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다, 그게 있었지 >
73. 맞다, 그게 있었지
윤태식이 회사 업무와 게임으로 매일을 치열하게 지내는 그 시각, 서울의 한 술집에서는 한숨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는 젊은 사내들이 있었다.
훤칠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의 남자가 한 눈에 봐도 의기소침하고 하소연할 거리가 많아 보이는 사내의 말을 들어주는 중이었다.
“아··· 진짜 미치겠어요. 영탁이형. 저희 이번에 영화 제작하고 있었다고 했잖아요.”
“어. 사활을 건 큰 영화를 준비한댔지? 그 전에 저예산 영화 한편 먼저 찍는 중이라고 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맞은편에 있는 사내는 재차 속이 상하는 듯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그 저예산이요. 저희 그게 엎어질 거 같아요.”
“뭐? 그 영화는 저예산이라서 어지간하면 엎어질 일이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죠.”
“그런데 그게 왜 엎어져?”
축 처진 어깨의 사내가 쓴 소주를 입에 털었다.
“이게 원래 순수 제작비를 8억 정도로 잡고 시작했던 영화거든요. 그런데 지금 얼마 쓴 줄 아세요?”
“얼마 썼는데?”
“13억이요. 13억.”
“에? 8억을 잡고 시작했는데 13억이 들어갔다고? 엄청 오버됐잖아?”
심영탁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의 연극영화과 선배였다. 나이는 영탁보다 1살이 어리지만 다른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와서 입학했기 때문에 영탁이 입학 했을 때 4학년이었던 선배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 영화 제작사에 취업해서 투자와 배급에 관련 된 업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위로 받을 겸, 자신의 어려움을 이래저래 한탄했다.
“말도 마세요. 어른들이 ‘요즘 놈들은 근성이 없어 근성이’ 뭐 이런 말하면 진짜 기분 나쁘고 그랬는데··· 와··· 진짜 근성이 없긴 없나 봐요. 식사하고 오겠다고 나간 놈이 그대로 짐 싸들고 도망가질 않나···”
“도망을 가다니?”
“아니 무슨 우리가 노예 수용소에요? 촬영 도중에 도망을 갔답니다. 영화 배우러 왔다는 스태프가 촬영 도중에 힘들다고 토껴버린 거예요. 그것도 한두 녀석이 아니라 진짜 영화 촬영이 중단 될 정도로 계속이요.”
“그래서 촬영할 스태프가 없어서 엎어지는 거야?”
“아뇨. 원래 지금이면 영화 제작이 끝났어야 하는데 이래 미뤄지고 저래 미뤄지고 하다보니까··· 이제 반 조금 넘게 촬영했거든요. 말씀드렸듯이 8억을 잡고 시작한 영화가 13억이나 사용한 마당이고요. 그러다 보니까···”
“돈이 떨어졌구나?”
“네. 이제는 영화가 문제가 아니라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하는 지경이에요.”
영탁은 비어있는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술보다도 복잡한 심경이 더 쓰린지 그는 안주도 없이 거듭 술만 마셨다. 이런 동생을 보며 영탁은 찹찹한 표정을 지었다.
대형 제작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작과 배급을 함께 하는 건실한 곳. 나름대로 업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영화사에 취업했을 때가 엊그제 같았다. 당시 학교 사람들이 얼마나 축하를 해줬던가.
나중에 꼭 함께 영화를 만들어보자며 주연배우는 자신이 맡겠다고 호언장담도 했었다. 그때의 호기와 치기 어렸던 이야기는 거품 같은 미래이고 한낱 상상에 불과했나 보다. 현실이 이러한 것을 보면 말이다.
동생의 한숨을 보고 있는 영탁의 입맛은 쓸 수밖에 없었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머물렀고 영탁이 재차 입을 열었다.
“어디서 광고투자나 뭐, 그런 거 받으면 되지 않아?”
“그게 완성하려면 최소한 3억은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요. 투자받을 만한 곳을 다 찾아가 봤는데···”
말끝을 흐리는 동생을 보며 그도 한숨을 쉬었다.
“투자하겠다는 곳이 없구나?”
“네······.”
“광고 같은 건? 영화에 들어가는 소품 같은 걸 이용해서 광고를 하고 그러는 거 있지 않아?”
“있죠. 초코파이라던가 그런 회사들 다 가봤어요. 그리고 대차게 까였죠. 딱 봐도 망할 영화라며 전부 투자를 고사하더라고요.”
하긴 그렇다.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현직에서 투자와 배급에 관련 된 업무를 계속 하고 있는 이 동생이 설마 영탁이 앉은 자리에서 바로 할 수 있는 생각을 못했겠는가. 그래도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단지 능력이 부족하기에 계속 마음만 무거워진다.
“진짜 곤란하겠네.”
“선배들이야 회사가 망해도 이직할 곳들이 많은데 저는··· 이제 막 경력을 쌓고 있는 중이죠. 이 경력으로는 이직도 못해요.”
“돈. 그게 문제구나. 젠장.”
“그렇죠. 돈만 있으면 되는데 그게 없죠.”
비식비식 웃으며 기운 빠진 손으로 술잔을 부딪쳤다. 그리 서로 똑같이 술을 마시고 인상을 찌푸리며 쓴맛을 공유할 때였다.
“아는 부자라도 있으면 비벼라도 볼 텐데 인맥이 쥐뿔이라도 있어야죠.”
그의 말을 듣고 영탁의 머리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형빈아, 잠깐만.”
“에?”
“개인 투자자가 투자를 해도 받는 거지?”
영탁의 말에 형빈이 손사래를 쳤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형, 제 말 제대로 못 들으셨어요? 3억이라니까요? 대체 어떤 개인 투자자가 3억을 투자하겠어요? 게다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감독과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대작 영화라면 모를까. 이건 그냥 저예산 영화인데요. 자칫 아는 사람 물 먹이면 얼굴도 못 보게 되요.”
3억이라는 리스크를 감당할 만한 자본가가 흔할 리 없다. 더군다나 영탁과 형빈 같은 조촐한 인맥에서는 기둥뿌리를 뽑아낼 정도의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제가 죽겠다고 같이 죽을 사람 만들면··· 어휴. 말도 안 되죠.”
그러한 형빈에게 영탁이 말했다.
“혹시 모르잖아. 형이 요즘 하는 게임이 있는데 여기 부자들 진짜 많아.”
“에? 게임이요? 아··· 진짜. 형! 지금 장난할 상황 아닌 거 아시면서 그래요?”
“장난이 아니라 우리 길드가 엄청 유명한 길드거든? 진짜 부자야. +7강에 싸울아비 장검에 투망에 그냥 팍팍 지른다니까? 형님들에게 한 번 부탁이라도 해보면 길이 생길지 몰라.”
“+7···뭐요? 진짜 장난 좀 그만해요. 게임 아이템 사는 거 가지고 부자는 무슨. 형. 3억이라니까요? 3억이 필요하다고요. 게임 골드가 아니라 3억 원이요.”
아직 한국의 분위기는 ‘게임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은 현실 부 적응자나 실패자’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 때문에 형빈은 영탁의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가산을 탕진해가며 게임하는 폐인으로 여겼다.
반면에 심영탁은 달랐다. 그가 본 길드원들은 직장 없이 게임에만 매진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아니야. 네가 플레지를 몰라서 그래.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바로 연결해줄게.”
“형. 괜히 기대주고 시간 쓰고 그러지 마세요. 괜히 좋게 지내다가도 돈 얘기하면 어색해져요.”
“아. 너무 그러지 말고 기다려봐.”
친분 있고 자주 만난 이들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연기 못잖게 게임을 충실하게 즐긴 그였던 만큼 길드 내에는 친분 있는 사람들이 꽤 됐다. 하지만 형빈의 말대로 필요한 금액은 무려 3억이다.
아무에게나 말한다고 해서 척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재산 대부분이 부동산인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융통할 수 있는 돈을 거머쥔 재력가를 골라야 했다.
이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최적의 인물은 호탕한 형님인 담덕이었다.
‘이분은 3억이야 예사지.’
길드 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부자에 남자다운 호탕함까지 겸비한 사나이. 투자를 부탁하면 왠지 들어줄 것도 같았다. 다만 그에게 부탁하는 것에는 한 가지 요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용기였다.
‘만약 담덕 형님돈이 날아간다면··· 3억 대신 나는 인천 앞바다에 던져 질지도 몰라···!’
강남 유흥가의 황제라 할 수 있는 인물. 게임에서도, 정모에서도 어느 정도 가까운 편이지만 잘못 되었을 때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 같이 어울리다가 휴대전화를 받을 때 간간히 하는 멘트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할 때가 종종 있었다.
‘구도자의길 어르신은 일찍부터 이런 쪽에는 선을 그으셨었고.’
아낌없이 회식 장소에 고기를 베푸는 인덕을 자랑하지만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다. 게임에서의 즐거운 만남은 딱 게임 모임일 때 까지만이라고 해뒀으니 그 역시도 넘어갔다.
‘경호형이 변호사니까 3억은 있으시려나?’
플레지에서의 닉네임은 좌호법. 실명은 박경호.
그는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현재 직업은 변호사였다. 자세히 캐 묻지는 않았지만 꽤 돈을 잘 벌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자주 만났다고는 해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아는 동생의 말을 듣고 3억을 턱하니 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명환이형이다.’
지옥검.
게임 내에서의 친분도 상당하고 슈퍼 엘리트 모델이니 만큼 돈도 잘 버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투자를 해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다른 형님들보다 한참 만만하다는 점이었다.
“형빈아. 전화기 좀 줘봐.”
영탁은 아직 휴대폰이 없다. 그렇기에 수첩을 꺼내 명환의 연락처를 찾아내고는 형빈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명환이형! 저 영탁이에요!”
- 어. 그래. 너 게임 접속은 안 하고 갑자기 웬 전화냐?
“아··· 그게 제가 학교 동생을 만나고 있거든요.”
- 뭐야. 2학년이라고 꼴에 후배들 데리고 노냐?
“동생이긴 동생인데 후배는 아니고 선배에요.”
- 어? 그게 뭔 소리··· 아 맞다. 너 대학 늦게 갔다고 했지. 근데 왜?
인사치레가 끝나고 본론을 꺼낼 타이밍이었다. 심영탁은 잠시 마른 입술에 침을 뭍이고는 말했다.
“저··· 그게··· 형.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 오케이. 감 왔어.
“예?”
- 모르겠으면 안 하는 게 좋은 거야.
“아. 그래도 말은 꺼내게 해주세요.”
- 에이. 느낌이 그런데. 알았다. 그래, 해 봐.
영탁이 헛기침하고는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만난 동생이 영화 투자사에 다니는데요.”
- 아하. 영화에 투자하라고?
“네. 뭐 말하자면 그런 건데, 이게 어떤 거냐면···”
- 영탁아.
이런 부탁을 처음해보는 그와는 달리 명환은 자주 받아본 듯했다. 그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가려는 영탁에게 단정적으로 말했다.
- 형이 너 엄청 좋아하는데, 그건 싫다. 차라리 네가 급한 일이 있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그건 몇 천만 원이라도 그냥 빌려줄 수 있어. 형이 그 정도 능력은 돼. 그런데 투자는 전혀 다른 문제야.
칼 같이 자르고 들어오는 명환의 말이었다.
좋은 이야기가 함께 섞여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단칼에 베어버리니 섭섭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해하기에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 역시··· 그렇죠? 괜한 말을 꺼내서 죄송해요. 형~ 나중에 게임에서 봬요~”
- 그래. 잘 놀고. 나중에 보자.
영탁은 섭섭함을 티내지 않으며 최대한 부드럽고 밝게 통화를 끝냈다. 그 모습을 본 형빈이 고개를 흔들며 술을 권했다.
“거 봐요. 얼마인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끝났네.”
동생의 위로에 영탁이 걱정하지 말라며 휴대폰을 들었다.
“기다려봐. 이제 겨우 한 사람에게 건 거잖아. 너도 투자 받을 때 엄청 여러 곳들 다닐 거 아냐?”
“그야 그렇지만···”
“자자. 너도 들었잖아. 개인적으로는 몇 천만 원도 빌려준다는 거. 우리 길드가 이 정도라고.”
그의 호언장담에 형빈은 기대감 없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있는지 영탁에게서 휴대폰을 돌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한편, 영탁의 머릿속으로는 길드원들의 인명록이 빠르게 펼쳐졌다. 그리고 나름대로 절친했던 지옥검의 반응을 봐서인지 대부분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하나, 둘 제외하다보니 정말 몇 명 남지 않는다.
‘부자 길드라고 큰소리 쳤는데 이렇게 사람이 없나?’
당연한 부분이기는 했다. 이제 막 IMF의 여파를 극복해나가는 중인 한국에서 3억이라는 큰 돈을 한 번에 융통할 수 있는 인물. 그 중에 플레지를 하고 길드에 소속된 이들로 거르니 수가 몇이나 나오겠는가.
결국, 목숨 걸고 담덕에게 부탁해 볼까를 망설이는 그의 뇌리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총군주 형님! 이 분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목숨까지는 안 걸어도 되겠지? 산에 파묻거나 하지는 않으실 거야.’
친분 위주로 떠올리다 보니 딱 한 번 얼굴을 본 그가 마지막에 생각났다. 3억은 큰 회사를 운영하는 오너이니 없으리라는 예상이 무례할 것이다.
다행히도 연락처를 가지고 있었기에 영탁은 지체 없이 윤태식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 맞다, 그게 있었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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