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넓은 세계를 보라 >
『여긴 대체 어디야?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넌 누구야? 그리고 나는···』
『나는··· 누구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의 공격. 그리고 그 공격을 피해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실체를 드러낸 영상은 그 이후로 더 이상 밝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직 잔혹한 세계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
『내 손을 잡아.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게.』
영상의 중반부터 영상이 끝나기까지. 관객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영상에 집중했다.
이윽고 영상이 끝나자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거친 흡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게임··· 뭐야?]
[팬더그램이 이런 게임도 개발할 수 있는 회사였어?]
[아니야. 아니야. 안 속아. 뻥이야. 영상이야 얘네 회사에서 애니메이션도 제작하니까 좋을 수 있지. 실제 게임은 완전 다른 게임일지도 모른다고.]
[그래 맞아. 난 절대 안 속을 거야.]
워낙 시네마틱 영상으로 기대감만 증폭시키고는 실제 발매된 게임은 그 수준이 상당히 떨어지는 게임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GF에서 발표했다고 해도 바로 믿어주지 않았다.
그런 반응을 보며 김현섭 실장이 말했다.
「과연 실제 게임이 이렇게 그래픽이 좋을까? 지금 영상으로 엄청 띄워주기만 하고 실제 발매될 게임은 수준이 떨어지진 않을까? 다들 걱정이 많으시죠?」
영상의 반응이 아주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리라. 그는 무대 밖에서의 졸도할 것 같았던 모습도, 나서며 보인 우스꽝스러운 걸음도 완벽히 사라진 채 자신감을 회복하여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이제는 살짝만 떨릴 뿐인 그의 멘트가 매끄럽게 나왔다.
「이런 영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게임 때문에 쉽게 믿지 못하시는 마음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영상을 두 개로 나누어서 준비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이번 신작 사이버 쇼크의 실기 영상입니다!」
트레일러의 영상과 비교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는 그래픽.
사람들은 점점 대작의 향기가 짙게 나는 이 게임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사이버 쇼크 2006년 9월 발매 예정.』
9월까지 고작 4개월이 남았다는 사실에 모두가 경악했다.
[9월? 9월에 출시한다고?]
[아니! 이런 게임을 개발하고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한마디도 없이 꾹 닫고 있었단 말이야?]
[얘들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숨기고 있다가 발표를 하는 거야?]
[샤이닝 로드도 발표와 동시에 판매 시작했잖아?]
[으아. 미치겠다. 나 아직 앤 더 스크롤도 하고 있는데!]
[4개월 남았잖아. 그 안에 다 하면 되지.]
[이 게임은 미쳤어. 진짜 미쳤다고.]
[대충 봐도 엄청난 스토리가 숨겨진 거 같아. 딱 봐도 심오해.]
[그뿐만이 아니라··· 그래픽도···!]
솔직하게 말해서. 이번 사이버 쇼크의 경우는 만족스러운 그래픽의 수준으로 만들어진 게임이 아니다. 대신 부족한 그래픽의 수준을 숨기기 위해서 어두운 분위기를 담았고, 또 그 어두운 분위기를 최대로 활용한 호러가 가미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드래곤 소울이랑 똑같은 거 같은데?’
···아무튼.
마이코닉스의 그래픽 기술력은 이제 세계에서도 최정상급이 맞지만, 아직 그 성능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다 되지 못한 ZBox 360 때문에 최상급의 그래픽으로 게임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람들이 그래픽에 열광하는 것은 그만큼 그동안 마이코닉스가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실제 그래픽 수준보다 한 단계 높은 그래픽으로 착각하게 만들어버린 눈속임 덕분이다.
[젠장! 올해는 앤 더 스크롤 딱 하나만 사려고 했는데! 에잇! 빨리 나와라. 지갑 열고 기다린다!]
‘아니. 대체 올해 게임을 하나만 구매하실 분이 이 비싼 E3에는 왜 오셨어요?’
하여간 재밌다. 28만 원이나 하는 입장권을 사서 구경을 하시는 분이 게임은 하나만 산다고 우는소리를 하니.
저건 게이머로서 부르짖는 기쁨의 투정이었다.
환호 속에서 물 흐르듯 진행이 이어졌고 질의 응답시간이 찾아왔다.
[영상을 보니까 총도 쏘고 마법도 쏘고 하는 것 같던데요. 이 게임의 장르가 뭡니까?]
‘이건 나도 궁금한 물음인데?’
이래저래 많은 것들을 접목해서 섞어놓다 보니까 이제는 딱히 하나의 장르라고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과연 여기서 김현섭 실장은 뭐라고 대답할까?
「글쎄요. 저희는 사이버 쇼크가 RPG나 슈팅 같은 하나의 장르에 갇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굳이 어떠한 장르를 말해야만 한다면 호러 표방의 슈팅 RPG라고 할까요?」
대본에 없던 내용이니 애드립일 터. 그런 걸 고려하면 꽤 괜찮은 대답이었다.
‘좋아. 분위기를 잘 탔으니 이럴 때 바로 공개하면 되겠어.’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를 공개하라는 사인을 무대에 보냈다.
곧 김현섭 실장이 정중하게 질의응답을 끝마쳤고 다시 객석이 어두워졌다.
[뭐··· 뭐야? 불안하게 왜 또 어두워져?]
[설마 연속으로 무··· 무서운 게임을 공개하지는 않겠지?]
사이버 쇼크에서의 공포가 떠올랐는지 잠시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연출되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조금 전의 테마곡과는 전혀 다른 아주 웅장한 스케일의 오케스트라.
그리고 타악기의 무겁고 힘 있는 소리는 어쩌면 전장의 드럼 소리 같기도 했다. 뒤이어 본격적으로 어두운 화면에 영상이 드러났다.
눈에 익은 익숙한 도시에 큰 폭발이 일어나고 거대한 먼지구름이 도시를 덮었다.
이내 거친 바람이 불어오고 도시를 뒤덮었던 먼지구름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영웅도 없다. 악당도 없다.』
『세상에 남은 것은 오로지 전쟁.』
『그리고 승자와 패자뿐이다.』
먼지구름 사이로 가장 먼저 보이는 인영은 바벨의 상징적인 캐릭터이자 최고 인기 히어로다.
붉은색과 푸른색을 섞은 쫄쫄이를 입은 그의 자태가 드러났다.
[어? 어어? 저··· 저건!]
[스··· 스···!]
[스파이더 가이다!]
바벨 최고의 인기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내자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GF에서 만드는 스파이더 가이라니!]
[우와아아! 드디어 제대로 된 스파이더 가이가 나올 거 같아!]
아직 스파이더 가이의 모습만 드러났기에 다들 스파이더 가이의 솔로 게임이 만들어질 거라고 오해하는 마당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점점 먼지구름이 걷어지고 스파이더 가이의 옆에 있는 존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캐··· 캡틴이다!]
[그 옆에는 헐커야!]
[뭐야? 뭐야!? 이거 리벤져스야?]
[대체 뭐지? 뭐 하는 게임이지?]
그리고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새로운 캐릭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빌런들!]
[맙소사! 아치에너미들이 다 모여 있잖아?!]
[대체 뭐야? 이거 뭐 어떤 게임이야!?]
그 순간 숨을 크게 마시며 흉부를 팽창한 거인이 왁! 소리 질렀다.
「헐커! 때린다!」
헐커의 포효를 시작으로 슈퍼히어로와 빌런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주인공의 활약이 시작된다.
[라이언 맨 대 워 몽거!]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워 몽거와 비교적 왜소하지만 화려한 무기를 탑재하고 빠른 공격을 보여주는 라이언 맨의 전투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들이니만큼 이 전투에 정말 많은 신경을 쏟은 부분이다.
[우와아아!]
[진짜 얘네들이 다 나오는 게임인 거야?]
[그런 거면 진짜 미쳤다!]
라이언 맨 띄워주기도 좋지만, 라이언 맨 만 보여줄 수는 없는 법이다. 라이언 맨이 워 몽거의 공격으로 쓰러지고 치명적인 공격을 받기 직전. 헐커가 달려들어 워 몽거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런 헐커를 날려버리는 새로운 빌런의 등장.
[제놈이다!]
[디자인 봐. 이렇게 멋있게 나오는 제놈은 처음 봤어!]
스파이더 가이의 아치에너미. 제놈은 그 검은 표피만 등장했음에도 엄청난 호응이 이루어졌다. 꿈속 미래에서는 영화에서 저 녀석마저 츤데레 스타일로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바람에 팬들의 고개를 젓게 만들었지만, 우리 게임에서는 다르다.
간지 나게 나쁘다!
‘그나저나 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파이더 가이를 활용하긴 했는데, 사람들 반응이 너무 한쪽에 쏠리는 것 같아.’
확실히 남에게 영상 판권이 있는 캐릭터가 이 정도의 인기를 가지고 있다는 건 골치 아픈 문제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확실한 건 이 캐릭터가 지금 바벨을 견인할 힘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캐릭터이며 이는 에스맨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대로면 그들도 이 게임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 캐릭터들을 다 띄워주고 싶지 않아서 에스맨은 전원 게임 불참이다.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 2008년 겨울 발매 예정···』
마지막 문구에 탄성 어린 말이 나왔다.
[아! 이건 아직 한참 남은 거구나.]
[아쉬워. 진짜 어떤 게임인지 궁금한데.]
관객들에게는 속상함일 테지만 우리의 의도는 100% 이룬 셈이다.
‘그래. 많이 궁금해 해줘.’
저들의 호기심이 깊어지면 깊어지고 궁금증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더 라이언 맨 영화는 흥행하기 좋아질 것이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2006년 E3의 키워드가 정해졌다.
게임스테이션의 구겨진 자존심.
함박웃음의 닌텐두.
마지막으로 게이머스 포럼의 신작에 대한 기대감 증폭!
이 세 가지였다.
【E3에서 벌어진 빅3의 혈전. 그러나 승자는 옆에서 구경하던 GF의 몫이었다.】
기사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
E3 행사 후.
논란이 될 만한 사건들이 있었던 만큼 게임 업계에는 새로운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회장님. 한국에서 계속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무슨일 입니까?”
“소미와 마이크루에서 계속 연락을 취해오는 모양입니다.”
콘솔 업계의 투톱이 동시에 우리를 찾는 이유는 고민할 거리도 없었다. 너무나도 뻔하니까.
“우리 게임의 출시 기종이 뭔지 발표를 안 해군요?”
“네, 회장님.”
‘딱 기대했던 대로의 반응이 나오고 있어. 아주 좋다.’
뭐든지 한 번에 다 알려주면 반응이 빠르게 식는 법이다. 이 반응이 식지 않게 유지하려면 무언가 생각할 거리. 즉,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볼 거리 등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E3의 발표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사이버 쇼크는 발매까지 이제 몇 개월 남지 않은 상황.
당연히 이런 게임은 발매 기종을 명확히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발매 기종을 밝히지 않았기에 여기저기서 가설을 만들었고 인터넷에서는 더욱 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중 대표적인 설이 ‘마이크루와 GF의 결별’이었다. 워낙 큰 회사이고 함께 했던 사업들이 많았던 덕분에 대놓고 게임스테이션으로 출시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낀 GF는 출시 기종을 밝히지 않는 중이다···라는 이상한 가설이 지금 매우 힘을 얻는 중이다.
‘모든 카더라 통신이 그럴 테지만, 나름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는 사실무근이었다. 그래서 마이크루의 초조해하는 반응이 더 흥미롭다. 상식적으로 봐도 내가 소미를 선택할 리가 없는데 왜 저리 안달복달하는데 도통 모를 따름이다.
“마이크루를 이해할 수가 없네요. 지금까지 우리가 콘솔 게임을 발매하면서 ZBox를 피했던 일이 있던 것도 아니잖습니까. 심지어 6세대 콘솔은 ZBox보다 게임스테이션이 압도적으로 성공한 시대였음에도 말이지요.”
그뿐이랴.
사이버 쇼크의 발매 예정일까지 게임스테이션3는 출시조차도 안 하는 상태다. 우리 게임은 9월에 발매 예정이지만 게임스테이션은 아무리 빨라도 11월에 발매되니까. 게임이 콘솔보다 빠르게 발매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백번 천번을 생각해도 소미로 우리가 갈아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둘 다 서로를 크게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겠지요.”
“이만큼이나 이슈가 유지되는 것 보면 사내 정보가 확실히 잘 통제되고 있기는 한가 보군요. 아무튼 이만하면 됐습니다.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 일단은 ZBox로만 출시한다고 말해두십시오. 한동안 게임 스테이션으로는 출시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판단에는 일본을 딱히 미워한다거나 일제 강점기 또는 식민사관에 대한 반발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자고로 나는 사업가이고 장사꾼은 이윤을 최고로 보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소미와 게임스테이션을 딱 자른 이유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마냥 게임이 다 그냥 게임이고 CD만 넣으면 다른 기기에서도 어찌어찌 돌아가는 줄 알았었지. 그런데 개발하는 처지가 되어보니 이게 전혀 딴판이더라고.’
ZBox로 출시하는 게임은 개발 과정에 큰 어려움이 없다. 게임에서의 퍼포먼스도 우리가 원하는 수준으로 수월하게 개발했다. 하지만 게임스테이션으로 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개발 난도는 확 높아지는데 결과물도 구질구질해져.’
ZBox로 만들면 명작 급이 되는 게임이 게임스테이션으로 컨버전만 했다 하면 문자 그대로 넝마가 되어버린다. 물론, 이건 우리 때문이다. 회사의 기술적인 역량이 부족해서이며 더욱 긴 시간 게임을 개발하고 연구하다 보면 노하우가 쌓여 해결해내게 될 터다.
그래서 훗날을 기약하며 ‘일단은 게임스테이션으로 내놓을 생각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소미와 손을 잡으면 회사 이미지에 손해만 끼칠 테니 말이다.
그리 매듭짓고 회의를 마치려 할 때였다.
“아니. 잠시만요.”
순간적으로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만약에 정말로 마이크루와 소미가 경쟁 때문에 안달복달하는 지경이라면, 이런 상황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발상이 뇌리에 남았다.
“마이크루에 출시 시종에 대한 답변은 보류하고, 직접 만나서 대화했으면 좋겠다고 전달해 주십시오.”
“네, 회장님. 식사로 할까요? 아니면 미팅으로 할까요?”
“거창하게 대화할 건 아니니 식사 정도면 되겠네요.”
< 넓은 세계를 보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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