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필요한 변화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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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시간이라······. 하긴, 그간 참 바쁘게 지내긴 했지.”
회의를 마치고 나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며 의자에 앉았다. 한껏 시원하면서도 섭섭하고 한편으로는 기대되는 마음이다. 이유는 이번의 데들리 스페이스와 데스 아너드를 거치며 내가 확신하는 미래의 정보들이 완벽하게 틀어지는 중이라는 사실을 실감해서였다.
사람들이 추켜세우는 내 성공들은 꿈속 미래를 통해 입증된 것들을 선점해온 것이다. 비록 단점을 고치고 장점을 북돋아 주는 노력을 기울이기는 했으나 편승하면서 작금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정말로 달라졌다.
‘존재하지 않는 시리즈물이 계속 나올 거야. 게임의 스토리도 확실하게 바뀌겠지. 드라마, 게임, 영화 등등이고 이런 것들은 내가 사업을 하면 할수록 점점 늘어나게 돼.’
게이머로서, 관객으로서, 시청자로서 너무나도 기대된다. 진짜로 모르는 새 작품이 나올 때의 흥분과 기대감이!
그러나 불안감도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확신할 수 없는 성공은 내게 너무나도 낯설기 때문이다. 레이첼이라는 작가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정말로 데들리 스페이스가 성공할 수 있을까? 자칫 평론가들은 인정할지라도 대중이 외면하는 소수의 걸작이 되지는 않을까?
‘단 한 번도 없었던 실패를 하게 된다면, 지금처럼 GF 그룹을 내가 운영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결단력도 줄어들겠지.’
재벌이 되었다.
거물이 되었다.
그러자 일반 시민이던 과거의 내가 쌓아 올린 상식과 흐름이 뒤바뀔 조짐을 보인다. 지금 내가 느끼는 후련함과 불안, 흥분과 기대의 감정은 바로 여기서 비롯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실패의 두려움은 거의 없었다.
‘과거의 내가 아니야. 오직 미래의 기억만이 전부인 수준은 넘어선 지 오래라고.’
자신감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칭찬해주고 싶어졌다.
참 열심히 살았다고.
게이머 윤태식의 바람들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이루며 지내왔다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인간 윤태식이 하고 싶었던 일들이 아직 남았었구나.’
살면서 누구라도 한 번쯤은 느껴봤을 불만들.
꼭 성공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삶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일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재벌이라는 작금의 위치에 올랐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회장님 표정이 새로운 장난감을 찾는 어린아이들 같습니다.”
오래도록 함께 지내온 만큼, 내 표정만 보고도 눈치를 챈 모양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사무실의 벽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벽에는 그간 투자했던 영화의 포스터와 출연한 배우들의 사진들이 있다. 저기부터 손을 대면 될 것 같다.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하나 만들어 볼까요?”
“무엇을 말입니까?”
“영화 제작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싼 장난감을 떠올리셨군요. 오래간만에 충무로의 감독들이 행복해할 테고요.”
“행복해하다니요?”
“회장님이 투자하시면 그 작품은 무조건 대박이 나지 않습니까. 손익분기점은 넘을지 전전긍긍할 일이 없으니 감독들이나 투자자들 모두 회장님과 함께하면 자신감이 넘치게 됩니다.”
“글쎄요. 이번에는 살짝 그 맛이 다를 겁니다.”
“돈 잔치 대신 다른 맛이 있습니까?”
나는 조금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한국 영화계 꼬락서니가 마음에 안 들어서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까 하니까요.”
맞다. 급전에 연연하는 윤태식이 아니라 한국에 사는 시민으로서의 윤태식이 하고 싶었던 일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꼬락서니······요?”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대부분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자랑한다. 사실 이건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들 한국의 영화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제작비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 정도야 다들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라이언 맨 만 하더라도 제작비에 1,000억이 넘는 돈이 들어갔다.
“할리우드에서는 100억 200억 정도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가 저예산 영화로 분류된다는 건 잘 알고 있으실 겁니다.”
“물론입니다, 회장님. 제가 미국 유학부터 GF에서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100억, 200억은 한국이라면 블록버스터급의 제작비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저예산 수준이죠.”
“그렇다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걸까요? 배우들의 개런티가 비싸서?”
“아닙니다. 영화 제작에 돈 들어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배우 개런티로 그런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이보다는 제작 환경과 비중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라이언 맨 만 해도 제작비가 1억 7천만 달러이고 주요 배역의 출연료는 1,100만 달러였습니다. 반면에 한국 영화는 140억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가 주요 배역들의 출연료로 16억을 지불했지요. 미국은 출연료가 10%를 넘기지 않지만, 국내 영화는 이를 초과합니다.”
미국의 배우 출연료는 비싸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런데 돈의 크기를 배제하고 비율로만 보면 미국보다 한국 배우의 출연료가 더욱더 높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이런 비중의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김유천 비서실장의 말대로 기본적인 제작의 환경이 가진 차이 때문이다.
“혹시,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다른 맛이라는 건, 이런 시스템을 손보시겠다는 겁니까?”
“관습이고 관례라서 당연시 여겨온 불합리들이 많지요. 누군가는 손을 대야 하는데, 정작 손댈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되어서 외면하기에 십상인 부분들입니다.”
거창하게 포장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할 수 있으나 실상은 이렇다. 술자리에서만 정치판을 논하고 의롭게 행동하는 일반인이 재벌씩이나 되었으니 내가 손댈 수 있는 영역에서 작은 실천을 해보겠다는 것.
이른바 감정 해소다.
‘적어도 스포츠카 백 대를 사서 개인 주차장을 만들거나 톱 모델 20명이랑 배 타고 낚시하는 돈 지랄보다는 훨씬 낫지.’
세계 평화를 위한 희생 같은 게 아니다. 그냥 내 덩치가 커졌고 영향력도 늘어났으니 딱 그만큼 움직여보겠다는 의미였다.
“스태프들이 고생이란 생고생은 다 해놓고는 쓰레기 같은 결과가 넘치는 영화판. 그래놓고 돈은 감독이랑 배우들만 벌어가는 이것을 고쳐봐야겠습니다. 제법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술자리에서 몇천 씩 쓰는 것보다는?”
“재미뿐이겠습니까. 천배, 만 배 의미 있는 일이시죠. 하지만 그러시려면 단순 투자로는 불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영화제작 전체를 모두 직접 다루셔야 가능하다 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요.”
“그 정도는 지금의 제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군요.”
김유천 비서실장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이시니까요.”
영화제작?
하면 그만이다.
‘우선 스토리.’
영화든 게임이든 드라마든 무언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한 법!
한국과 달리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지는 스토리는 미국의 작가협회에 가입된 작가가 직접 쓴 스토리다. 그리고 미국은 법적으로 이들의 이야기에 가치를 두고 철저하게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최소 7,000만 원 이하의 가격으로 영화 스토리를 구매하면 불법이지.’
7,000만 원이라는 돈은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비에 비하면 소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스토리일 뿐이고 작가들의 최저임금 개념으로 보면 한국인들에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반적인 블록버스터급의 스토리는 50억 정도거든. 최소 7천부터 최대치가 수십억인 셈이니 참 어마어마하지.’
이제 영화 제작의 첫발을 뗐다.
스토리만 있다고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 가능하다면 RlP에 넷플렉스 작가들이 함께할 필요도 없을 터. 이를 대본으로 만들어야 하는 작업인 스크린플레이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최소 1억부터 20억이 들어가고.’
스토리와 대본은 같은 글의 영역이지만 다른 장르라고 봐도 된다. 그러니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며 이를 인정하고 마땅히 그 값을 치러줌이 옳다.
‘감독에 따라서 직접 하는 감독들도 있긴 하지만.’
다음!
이 영화를 총 책임질 프로듀서가 필요하다.
케인 파이기가 그러하고 알버트의 아내인 사라도 프로듀서다.
영화감독이 영상에 담기는 모든 것들을 책임지는 자리라면 프로듀서는 영화가 제작되는 과정에 들어가는 모든 것의 책임자다. 제작하는 영화의 엄마와 같은 존재로 보면 되는데 이에 합당하게끔 할리우드 영화 제작에서 프로듀서는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존재다.
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
일반적으로는 10억.
메이저 프로듀서들은 최대 300억까지 받는다.
즉, 대중은 전면에 드러난 주연만을 보지만 사실상 영화 제작에서 이들이 받는 돈이나 배우들이 받는 돈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우리나라는 수익 분배가 시궁창이지. 열정페이와 내로남불의 표상이고.’
한국 영화는 제작에 들어갈 돈과 배우들이 가져갈 출연료를 제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시장이 가진 크기와 비교해서 수익의 분배가 영 맞지 않고 심지어 그런 쥐꼬리만 한 돈을 받으면서도 훨씬 가혹한 환경에서 촬영해야 한다.
관례라서 그렇다. 그것이 당연하고 그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아서다. 아래를 갈아서 위쪽이 풍성해지는 이 모양새가 바로 한국 영화계의 현실이다.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런 성공으로 부족할 겁니다. 회장님께서 준비하신 엄청난 작품이 어떤 겁니까? 조금만 언질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런 걸작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그저 모두가 자신이 고생하는 만큼 그만한 대우를 받는 영화입니다.”
“네? 아니요. 그건 이해했고요. 어떤 기막힌 영화를 시나리오부터 기획하신 건지 회장님의 최측근으로서 조금만 먼저 알려주십사···”
김유천 비서실장이 나를 백마 탄 초인처럼 보는 모양이다. 완벽하면서도 엄청난 뭔가가 있는 줄 안다. 그런데 환경 개선을 하는데 무슨 그런 비장의 무기가 필요하겠나?
투자하고 이득만 쏙쏙 챙기던 것만 줄이면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나를 대단하게 여기면서 생긴 오해다.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이런. 김 실장님. 저를 아직도 모릅니까?”
“네? 모른다니요?”
“바로 지금부터 김 실장님이 움직여야 할 때라는 것 말입니다.”
“아!”
“오오! 표정을 보니 말하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바로 지금 떠올린 그거! 그게 맞습니다.”
“아닐 겁니다. 설마 포부를 밝히신 이 시점에 저보고 제작할만한 영화 시나리오를 긁어 오라 지시하실 리가 없죠. 분명히 레이첼님이나 다른 작가분들의 훌륭하고 위대한 시나리오가 준비···”
“됐을 리가 없지요. 가뜩이나 바쁘신 분들 번거롭게 하지 마시고 훌륭한 시나리오도 외국산 대신 신토불이를 씁시다. 이거야말로 국뽕! 한국의 저력이죠! 자! 이제 될 성싶은 것들로 쭉쭉 가져오세요.”
“···그동안 게임을 하실 거죠?”
“빨리 오시면 가볍게 몇 판이고 늦으면 늦을수록 더 많이 하겠네요.”
“······.”
축 처진 어깨로 사무실을 나서는 김유천 실장.
“하여간 엄살쟁이라니까.”
어차피 GGT에 연락하면 관련 자료를 15분 안에 다 받아볼 수 있으니 어렵지도 않다.
시간 맞춰서 잠깐 놀아볼 겸, 간단하게 바벨을 했다. 그러자 시간을 가위로 잘라낸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30분이 지났고 김유천 비서실장이 자료들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회장님. 이 영화들이 요즘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시나리오들이라고 합니다.”
“오호. 어디 봅시다.”
여러 제목 사이에서 내가 잘 아는 이름들이 보였다.
‘내 사랑 내 옆에, 흡혈박쥐, 도사 전우치, 방자뎐, 경포대, 전당포······.’
고를 것을 고르고 걸러낼 것을 걸러냈다.
“평가를 들으니 이 중에서 특히 경포대라는 영화가 그렇게 기대작이라고 합니다. CK그룹 작정하고 노리고 있다고도 하니 이를 가로채면 저들의 자존심도 제법 상할 겁니다.”
보지도 않고 평가하면 점쟁이처럼 보일 뿐이다. 나는 빠르게 읽는 척 시나리오를 넘기면서 대답했다.
“그거 재밌겠군요. 그런데 이건 그냥 줘버리세요.”
“네? 회장님의 판단으로는 실패할 영화인 건가요?”
“성공합니다.”
천만 명이 볼 영화니까.
“그럼 더더욱 이걸 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돈만 벌어서 뭐 합니까?”
“돈만이라고 하시면, 평단의 평가가 좋지 않다는 말씀이시군요.”
“한 맺힘과 충효 사상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가족적인 부분과 눈물 짜내는 신파를 섞으면 무조건이라도 해도 될 만큼 돈을 법니다. 빌어먹을 상업 영화의 성공 공식이지요.”
경포대는 천만 영화에 들어간다. 하지만 한국에서 잘 먹히는 상업적 요소들을 사실성이나 개연성 상관없이 무조건 쑤셔 넣은 영화이기에 ‘더럽게 못 만들고 무지막지하게 벌어들인 영화.’라고 평가받는 영화다.
‘이 성공 때문에 한국형 영화의 하향 평준화가 이뤄진다고 생각될 정도지. 골치 아프게 머리 썩일 필요 없이 똑같은 방식으로 찍어내면 성공을 바닥에 깔고 가니까.’
생각 같아서는 이런 영화를 없애고 싶다. 경포대의 시나리오를 사버려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걸 찍게 되는 감독이 문제니까. 자신만의 방식대로 꾸준하게 활동하면서 저렴한 영화를 양산할 것이다.
‘꼭 그만이 아니더라도 비슷비슷한 급의 감독들은 똑같은 모양새로 움직일 테지.’
제아무리 GF가 좋은 게임을 만들어도 여전히 랜덤 박스와 부분 유료화에 전념하고 있는 국내 대형 게임사들의 꼬락서니처럼 말이다.
“전당포, 도사 전우치. 이 두 영화로 합시다. 그럼 김 실장님, 움직이세요.”
김유천 비서실장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됐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나갔다. 자신이 일한다는 것보다는 내 모니터에 비치는 게임 화면을 아무래도 시샘하는 기색이었다.
< 꼭 필요한 변화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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