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 >
“무언가 확고하게 생각해두신 그림이 있으신 것으로 보이십니다.”
“있지요.”
나는 넉넉하게 웃으며 말했다.
“GSP처럼 TV에 연결할 수 있고 또한, 휴대용처럼 사용할 수 있는 기기. 그러나 GSP처럼 어설프게 TV에 연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
로 연결할 수 있는 그런 기기를 만들 생각입니다.”
“조금 전에 GSP도 TV에 연결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게 차이가 있습니까?”
“그냥 TV에 연결하고 플레이가 가능한 것과 TV에 연결하면 해상도와 그래픽이 변하는 것의 차이지요.”
그러자 삽시간에 양도준 사장과 홍의제 사장의 표정이 급변했다. ‘아! 그런 발상이!’라는 각성의 표정이 아니다. 말로만 들었을 뿐인데
공돌이들이 갈려나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우울한 얼굴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레이패드를 떠올려보세요.”
“예.”
“휴대용은 그 레이패드라고 생각하고 거치형으로 연결했을 때는 배터리가 아니라 거치형 전원 연결을 지원받아서 GPU 성능이 향상되
는 형태로 계산하면 됩니다.”
CPU와 같은 프로세서들의 성능은 전력의 강도와 정비례한다. 그 때문에 휴대용으로 사용할 때는 전력을 줄임과 동시에 성능을 약화하
고, 거치형일 때는 온전히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러면 두 가지 성능의 효과를 만들 수 있다.
“거치 콘솔에는 냉각기를 달아서 발열에 추가 효과를 줍시다. 이러면 더 좋아질 겁니다.”
내 말이 길어질수록 앞의 두 사람은 울상이 되어간다. 아이디어를 입으로 떠느는 건 나지만 실제로 만들어내야 하는 건 저들이기 때문
이다.
‘그래도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사회생활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자신이 없다는 표정 같군요.”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라면 연구 기간이 현실적으로···”
“원하는 만큼의 자금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연구를 위해 필요한 예산은 현재 레이컴 자체의 자금만으로도 충분히 해결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앓는 소리를 하며 보수적으로 나오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나올 때는 그 나름대로 또 다루는 법이 다 있다.
“못 하시겠다니 하는 수 없군요. 그럼 포기합시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원하게 포기하는 내 모습을 보자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 표정이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툭 던지듯 말했다.
“우리가 못하면 LZ에게 넘어갈 겁니다. LZ에서 관심을 아주 많이 보였거든요.”
“LZ가요?”
LZ라는 이름이 나오는 그 순간, 양도준 사장과 홍의제 사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홍의제 사장은 LZ반도체 시절에 입사해서 카이닉스에
인수된 후 지금의 자리까지 온 인물이고 양도준 사장은 오성 전자에 있던 시절부터 LZ와 경쟁을 펼치던 인물이다.
‘둘 다 죽어도 LZ에게 밀릴 수는 없다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지.’
자존심이라는 감정은 무모한 선택의 원동력으로 자주 작용한다.
“언제까지 완성하면 되겠습니까?”
기대했던 반응이 나왔다. LZ라는 이름이 나온 그 순간부터 이들에게 포기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말씀드렸듯이 우린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년 말에는 출시했으면 좋겠군요.”
지금부터 고작 1년 반 정도의 시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신규 콘솔을 개발하길 원하면서 고작 이 정도의 시간을 말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고 이야기할 수 있겠으나 나는 딱히 불가능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태블릿 PC를 상용화 했고 처음부터 게임을 개발하기 좋은 OS까지 만들어둔 상태다.
‘이미 필요한 걸 다 갖춘 상태에서 1년 6개월이니 저들도 직접 하다보면 느끼겠지. 내 요구가 절대 무리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레이 OS는 비록 레이폰이나 레이패드에는 사용하지 못한 OS다. 그러나 조금만 수정하면 게임기에 들어갈 OS로는 차고도 넘치게 활용
할 수 있었다. 1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한 건 오로지 휴대와 거치를 자유롭게 하면서 안정적인 게임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과정 때문이다.
“기기의 성능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거치형이면 거치형, 휴대용이면 휴대용이라는 한 가지 개념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기능을 함께 한다면 문제가 될 여지가
많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의 질문을 듣고 양도준 사장에게 되물었다.
“ZBox 360이나 게임스테이션3의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계십니까?”
“각 기기의 스펙이나 상세 내용 같은 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그래픽 연산속도만 말씀드리면 ZBox 360은
240기가플롭스, 게임스테이션3는 228기가플롭스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지난 6세대 기종은 얼마나 될까요?”
“ZBox 오리지널은 20기가플롭스였고··· 게임스테이션2는···”
“6.2기가플롭스였습니다.”
같은 세대 게임기치고는 그래픽 연산 능력의 차이가 생각보다 꽤 크다. 그러나 사장단은 그 차이보다 대체 왜 이런 것들을 내가 거론하
느냐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우리의 콘솔이 거치형일 때의 성능은 ZBox 오리지널의 3배, 즉, 60기가플롭스이고 휴대용일 때의 성능은 ZBox 오리지널의 1.5배 수
준인 30기가플롭스 정도이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애매한 성능을 요구했기 때문일까? 하드웨어 계열의 홍의제 사장과 양도준 사장은 물론이고, 게임사업부의 사장들도 미묘하게 일
그러진다.
적잖은 침묵의 시간이 지났다.
“회장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차마 나서서 말을 꺼내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티를 팍팍 내며 넷젠의 길남주 사장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60기가플롭스 수준의 기능을 원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 성능이면 타 콘솔의 게임을 가져다가 이식을 하기에도 힘들 정
도의 차이입니다.”
“제 생각과는 다르군요. 왜 힘들다고 보는 겁니까?”
240 대 60.
이건 간단하게 숫자로만 보아도 왜 힘든지 답이 나오는 숫자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왜 힘들다고 보느냐는 반문을 한다는 것에 길남
주 사장은 ‘알만한 사람이 왜 이러지?’라는 눈빛을 띠었다.
“우리는 6.5세대의 게임기를 개발할 겁니다.”
“6.5세대요?”
“ZBox 360이나 게임스테이션 3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쟁상대는 그 이전 세대인 ZBox 오리지널과 게임스테이션2입니다.”
장내의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서로를 보았다. 지금 들은 말이 잘못된 게 아닌지 서로 확인한 것이다.
“회장님. 이미 새로운 세대로 온전하게 넘어간 시점입니다. 이제 와서 그들과 경쟁하는 게임기는···”
“왜 새로운 세대로 온전하게 넘어갔다고 생각하시죠?”
“그야···”
2005년 말에 ZBox 360이 출시되었고, 2006년 말에는 게임스테이션3가 출시되었다. 그로부터 1년도 더 된 지금, ZBoxs 360은 미국에
서만 1,000만대 이상이 팔렸고 전 세계적으로는 3,000만대 이상의 판매량으로 7세대 콘솔에서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소미의 게임스테이션3 역시 작년 한 해 동안 500만대를 팔아치우면서 발 빠르게 ZBox를 추격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이니 7세대 게임기
가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무리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이래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거다.
“우리는 기존 시장이 아니라 신흥 시장을 개척합니다.”
신흥 시장.
이건 단순히 ‘새로운 시장’이라는 의미보다는 새로이 떠오르는 국가들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보통 BRICS라고 불리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에 남아공과 동남아 국가들을 뜻한다.
이들의 특징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매력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는 국가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는 관심받지 못한
만큼 선점에 성공만 한다면 후에 큰 시장을 선도할 기회의 장이 열린다.
물론, 대다수는 행복회로만 돌리다가 정작 실패하고 마는 사례에 들어가지만 말이다.
“회장님. 신흥 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이 국가들은 게임에 대한 관심이 적습니다.”
“게다가 시장도 없다시피 할 정도로 작은 국가들에 불과해요.”
지금 시점의 보편적인 생각들이 이렇다. 그래서 많은 기업이 이들 국가에 진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렇게 외면한
브라질 게임쇼의 한 해 참가 인원이 33만 명이나 되고, 중동의 게임 시장이 수조 원에 이르게 될 정도로 거대해진다는 것을.
“인도에 게임을 즐기는 인구가 몇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브라질은 얼마나 될 거 같고? 아프리카와 남미 그리고 동남아 전체로 보면 게
이머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도와 브라질.
이 두 국가의 게이머를 합치면 1억이 넘는 인구가 게임을 즐긴다.
“이 나라들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게임스테이션2 혹은 ZBox 오리지널이 현역이라는 겁니다.”
공략 포인트가 여기서 나온다.
게임기기 단종!
콘솔이 단종 되었다는 것은 이제 신규 게임이 점점 발매되지 않다가 종국에는 완전히 새로운 기기로 시장이 넘어갈 거라는 이야기다.
게임스테이션2는 올해로 완전히 단종되었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는 중고로 구매하더라도 게임스테이션2나 ZBox 오리지널을 구매한
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이들에게 신형 콘솔은 너무나도 비싸거든.’
그래서 게임 하고 싶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저렴한 구세대 콘솔을 구매한다. 이러한 사항들을 알려주자 그제야 사장단의 고개가 끄덕
여졌다.
“회장님이 무엇을 생각하고 말씀하시는지는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세대가 여전히 현역이라는 것은 그만큼 구매력이 떨어진다는 의
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저렴하게 만들어야지요.”
6세대와 7세대 게임기 성능의 차이는 6세대에서 가장 떨어지는 드림퀘스트가 1.4Gflops이고, 가장 뛰어난 ZBox가 20Gflops이다. 가장
뛰어난 Zbox로 계산해도 6세대와 7세대 1개의 세대지만 성능의 차이는 10배 이상이 나는 것이다.
그만큼 그 시간 동안 세상은 빠르게 발전했고 발전한 만큼 이전 세대 수준의 부품들은 가격이 저렴해졌다.
“우리의 콘솔 기기는 두 종류의 모델로 발매할 겁니다. 순수하게 거치형으로만 활용하는 저가형 모델과 휴대용 및 거치형까지의 두 종
류로 활용하는 프리미엄 모델입니다. 이러니 순수 거치형은 아주 저렴해야 합니다.”
휴대 기능이 더해지면 기본적으로 디스플레이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 디스플레이 가격을 포함하면 저렴한 가격에서 불리하게 될 테니
저렴하게 거치형으로만 가능한 버전을 따로 추가하는 것이 나았다.
“게임스테이션2와 ZBox에는 이미 수많은 게임이 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게임기를 견인할 새로운 게임도 당연히 있어야겠지만, 우
리는 일단 이 게임들을 확보하고 우리의 게임기로 이식하여 재출시하는 것부터 할 겁니다.”
기기가 많이 팔리면 개발사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구매력이 약한 국가입니다. 결과적으로 콘솔은 판매가 되지만 게임 판매는 부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기에 혁신을 더하자는 거 아닙니까.”
“네?”
“우리 게임기는 거치형이면서도 휴대용입니다.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 신흥시장에는 저렴한 거치형 게임기로 6세대 게임을 안정적으
로 구동할 수 있는 모델이 투입될 겁니다. 반면, 북미와 유럽 등의 국가에는 6세대 게임을 휴대용으로도 즐길 수 있는 신개념의 게임기로
시장을 공략할 겁니다.”
작금의 GF는 전 세계 게이머들 중에 모르는 이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게임회사가 되었다. 하지만 콘솔 분야
에서는 그야말로 신생아다.
이런 우리가 기존의 콘솔들과 일반적인 경쟁으로 승리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그것보다는 ZBox와의 협력을 유지하는 것부터 걱정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시선을 다르게 해야만 한다.
“아까 게임스테이션3와 ZBox360의 그래픽 연산속도를 이야기했었는데, 혹시 닌텐두의 뷔의 연산속도를 알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게임 사업부의 사장들도 이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괜찮다.
내가 안다.
“7세대 게임기의 목록에 올라간 주제에 이 게임기의 연산속도는 무려 12기가플롭스입니다.”
같은 7세대의 다른 게임기는커녕 6세대 게임기였던 ZBox 오리지널보다도 떨어지는 연산속도다. 그런데도 이 게임기는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다.
“사실 뷔는 7세대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나 그 내부 구조는 6세대와 다를 바가 없는 게임기입니다. 실제 성능만 봐도 수준이 떨어지잖아
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없어서 못 파는 수준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혁신이라는 이름이 가진 가치입니다.”
애초에 닌텐두가 이런 개념으로 8세대 게임기를 성공 반열에 올리지 않았던가.
닌텐두 스위칭!
저렴한 가격대에 좋은 퍼포먼스를 가지고 있는 휴대용 기기라는 이점. 오직 그 하나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호평을 받은 기기였다.
동 세대의 다른 기기에서 출시된 게임을 이식받기 위해서는 그래픽에서 엄청난 타협을 해야 했고 해상도와 프레임이 상당히 떨어지게
되지만, 그래도 가까스로 이식이 가능한 휴대용 기기라는 것으로 수많은 게이머를 흥분시켰다.
또한, 이렇게 이식한 게임이 예상외로 잘 팔리는 바람에 게임사들도 발매하고 꽤 지난 게임의 판매량을 끌어올려 줌으로써 개발사들에
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우리도 딱 이 정도만 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첫술에 배부르긴 어려운 법.
6.5세대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주기만 해도 지금은 만족이다. 그렇게 오늘 회의를 통해 새로이 개발될 콘솔은 거치기와 휴대
기의 크로스오버라는 뜻에서 프로젝스 X라 명명했다.
< 부자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