 최종훈 감독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주인공 전우치에 어울리는 배우가 없다는 것이었다.
“전우치에 어울리는 배우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현재 활동 중인 배우들을 다 찾아보는데 마땅한 배우가 없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영화에 정지원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 어울리는 배우가 없어?’
상황을 보러 들렀다가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정지원이 하면 딱 어울리겠는데, 왜 그를 섭외하지 않습니까?”
“그 배우는 활동을 안 한 지 꽤 됐습니다. 근 2년간 어떤 시나리오를 받아도 수락한 일이 없어요. 배우 활동을 그만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정지원이 전우치 이후로 얼마나 활동을 잘했는데.’
혹시 잘못 기억하는 건지 재차 떠올리며 물었다.
“도사 전우치의 시나리오를 보냈는데도 연락이 없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지레짐작으로 시도조차 않았던 모양이다.
“일단 보내보고 대답이 없으면 그때 이야기하세요. 그건 그렇고 모든 제작비 투자가 완료된 영화라는 게 얼마나 유리한 건데 이 상황에서 이렇게 힘들게 일하십니까? 무능한 건지 급한 게 없어져서 나태해진 건지 의심이 될 정도군요.”
어쩌면 투자비 걱정 없이 일하는 것이 처음이라 더 우왕좌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투자금을 끌어당기기 위해서 배우들을 찾아 나섰을 사람들에게 지금은 그런 다급함이 없어진 상태일 테니까 말이다.
감독은 내게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지원에게 시나리오를 보냈고 고작 이틀 만에 정지원은 계약서에 사인하겠다며 찾아왔다.
“정지원이 저희 영화를 선택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안을 거절하면 그게 오히려 멍청한 겁니다.”
배우들에게 영화의 선택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과연 이 영화가 제대로 투자를 받을 수 있는가’이고 두 번째가 ‘필모’다. 일단 영화가 촬영을 시작해야 필모를 걱정해도 걱정할 거 아닌가.
가끔 운이 없는 배우들은 찍기로 했던 영화가 번번이 엎어지면서 몇 년간 자취를 감추다가 결국 잊히는 사례마저 있다. 그만큼 영화판에서 투자가 붙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원래 투자가 안 붙어도 이건 붙을 거로 생각하고 계약할 영화에 이미 투자자까지 다 붙었다. 이걸 거절하면 그게 바보 아닌가?
정지원은 영화 내에서 어리숙해 보이는 면이 많은 배우지만 실제로 어리숙한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 이 영화 계약서에 사인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이거 자꾸자꾸 들러서 채근해야겠어. 돈이 넘치니까 상식적인 판단조차도 게으르게 안 해 버리는군.’
삐딱한 시선으로 감독을 보자 그가 느낀 게 있는지 부리나케 움직였다. 그렇게 투자금에 정지원까지 섭외하자 나머지 배우들의 캐스팅은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이윽고, 2009년 4월 4일.
도사 전우치의 촬영을 시작했다.
< 바꿔 간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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