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속작 >
낙원이 멸망하면서 새로운 대륙을 찾아 떠난 이들.
그들은 초승달 모양의 대륙을 발견하였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초승달 중심의 사막 때문에 이들은 점점 다른 문명이 되어갔고 세월이 지나 서로의 땅을 탐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판타지는 특색 있는 게 드물어.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거든. 다만, 이걸 어떻게 세부적으로 풀어나가느냐가 관건이야.’
본토행티켓이 만들어 둔 세세한 이야기를 다 풀면 말이 끝도 없다. 그래서 이렇게 압축하였지만, 세세히 따지면 이들이 전쟁을 한 계기와 서로 간의 개연성까지 완벽하게 고려해서 만들어 낸 완성도 있는 스토리였다.
그렇게 가이드라인을 말하고 있자니 길남주 대표가 내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세 개의 진영이 전쟁을 하게 되는 겁니까?”
“세 개라니요?”
“초승달 아래편에 위치한 진영, 위편에 위치한 진영. 마지막으로 중심 사막에 위치한 진영으로 세 개의 진영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중심에 위치한 사막지대는 중립구역이기에 양측이 모두 이용할 수 있지요. 전쟁이 금지된 지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다행입니다.”
원래 처음에는 특이하게 세 개의 진영으로 구성을 해볼까도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포기한 계기가 바로 밸런스의 문제다.
‘두 개의 진영도 늘 밸런스 문제가 터지곤 했었는데 세 개라니. 이건 무리야. 회사 차원에서는 정말로 피똥 쌀 거라고.’
길남주 대표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런 질문을 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개의 진영은 육로를 통한 전쟁이 불가능합니다.”
“중립구역을 걸어서 지나간 후에 전쟁하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 게임의 핵심은 단순히 레이드하고 장비를 획득해서 성장한 캐릭터들이 전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전혀 없었던 새로운 콘텐츠를 알려줄 차례였다.
“이 게임은 현실적인 전쟁을 중요시합니다. 유저들의 개인 장비도 중요하지만, 공용화기라고 부를 수 있는 화포와 함대. 그것들을 통한 새로운 전략이 만들어지도록 할 겁니다.”
“네?”
“성문을 부수기 위해서는 화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화포는 사막을 건널 수 없죠. 그렇다면 화포는 어디에 실려야 하겠습니까?”
“배··· 겠군요.”
“맞습니다. 배에 실어서 이동해야 하지요. 그러니 육로를 통한 전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화포는 어떻게 획득하는 게 좋을까요?”
“제작해야지요.”
“예?”
포인트를 주면서 말했다.
“유저들은 전부 원하는 게임 스타일이 다릅니다. 누군가는 PvP를 원하고 또 누군가는 레이드만 하기를 원하지요. 드물지만 모험가를 자처하며 게임 내의 숨겨진 곳들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004년.
전 세계는 MMORPG 랜드 오브 워드래프트로 엄청난 대격변이 일어난다.
나는 이번에 넷젠에서 그 게임에 대항할 대작을 만들어내기를 기원하고 있다.
“극한의 자유도.”
그렇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PvP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굳이 레이드로 장비를 맞추게 만드는 비효율적인 플레이를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레이드만 플레이하고 싶은 유저에게 가슴 아픈 피살의 추억을 가지게 해줄 이유도 없어요. 우리는 게이머들이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게 만들어 줍시다.”
“자유도······.”
“극한의 자유도.”
수긍하며 되뇐 저들이 하나씩 질문했다.
“회장님 말씀대로면 전쟁을 위한 대장장이 직업이 필수가 되겠군요.”
“대장장이만 필수일 리가요. 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나무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나무를 키울 농사꾼도 필요하겠죠?”
“아! 농사부터 가는 거군요.”
“화포를 제작하기 위한 금속은 사막의 특산품으로만 구매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특산품을 옮길 때는 이동속도가 느려지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탈것이 필요합니다.”
“그 탈것들은 사육사들이 키워내는 걸까요?”
“바로 그렇습니다.”
전투를 위해서 비전투 인원들과의 화합해야 하는 게임.
이는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나오는 다양한 게임의 매력적인 소스를 모조리 빼 와서 만들어낸 잡탕이었다. 하지만 원래 짬짜면처럼 굳이 잘 섞지 않아도 매력이 될 수 있다. 배열만 잘 해놓아도 매력적인 요소들이 만나면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법이니 말이다.
‘나부터 기대되네.’
자본과 아이디어를 거머쥐었을 때의 최대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상상이 망상으로만 끝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나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자본이라는 힘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기획안은 받으셨죠?”
“네. 받았습니다.”
모범생처럼 눈빛을 빛내는 저들에게 말을 이었다.
“기획안에는 여러 가지 직업군과 보조 직업군. 마지막으로 스토리의 진행방법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제가 구상한 이상적인 게임입니다. 현실과는 다를 수 있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이것을 가지고 해낼 수 있는 수준의 게임으로 맞춰서 제게 다시 가져오는 겁니다.”
이상과 현실의 적절한 밸런스는 필수다. 이게 없다면 제아무리 많은 자본을 투여하더라도 무의미하게 날아가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저들이 어렵다고 울상을 지어도 어지간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작정이다.
“단! 해낼 수 없다면 어떤 문제 때문에 해낼 수 없는지를 함께 가져오셔야 할 겁니다.”
우리는 이미 극한의 자유도를 즐길 수 있는 게임에 걸맞은 엔진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이 소프트웨어를 잘 활용할 국내 최고의 개발자들을 보유했다.
그뿐인가? 이제 그래픽 아티스트들도 보충했기에 그 어떤 회사보다도 빠르게 작업을 완수할 만반의 태세를 마쳤다. 즉, 제반 준비가 완벽하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잠시 후 길남주 대표가 내게 물었다.
“회장님. 솔직히 정말 대단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기능을 가진 게임이 오히려 실패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이 게임이 정말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십니까?”
그의 물음은 구상단계에서 내가 수없이 자문한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성공이 확실한 사업에 치중했다. 잘 만들다가 살짝 어긋나서 좌초해버린 작품을 복구하며 그 열매를 두둑하게 채우는 식이었다. 반면에 지금의 기획은 미래의 지식을 기반으로 했을 뿐이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하는 도전이자 본토행티켓을 통해 만든 오리지널 스토리다. 그렇기에 이제까지와 다르게 100% 성공하리라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실패해도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어. 그만한 체력도, 여력도, 아직 남은 꿈속 미래의 지식도 충분해.’
리더가 불안해하면 전체가 흔들린다. 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보였고 저들에게 믿음을 심어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확신합니다. 이대로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길남주 대표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기획을 100% 그대로 가능하게 만들어내겠습니다.”
이번 신작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듯 굳은 얼굴로 내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넷젠의 간부들을 다그쳤다.
“다들 뭐합니까? 바로 가서 어떻게 작업을 시작할지 검토하고, 일정 잡으려면 시간 없을 텐데요?”
“아··· 예!”
“회장님. 그럼 다음에는 저희가 보고를 드릴 수 있도록 만들어 오겠습니다.”
결의를 다지는 그에게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굳은 결단을 내린 남자가 어떤 추진력을 보일 수 있는지 나는 길남주 대표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제, 작업이 얼마나 진행이 되었는지 확인하러 갔을 때, 나는 초주검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임에도 눈빛만은 형형한 그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며칠째 집에 가지도 않아서 기름기가 가득한 머리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집중력은 배가 되는지 진행도는 놀라우리만큼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군요. 건강만 잘 챙기시면 될 정도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마이코닉스 쪽에서 디자인 작업을 너무 잘해줘서 디자인 부분에서 특별히 걱정할 게 없다는 점이 좋습니다. 그 덕분에 훨씬 빠르게 진척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이 게임디자인을 뽑아내는 부분에서만큼은 정말 탁월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 선두주자로 보아도 좋은 마이코닉스는 빈틈없는 성과로 자신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과시하는 중이었다.
‘좋다. 내 기대치를 웃돌 정도로 좋아.’
지금까지 한국의 게임들이 도전하지 못했던 거대한 맵과 다양한 오브젝트.
기획자들이 단순히 구상으로만 끝내는 것을 현실화한다는 건 개발자들의 입장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법도 했다. 그러나 길남주 대표를 비롯한 넷젠의 인사들은 불만보다 자부심을 느끼고 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온라인 게임으로는 넷젠이 게이머스 포럼 내부에서 최고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나?’
자체 내에서 경쟁의식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열기로 가득한 눈빛을 보며 괜스레 오한이 든 나는 넷젠의 작업을 둘러본 뒤 재빨리 빠져나왔다. 이번에 들어간 곳은 몬스터 프레데터스의 작업실이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몬스터 프레데터스의 테스터들이다. 일찍이 E3에 함께 가며 코스튬을 입고 솜씨를 뽐냈던 연습생들. 그들은 행사를 마치고 자신들의 재능이 스타 드래프트 프로게이머보다 이쪽에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전문 테스터로 보직 이동의 뜻을 비쳤다.
‘어차피 우리도 딱 필요했던 마당이니 바로 오케이 했지.’
이들의 역할은 게임 개발 중에는 테스터, 출시 후에는 게임의 선구자와 같은 역할이었다. 일종의 게임 BJ와 비슷한 셈이다.
‘반면에 저 자리는 생지옥인데?’
살인적인 업무량으로 채워져 있는 책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인데 그 사이로 푸석푸석한 얼굴이 보였다. 성주환 팀장이다.
‘열정적인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표정이 굳은 것을 보면 즐기면서 일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 점이 이상했다. 성주환 팀장에게 누가 감히 텃세를 부리겠는가. 그럴만한 짬밥을 가진 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았다.
‘아무래도 대화를 해볼 필요가 있겠어.’
조용히 김강철 팀장에게 가서 말했다.
“성주환 팀장에게 제 사무실로 오라고 하세요.”
“지금 바로 말씀입니까?”
그렇다며 흘끗 그를 보았다.
“꽤 바빠 보이는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쟤 괴롭히는 게 너냐?’라는 식으로 은근히 떠보는 말이었다. 그런데 김강철 팀장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을 겁니다. 지금 바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사무실에 두 개의 커피를 세팅할 즈음, 성주환 팀장이 들어왔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여기 앉으시죠.”
조심스럽게 그가 자리에 앉았다. 나는 성주환 팀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단순한 피로감 이상의 근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팀장님. 제가 조금 전에 다녀갔다는 거 알고 계시죠?”
“네. 들었습니다.”
괴롭힘 당하거나 정치싸움이라도 있다면 결코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는 추측을 그만두고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팀장님이 일하는 모습을 봤는데 꽤 이상해 보였습니다.”
“어떤 게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들에 비교해서 업무량이 과하게 배정된 게 아닌가 싶더군요.”
“아··· 그건······.”
성주환 팀장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조심스럽게 하는 것일까.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누가 뭐래도 팀장님은 제 손으로 직접 스카우트한 분이 아닙니까?”
그 말에 비로소 성주환 팀장이 말문을 열었다.
“회장님은 제 연봉이 얼마인지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결제는 제가 하지만 일일이 기억하기에는 무리가 있네요.”
“5,500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끊었던 그가 금액을 다시금 말했다.
“5,500만 원··· 그래요. 5,500만 원입니다. 이전 회사에서 받던 연봉과 비교하면 거의 곱절의 연봉을 받고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막상 하는 일은 오히려 더 낮은 직책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슨 말일까.
“이전에도 팀장이었고, 지금도 팀장이신데요?”
“실제 직책이 아니라 제가 담당하는 업무를 말씀드린 겁니다.”
잘 모르겠다.
더 말하라며 지켜보았다.
“신입은 물론이고 중견 개발자들이 경력직으로 계속해서 치고 올라오는 중입니다. 과거의 게임사와 달리 요즘 게임은 정적이지 않죠. 조금만 뒤처지면? 바로 도태되는 게 현실입니다.”
담담한 그의 고백은 사실 게임사만의 일이 아니었다. 사회 각 층의 모든 분야에서 공통으로 일어나는 일이고 나름의 질서로 보는 편이 옳다.
성주환 팀장이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스스로 도태되고 있다고 느끼는 거군. 그리고···’
직책보다 낮은 업무.
많은 연봉.
직접 떠안은 것으로 보이는 책상 위의 업무량.
이것들을 종합한다면 답은 딱 하나로 귀결된다.
“지금 연봉 값을 못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후속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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