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틀을 만드는 자 >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내가 만든 세상이라.’
일견 과하게 포장된 표현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과 제작을 구분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작품과 상품은 엄연히 다르다. 최소한의 기준점을 두고서 규격화하고는 이윤을 추구한다. 이른바 가성비라는 항목이 대두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상품으로 소비하기 위한 최고의 효율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작품은 주관적인 잣대를 더하게 된다. 문화와 추억을 비롯한 다양한 가치가 깃든다.
‘골동품을 단순히 그램당 고철값으로 매기는 사람과 문화재로 보는 식견의 차이겠지.’
누구는 게임을 한낱 오락이라고 본다. 반면에 어떤 이들에게 게임은 하나의 세계이고 즐길 거리이며 교훈을 주는 학습서이기도 했다. 춤과 노래 역시 혹자는 딴따라라며 비하하지만, 누군가는 인생을 담고 목소리에서 영혼의 울림을 느낀다고도 하지 않던가.
곽지원 부사장이 말해준 바가 그러했다.
나는 돈만 많은 재벌이 아니다. 사람들이 푹 빠질 수 있는 세계관을 창작하여 보여주며 운영하는 사람. 새로운 직업을 열었고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는 녀석. 롤 모델로 삼기 썩 괜찮은 인간이었다.
‘기분 좋다.’
이번의 실패 따위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역시 아부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와도 같이 나이만큼 깊어지는 모양이다.
입꼬리가 씰룩거릴 만큼 들떴다. 하지만 대놓고 인정하면 이 역시 밥맛 아니랴. 살짝 민망한 듯 겸연쩍게 대꾸했다.
“제가 무슨 세상을 만듭니까? 신이나 왕도 아니고 말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신이야 신이니까 그냥 뚝딱하고 만들면 되고 왕은 그 나라에서만큼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됩니다. 본디 태생부터 그랬고 힘과 권력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개천에서 승천한 용이 아니겠습니까?”
‘맨발에서 벤츠까지’라는 말을 쓰지 않은 건 벤츠 1대쯤은 가볍게 볼 재력가가 되어서라고 덧붙였다.
“신도 왕도 아닌 보통의 사람. 같은 출신이던 일반인이 해냈으니까 더욱더 대단한 것이고 성공 위대한 겁니다. 그리고 고작 몇 년 만에 이뤄낸 업적이지요. 남은 시간이 창창한 만큼 더 큰 역사를 써내며 이룩하실 겁니다.”
내가 잘못 봤다.
‘우와! 이렇게 대놓고 빨아주다니!’
인텔리하게 돌려서 높여주는 줄 알았더니 양쪽 방법을 몽땅 쓴다.
나는 크게 한 수 배웠다. ‘직장 상사에게 하는 아부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가르침을 말이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너무 앞서간 것 같기는 하지만 뭐 틀린 말씀은 아닌 것 같네요.”
“물론입니다.”
서로 크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만 우중충하게 지내라는 말씀이시죠? 굳이 사무실 안에서 마셔도 되고 카페에서 마셔도 되는 커피를 걸으면서 마신 이유이기도 하고요.”
“아니라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만 꼭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 중요하게 하려는 말씀이 남았다는 거군요.”
“예, 회장님. 지금까지 회장님이 해오신 모든 사업이 다 쉽게 풀려왔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위기가 한 번도 없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하면, 지금 하시는 사업은 회사의 위기입니까?”
“그럴 리가요. 이 정도 규모 사업으로 우리 회사에 위기가 생기겠습니까? 전부 말아먹어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LON 온라인의 리그를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고 그 모든 비용을 내가 전부 전담한다고 하더라도 GF 입장에선 그냥 돈만 좀 날렸다 수준일 뿐이다. 이걸로 위기라니 고진환 부사장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회사에 위기가 찾아온 것처럼 일하시고 계신 겁니까?”
이러한 곽지원 부사장의 충언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라고. 극복했단 말이야. 그런데 위로받을 필요 없다고 내가 아무리 말해봐야 술 취한 놈이 나 안취했다고 하는 식으로 들을 게 뻔하잖아.’
타이밍의 문제일 뿐이다. 나일롱 환자가 환자복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온갖 선물과 위로, 극적인 이벤트까지 연거푸 받는 형국이니 참으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내 표정 역시 복합적으로 생각이 뒤섞이는 바람에 오묘해졌다.
‘으으! 추워. 이제 적당히 들었으니까 들어가자.’
감동을 받은 척, 시간 때우는 노력도 이만하면 됐다 싶은 그때, 곽지원 부사장이 말했다.
“파랑새라는 동화를 아십니까?”
당연히 안다.
“대충 기억합니다. 파랑새를 찾으러 열심히 모험하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집에서 키우던 새가 파랑새였다. 뭐, 이런 이야기였었죠?”
심지어 현실에서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꿈속에서 돌아다니는 내용이니 ‘꿈에서 깨어보니 우리 집 새가 파랑새였다. 아! 시X 꿈!’의 시초격이라 할 수 있는 동화다.
‘어릴 때는 내가 대체 뭘 본 거야? 이랬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정도의 교훈이랑.’
가만 회상해보면 명작 동화 중에는 교훈이 너무나도 듬뿍 담겨 있어서 정작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책이 많은 것 같았다. 오죽하면 두고두고 다시 봐야 하는 명작 동화들을 모아놓기도 하지 않았더냐.
위인전을 읽으면서는 ‘위인은 전부 백인들만 있나 봐.’라는 생각도 했었고 말이다. 이리저리 떠올리다 보니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 정작 어린이를 위하지 않고 다분히 의도가 많이 담겼다는 생각마저 든다.
‘내가 이따위로 뻘 생각을 자꾸 하는 이유는 간단하지. 춥다! 추워! 제발 들어가자!’
아저씨의 감동 이벤트가 너무 괴로워서 울고 싶다.
그즈음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곽지원 부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결국,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내용의 동화지요. 이제 파랑새를 찾는 모험은 대충 다 했으니 회사로 돌아가 보죠.”
바라는 바였으나 그의 멘트가 조금 이상하다.
“커피는 아직 한 가득입니다만?”
추운 날씨 탓에 뜨거웠던 커피가 어느새 미지근하게 변했지만, 내용물은 아직도 80% 이상 남아 있는 상태다.
“커피야 밖에서 마시는 것보다 사무실에서 마시는 게 더 편하고 좋죠.”
굳이 안에서 마시자는 걸 여기까지 끌고 오시더니 이제는 들어가서 마시잔다.
“그걸 아시는 분이 여기에 나온 겁니까?”
“파랑새가 있으니까요.”
“예?”
뭔 장난인가, 싶은 내게 그는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미지근한 커피를 한 손에 쥐고 들어온 사무실 책상.
“잠시만요. 뭐가 와 있네? 이게 뭐지?”
그곳에는 나갈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파일이 놓여 있었다.
“파랑새 아니겠습니까?”
함께 들어온 곽지원 부사장이 담담히 알려주었다.
“파랑새를 찾아 떠났던 모험이 끝나고 돌아왔으면 이제 진짜 파랑새를 찾을 차례이니까요.”
흡사 산타클로스의 흉내를 내는 아버지가 ‘착한 아이에게만 주는 선물이에요! 헛헛헛!’하는 것 같았다.
나는 파일의 제목을 읽었다.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 보고서』
파랑새의 이름이며 이 보고서의 작성자 이름에는 당연하게도 곽지원 부사장이 있었다.
흐름으로 보면 현재 상황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해 준 것 같다. 그런데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갑자기 뭔 스포츠입니까? 축구나 농구의 스폰서를 더 늘리는 것이 묘책은 아닐 텐데요.”
메인 스폰은 아니더라도 실내 스포츠에는 전부 스폰을 하고 있는 상태다. 굳이 여기서 스폰을 더 늘릴 필요가 없다. 곽지원 부사장은 파일을 다시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e-sports에서 e가 빠졌을 뿐인데 회장님도 일단 축구나 농구부터 떠올리시는군요.”
재빨리 보고서의 페이지를 넘겨서 내용을 읽어 봤다.
1895년 영국인들이 스포츠에 지출한 총액은 700만 파운드에 이른다. 이는 당시 영국 국민 총생산의 3%에 이르는 규모이며···로 쭉쭉 나아가는 내용은 분명히 일반 스포츠를 다루고 있었다.
“e-sports가 아닌 거 같은데요.”
“보고서의 내용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냥 스포츠에 관한 내용입니다.”
‘뭐라고?’
나는 항복했다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선문답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잘 모르겠으니 부디 가르침을 내려주시지요?”
곽지원 부사장은 웃음 사이에 있던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알려주었다.
“이미 한국에서 성공한 e-sports가 아니라. 유럽과 북미에서 성공적으로 진행 중인 스포츠로써 접근하자는 말을 하는 겁니다.”
“스포츠로 접근?”
“중국에서는 성공했는데, 그 외의 국가에서는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를 사내 평가로는 ‘중국의 게임 문화는 한국의 것을 토대로 발전한 것이니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형태를 가지고 가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고 이게 적중했다.’고 보는데, 제 견해는 다릅니다.”
“무엇이지요?”
“보다 더 문화적으로 깊게 들어가야 합니다.”
“깊게?”
“중국은 엄청난 인구수를 무기로 한 내수를 통해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포츠는 그런 관심과 홍보의 도구로 사용하기 너무나도 좋지요. 거기에 많은 인구수는 일단 공격적으로 자금을 때려 박아도 충분한 힘이 됩니다.
나는 자세를 고치고 그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한국과 같은 방식으로 돈을 때려 넣고도 걔들은 적자 걱정을 안 해요. 구매자가 넘쳐나니까. 반면에 한국은 어떻습니까? 적자 걱정을 하는 곳이 태반이고 제대로 톺아보면 실제로도 적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이다. 한국의 프로 스포츠 구단치고 적자 아닌 구단은 없다.
“기업이 애당초 마케팅 차원에서 운영하다 보니 생긴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시선을 국외로 돌려보지요. 유럽은요? 북미는요? 어떨 거 같습니까?”
잘 모르는 분야라서 내 상식에 의거하여 대답해 보았다.
“세계적인 선수 한 명 연봉이 거의 우리나라 구단 선수들 전체 연봉을 다 주는 수준이던 걸 보면 당연히 적자겠지요.”
유명 선수의 몸값, 몇백억 또는 천억을 넘어서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곽지원 부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흑자를 냅니다. 연봉을 1년에 1,000억씩 주는 명문 구단들도 너끈히 흑자를 내고 있지요.”
순간 머리가 펑 하고 터져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고액의 연봉을 준다는 건 그만큼 고액의 운영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경기장 티켓을 일 년 내내 만석으로 팔아도 연봉을 대기도 힘들 텐데 대체 어떻게 흑자를 낼 수 있을까?
“자세한 내용은 파일 안에 전부 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내가 내려놓은 보고서를 재차 권하고는 웃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그리고 앞으로는 저보다 김유천 부문장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곽지원 부사장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의자에 앉아 과연 무슨 파랑새가 이 안에 있는지, 내가 찾지 못했던 돌파구가 어떤 것인지를 집중해서 읽었다.
‘188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약 100년. 스포츠에 대한 소비의 변화 패턴은···’으로 시작한 보고서는 ‘초기 참가자로서의 장비와 의류에서 관람자로서의 입장료의 구매 이후 스포츠의 팬으로서 관련 잡지 등의 소비···’로 이어지며 세계 스포츠가 어떻게 시장을 팽창해왔는지, 그 과정을 압축해서 담고 있었다.
여느 때였다면 대충 핵심만 찾아서 읽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침표 하나조차 놓치지 않고 정독했다.
‘가장 충격적인 건 기업 스폰의 비중이군.’
스포츠의 중계방송은 물론이고 그것이 만들어 낸 흑인 스타들. 또한, 이 스타들을 통해 마케팅하고 기업이 어떻게 활용하였는가에 대해 상세하게 나왔다.
여기서 돈 좀 있다 하는 기업들은 인기 스포츠의 구단들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구단은 스폰의 의존도가 상당히 낮았다.
한국의 현재 상황과 비교하면 완벽하게 다른 이유!
그것은 바로 중계권 때문이었다.
인기 스포츠들은 무려 200개가 넘는 국가에 중계권을 수출하며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은 선수들의 천문학적인 연봉을 모두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충격적인 매출이었다.
‘아! 이래서였구나!’
이런 문화를 가진 곳에 마치 한국처럼 투자를 하게 하려고 했으니 어떤 기업이 관심을 가지겠는가!
“파랑새를 찾았다.”
곽지원 부사장의 조언.
그것은 중계권으로 이익을 얻는 구조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 틀을 만드는 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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