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다양함 >
‘다시 봐도 참 재미있네.’
지금까지 이 드라마를 네 번 정도 본 것 같다.
편집이 완료되었다고 할 때 한 번, 궁금해서 또 한 번, 내부시사회에서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오늘까지 총 네 번이다. 짧은 기간 동안 이만큼 반복해서 보면 아는 걸 복습하는 셈이니 지겨울 법도 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전혀 조금도 지겹지 않았다.
‘그나저나 4가 두 번이나 반복됐잖아. 윤태식 회장님이 한국인이고 한국에서는 4를 조심하는 게 예의라고 하던데. 괜히 나 때문에 우리 회장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사람이 좋고 고마워서 관심 두게 된 동방의 작은 국가의 속설을 애써 머리에서 지웠다. 여기는 미국이니까 4가 두 번이어도 괜찮을 것이라 애써 믿었다. ‘사’가 아니라 ‘포’니까.
[인터뷰 질문받도록 하겠습니다.]
암전됐던 극장에 불이 들어오고 환한 가운데 진행이 이어졌다. 상념에 빠져 있던 사이 스크린이 치워지고 인터뷰를 진행할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오늘 보니 배우분들끼리 상당히 친해진 것 같더군요. 각 배우분이 느끼기에 가장 명장면은 누구의 것이고 어떤 장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배우를 지목하고 하는 질문이 아니라 대답하고 싶은 배우가 마이크를 들어야 하는 질문이다. 보통 이런 인터뷰에서는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질문이었다.
여기에서 먼저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알버트였다. 가장 인지도가 높은 배우였기에 그가 마이크를 먼저 잡아줘야 나머지가 조금 더 편하게 대답을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최고의 명장면은 여기 제 옆에 이 마크의 액션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 다 보셨잖아요? 이게 영화지 어떻게 드라마 액션입니까?]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튀어나온다. 마크 역시 미소지었지만, 같은 말을 자신이 했을 때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웃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조금 예민할 수 있는 질문인데, 영화의 연출부터 배우까지 참 구성이 독특하다고 여겨집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건가요? 아니면 의도적으로 이렇게 맞춘 건가요?]
지금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하나가 된 알버트는 물론이고, 연출인 제이스 완도 연속 실패로 침몰한 감독의 이미지를 가졌다. 조연으로 함께한 위로라 역시 범죄로 잊힌 배우이며 그 외에도 드라마에 참여하는 배우 중 우여곡절이 없는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에는 연출을 맡은 제이스가 마이크를 잡았다.
[의도하고 이렇게 인물을 구성한 거냐고요? 맞습니다. 의도하고 한 겁니다.]
바로 인정하는 제이스의 말에 기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보통 이런 멘트들이 있으면 기사를 써서 만들기가 편해지기 때문이다.
[솔직히 잘나가는 감독과 잘나가는 배우. 이런 조합들로 맞춰서 끝내주는 시나리오로 작품을 만들면 성공의 확률이 아주 크게 올라갑니다. 그 때문에 수많은 투자자들이 누가 각본을 쓰고 또 누가 연출을 하는지 또 주연은 누구인지를 따지죠.]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효율적인 투자 방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덕분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도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확실히 예민할 수 있는 대답이다. 현재의 시스템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다. 능력을 갖췄지만 기회가 없는 이들을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천만 달러까지 투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절대 납득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휴지통에 버려야 한다면 그 누가 그걸 받아들이겠는가?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는 그런 미친 짓을 하는 투자자가 있습니다.]
제이스는 말하며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기자들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집중했다. 이들이 가리킨 모든 방향의 끝에는 살짝 당황한 기색의 동양인이 있었다.
[드라마 데들리 스페이스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전적으로 투자를 해준 윤태식 회장님입니다.]
뒤이어 저마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이들의 말들이 이어졌고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어린 표정을 한 이는 마크였다.
인터뷰 종료 후 인터넷에는 데들리 스페이스에 대한 기사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데들리 스페이스의 시사회를 마쳤다. 시사회에 참석한 기자들은 드라마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완벽한 처음이라니! 이것이 처음 드라마를 만든 회사라는 것을 우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나는 분명 드라마를 보러 갔는데, 시사회에는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넷플렉스. 드라마와 영화의 경계를 무너트리다.】
【한시도 긴장을 멈출 수 없는 호러다운 호러와 주연 배우의 짜릿한 액션.】
【새로운 시대의 조짐. 유료 케이블보다 인터넷 드라마의 시대가 올 거라 확신이 왔다.】
【드라마도 드라마지만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배우들의 눈물 나는 과거 이야기.】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 제이스 완, 위로라 호로위즈, 마크 마르티네즈. 이들의 공통점은?】
【‘두 번의 영화가 망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날 써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10만 달러면 만들 수 있는 공포 영화를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 제이스 완의 부활.】
【‘고작 두 번만 망한 제이스 감독은 나보다 훨씬 상황이 낫다.’ 무려 13편의 영화가 망한 배우의 감사 눈물.】
【‘2편의 영화가 망해? 13편을 연속으로 망했어? 빌어먹을! 나는 20년이나 배우 생활을 그만둬야 했다! 13편의 망한 영화? 난 그거라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했다.’ - 누가누가 더 고생했나?】
【데들리 스페이스의 배우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아무도 찾지 않았고, 제대로 된 배역을 주지 않았던 우리를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은 윤태식 회장. 우리는 모두 그에게 감사한다.】
*
기사를 읽어보니 아주 가관이다. 도대체 왜 관심의 초점이 나에게로 옮겨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지. 얼추 짐작은 했어. 다들 정신이 나갔나 싶을 만큼 나를 추켜세워줬으니까.’
동방박사처럼 동방의 사업가가 나타나 무언가를 이룩했다는 식의 레퍼토리. 여기에 구함 받은 왕년의 영웅들이라는 서사를 기자들이 진자 제멋대로 끄적여버렸다. 덕분에 알버트는 낄낄대며 놀려댔다.
[여~ 어때? 인터넷에 아주 윤태식의 이름으로 도배가 되었던데?]
[환장하게 고맙다. 덕분에 아주 시끌시끌해서 정신이 없어. 내가 할리우드 가십맨인지 사업가인지 모를 지경이야.]
[이런! 뭘 모르나 본데 미국은 사업가도 이렇게 가십을 끌고 다녀야 더 성공하는 거야.]
[그런 거 없어도 충분히 성공했다고.]
[오오. 꿈을 크게 가지게나. 성공을 넘어서 위대해져 보라고. 하하하하!]
[너 때문에 진짜 시끄러워졌잖아.]
데들리 스페이스의 시사회는 분명히 이보다 더 성공적일 수 없을 정도로 성공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게임 팬들에게서는 난리가 나기도 했다.
*
성공적으로 시사회를 마친 데들리 스페이스의 소문들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드라마가 넷플렉스에 공개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기대와 흥미 속에서 데들리 스페이스의 공개일이 당도했다. 과연 넷플렉스의 첫 자체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받게 될까?
[시청자 유입됩니다!]
인터넷 방송의 장점은 실시간으로 시청자의 데이터를 취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몇 명이나 우리의 콘텐츠를 조회했지?’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괜히 미래에는 ‘글로벌 기업이 개인의 신상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다. 제재가 필요하다.’는 불안감이 생긴 게 아니다.
어떠한 기기를 통해 보고 있으며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다른 영상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 등 다른 내용까지도 실시간 조회가 가능했다. 가족조차도 잘 모르는 은밀한 취향마저 잘 알고 적합한 상품을 안내할 수 있는 데이터가 쌓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TV로 송출하는 일반적인 시스템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인터넷 방송만의 무시무시한 강점이다.
‘물론, 부엌칼을 주방 요리에서만 쓸지 사람 죽일 때 사용할 수 있으니 다 없애야 하는지의 판단만큼 과장된 불안 요소도 없지 않은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자동차는 사고가 나니까 다들 걸어서 다니는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아직은 시작 단계이기도 하고 말이다.
[분위기는 어때?]
[기가 막힙니다! 첫 화 현재 시청자 45만 명입니다!]
데들리 스페이스가 공개되고 고작 8분이 지났다.
8분 만에 133만 명이 시청을 위해 붙은 것.
지금 분위기면 1,000만 뷰는 거뜬하다. 그뿐이랴! 3,000만 뷰까지도 넘볼 수 있다.
‘지금까지 넷플렉스에서 1년 최대 조회수를 기록한 것은 바벨의 라이언 맨 이었지.’
조회수는 3,500만이었는데 잘만하면 기존의 기록을 깨트릴 수 있을 작품이 나올 분위기다. 그 기대감에 회사 전체가 들뜬 모습을 보였다.
더군다나 데들리 스페이스는 첫 작품이다. 첫 작품에서 이런 대형 홈런이 나온다니 고무적인 모습이 되는 건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그렇게 밝아진 표정으로 디스플레이를 확인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이내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렇게 좋은 날은 뭐다?’
LA 다운타운의 중심을 조금 벗어나면 앨젤레스 코리안 치킨이라는 한국식 치킨집이 있다.
“상무님. 치킨 주문 하셨죠?”
“물론입니다. 오늘 넷플렉스의 직원들에게 한국의 맛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도록 하겠습니다.”
치느님은 사랑이고 애국이시다!
“이 인원들 다 먹일 치킨을 튀기려면 그 가게도 정신없겠네요.”
“700마리를 주문했으니 정신이 없는 정도가 아닐 겁니다. 오늘 홀 영업은 이미 정리했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많아서 가게 하나로는 사실 다 소화하기도 힘들 테고요.”
이곳은 치킨 한 마리에 30달러로 한국과 비교하면 두 배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주문한 치킨만으로도 매출이 2,400만 원이다. 맥주를 포함하면 4,000만 원 수준의 주문을 하였으니 치킨집으로서는 즐거움의 비명을 지를 것이다.
‘셔터 내려! 오늘 매출은 내가 책임진다! 이런 식의 말을 소싯적에는 실제로도 해보고 싶었더랬지.’
왜 그런 거 있잖나. 넥타이를 이마에 두르고 알싸하게 술에 취해서는 한턱 크게 쏘는 오래된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 말이다. 유치하기는 해도 그 뻔한 맛에 보는 재미가 있으니 이를 신파라 해도 좋겠다.
모두 하나 되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직장생활이기를 바란다. 뭐니 뭐니 해도 집 밥이 최고이고 회사에서 기분이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냐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다들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 하나의 다양함 > 끝
ⓒ (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