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가~ >
“일단 50억 정도는 해운이랑 조선업에 투자해볼까?”
한국의 대형 조선업계는 향후 3년간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된다. 어지간히 이름을 들어봤다 싶은 곳에 돈을 넣어두면 3년간 못해도 30배의 이익을 볼 수 있는 안전한 투자처라 하겠다.
‘이외에는 머리를 이리저리 써야 하니까 단순하고 확실한 거로 그냥 가자.’
당장은 이보다 좋은 선택이 없다고 결론 내린 뒤 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수야. 전에 내가 나중에 투자할 곳 알려준다고 돈 모아두라고 했던 말 기억하지?”
- 오키오키. 그래서 성찬이랑 나랑 둘 다 쎄가 빠지게 모아뒀다는 거 아니냐. 우리 둘 다 3억 정도 있어.
휴대폰 너머로까지 돈 냄새가 스멀스멀 나오는지 진수의 목소리가 경쾌해졌다. 하긴, 나 같아도 만날 때마다 잔소리 대신 돈을 팍팍 늘려주는 친구가 있다면 두 팔 벌려서 언제나 환영할 것 같다.
‘역시 돈은 행복의 전부가 아니지만 높은 확률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니까.’
웃다보면 즐거워진다는 말이 있으나 그런 식의 자위행위보다는 즐거운 일이 많아서 웃게 되는 쪽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 사실을 누가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겠냐만 말이다.
- 뭔가 소스가 나온 거야? 어디? 네가 이번에 인수한 카이닉스에 투자하면 되는 거냐?
“아니. 그건 나중에 돈 더 벌어서 투자하고 지금은 대기업 조선회사에 적당히 투자해라.”
- 대기업 조선? 그게 뭔데? 백제랑 신라는 없냐?
‘이거 맞장구를 쳐줘야 하나?’
이놈들은 쌩쌩한 나이인데도 아재 개그를 한다. 이따금 개그가 아니라 진짜 상식 수준인 것 같아서 깜짝깜짝 놀랄 때도 있지만 말이다.
“배 만드는 곳 인마.”
- 하하하하! 농담이지 짜샤. 아무튼 오케이! 성찬이한테도 그렇게 전해줄게.
“그래.”
수많은 업체 중에 가장 크게 주가가 오르는 곳은 현재미포조선이다. 이곳은 무려 100배가 되니 50억을 넣으면 5,000억이 된다.
‘그만큼 넣을 수 있을 리는 없지만.’
넣어져도 문제다. 크게 성장했다가 한 방에 휘청이게 될 텐데 그 전에 그 큰돈을 정리할 수나 있을까?
‘이건 그냥 적당히 나눠서 넣으면 되겠지.’
그렇게 넣어도 아마 50배 정도의 수익률은 달성할 수 있을 거다. 이렇게 일을 처리한 뒤 나는 흐뭇하게 웃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이건 돈을 버는 거지 쓰는 게 아니잖아.”
하여간 사람의 사고방식은 쉽게 변하지 않나 보다.
‘나는 왜 TV에 나오는 졸부처럼 펑펑 쓰지 못하는가!’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행동에 괜한 갈증이 났다. 이래서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이 있고 사치도 부려본 놈이 잘 부린다고 하나 보다.
사무실에서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돈을 쓸 수 있을까? 자동차나 시계, 정장 같은 물건을 또 사면될까? 그런데 망가지거나 헤지지도 않았는데 굳이 또 살 필요는 없잖아.’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창문 바깥으로 싸늘한 바람이 부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두툼하다. 그러다 이럴 때 부릴 수 있는 사치가 떠올랐다.
“추운 날씨니까 따듯한 곳에 가서 바다를 보고 오자.”
그간 일 때문에 자주 오갔던 해외로 이번에는 정말 여행을 하러 가는 거다. 이 계획을 안고 집에 와서 태희에게 말하자 동생의 반응이 실로 열광적이었다.
“좋아! 바다! 바다! 바다 보러 갑시다! 바다!”
뜨겁게 연호하며 기뻐하는 데는 우리 가족이 사실상 제대로 해보는 첫 여행이기 때문이었다. 그간 돈은 많으면서 진득하니 시간 내기가 어려웠기에 가족과 오붓하게 놀러 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넘어야 할 난관이 남았다.
“윤태희. 너에게 이 오빠가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도록 하겠다.”
“임무? 뭐?”
“부모님을 설득해라.”
“응? 어떤 설득?”
“우리는 모레 호주로 출발할 거다. 그러니까 부모님에게 오늘까지 허락을 받아라. 여권은 당연히 있겠지?”
호주는 한국과 무비자 여행에 관련된 협정을 맺은 적이 없는 국가다. 하지만 여권 발급이 오래 걸리는 거지, 비자 발급은 돈만 쓰면 12시간 이내에 다 받아낼 수 있다.
“호··· 호주? 그 막! 캥거루! 거기?”
“어.”
“그 진짜 코알라 거기?”
“그래. 바로 거기!”
“그 허락 제가 받아내겠습니다!”
‘가라! 태희몬!’
끓어오르는 전의를 되새기며 안방으로 쳐들어간 여동생은 큰 고초 없이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돈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부모님의 강렬한 반대를 걱정했지만, 부모님도 해외여행을 가보고 싶었던 건지 예상보다 훨씬 쉽게 허락하셨다.
이틀 후.
“인천국제공항! 예~ 짱 커! 짱 커!”
“윤태희. 네가 어린 애냐?”
급히 준비한 여행이니만큼 별다른 짐을 챙기지도 않았지만, 저마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우리는 인천국제공항으로 들어갔다.
“오빠. 오빠. 나 거기 면세점 가서 물건 사도 돼?”
“뭐 사게?”
“화장품?”
“굳이 화장품은 왜?”
“애들 기념품 줘야 할 거 아냐. 기왕이면 그냥 여기서 사서 주는 게 낫지.”
확실히 공항에서 제일 신이 난 사람은 윤태희다. 특히 절차를 밟고 들어간 면세점에서는 아주 제 세상을 만난 모습이다.
그런데 자식들 앞에서 최대한 아닌 척하는데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본인도 꽤 들뜬 모습이셨다.
“우리 고 여사님 눈이 이 보습크림에서 떨어지질 않네. 이거 필요하신가요?”
“아이고. 얘. 내가 언제 그걸 그렇게 봤다고 그러니?”
‘아닌데? 지금도 완전 눈 못 떼는데?’
꽤 고가의 브랜드이긴 하다. 그래도 굳이 면세점에서 사야 할 정도로 생활비를 적게 드리지 않았기에 사려면 이미 사셨어도 되었다. 그런데도 저리 하시는 것을 보면 삶 그 자체인 절약 정신 때문일 것이다. 바로 들고 계산했다.
“이거 하나 주세요.”
“티켓이랑 신분증 보여주시겠습니까?”
면세점의 직원은 티켓의 바코드와 신분증을 확인하고 나서야 화장품을 결제해주었다.
“19만 원입니다.”
화장품을 결제하고 조용히 고여사의 손에 화장품을 들려주었다.
‘그러고 보니까 태희 화장품도 저가품만 있었던 거 같은데.’
한국에 돌아가면 태희를 시켜서 고여사도, 태희도 화장품을 바꾸도록 해야겠다. 그리 생각할 즈음 열 살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우오오! 비행기 시간! 비행기 시간 다 되어가!”
시계를 보니 아직 20분이나 남아 있었다.
“천천히 가도 돼.”
“안 돼! 늦어서 비행기가 우리 버리고 가면 어떡해? 그리고 나 그거 줄도 서보고 싶단 말이야~”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아! 내가 동생한테 너무 무관심했었구나. 앞으로는 비행기 진짜 많이 태워줘야겠어.’
카드를 주고 마음껏 쓰라고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손 꼭 붙들고 아예 끌고 다녀야겠다.
‘그런데 지난번 백화점에서도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었나? 내 물건들만 잔뜩 과소비했었고?’
펼쳐질 미래에서 알 수 없는 데자뷔를 느꼈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그래. 그래. 가자.”
뭐가 그리도 급한지 태희는 내 팔짱을 낀 채로 안간힘을 쓰면서 앞으로 끌어당겼고, 부모님은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인천 공항에서 시드니까지는 약 11시간의 비행을 하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퍼스트 클래스를 빌리고 싶었지만 이 역시 부모님은 부담스러워 하실 게 뻔해서 비즈니스석으로 절충했다.
‘비즈니스석만 해도 380만 원이니까.’
1인당 편도 가격이니까 왕복으로 비행기에 3,000만 원을 썼다. 이걸 부모님이 아시면 아주 뒤집히실지도 모르겠다.
*
호주 시드니에 도착하자 한국과는 확실하게 다른 공기와 냄새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맨날 똑같은 일상을 살던 우리 가족은 이국적인 이곳을 보며 옷깃을 부채질하듯 펄럭였다.
“오빠, 호주가 원래 이래?”
“허허··· 여긴 덥구나.”
“이렇게 더운 곳이면 덥다고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랬니?”
아버지, 어머니, 태희로 이어지는 원망 가득한 눈초리에 나는 억울함의 제스쳐를 보였다.
‘귓등으로 들으시고는.’
분명히 말했었는데 다들 해외여행을 간다는 소식만 머리가 가득해서 내 말이 들어갈 틈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잠시였을 뿐 곧 길고 긴 입국심사 과정을 거치며 이곳이 다른 나라라는 사실을 차츰 실감해 내갔다.
- Taesik Yoon.
호텔에 미리 픽업을 요청해뒀기에 입국심사를 마치고 출구로 나오자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나와 있었다. 이를 보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태희가 신대륙을 발견한 선원처럼 손가락을 쭉 뻗어 가리키며 미어캣처럼 보고했다.
“저기 봐! 오빠 이름이 있어!”
‘오! 세상에.’
동생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태희야?”
“응? 왜?”
“너도 이제 22살이거든?”
“그게 왜? 뭐?”
“조금만 차분하면 안 될까?”
부끄러움은 내 몫이니까, 라는 뒷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텐션이 올라간 여동생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외여행 처음이라서 진정이 안 된단 말이야! 나 여기저기 다 사진 찍어가서 친구들한테 엄청 자랑할 거야!”
호주에 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찍는 공항 사진 대신 내가 예약해 놓은 호텔 방을 찍는 게 더욱 희소성 있을 것이다. 바로 시드니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시즌즈 호텔의 로열스위트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해봐야 ‘여기도 찍고 거기도 찍으면 돼!’라는 대답이 돌아올 게 뻔했다.
“···그래, 그래. 우리 태희 다 하렴. 대신 우선은 저분이 기다리니까 빨리빨리 찍고 가자?”
“응!”
그렇게 백화점의 아이쇼핑만큼이나 도통 왜 하는지 공감하기 어려운 공항 촬영시간을 가졌다. 그사이에 나는 픽업 기사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호텔에 가자마자 갈아입을 옷부터 구매했다. 다들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땀이 비 오듯 흐른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후 함께 이동하여 호텔에 도착했고 방을 본 태희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끼야~! 대박~!”
공항에서 사진 찍느라 설치고는 더위를 먹은 것 같다고 헥헥 대던 녀석이 급 쌩쌩해지더니 순식간에 원기회복!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다고 날쌘돌이처럼 돌아다녔다.
“방 대따 커! 완전 커!”
흔히 여자들은 밥 먹는 배 따로 있고 디저트 들어가는 배 따로 있다지 않던가? 이외에도 일할 때 쓰는 체력이랑 쇼핑과 사진 촬영에 사용하는 에너지는 따로 있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지칠 줄 모르는 그 모습에 헛웃음만 나올 즈음이었다.
[짐 정리를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드니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방이기 때문일까. 객실을 배정받아서 사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우리 객실을 전담하는 일종의 집사와 같은 담당자가 배정되어 있었다.
그냥 객실 안내 정도만 하고 돌아갈 줄 알았던 직원이 다가와서 짐 정리를 돕겠다고 말하자 마냥 해맑던 태희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네? 어? 음? 이건 그냥 제가···]
익숙하지 않은 상황과 마주하면 누구나 머뭇거리기 마련이다. 외국어라서 짐 정리를 도와준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저러는 게 아니었다. 이토록 사소한 일을 남이 해준다고 하니 일순간 당황한 것이었다.
“오빠.”
이거 어떻게 해? 라는 뒷말이 생략된 부름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짐짓 태연한 척이지만 사실 태희나 나나 다를 게 무어랴.
‘외국에 자주 나갔었지만, 최고급 호텔 서비스를 받아본 적은 없다고.’
그간 일하러 다녔지 유람하려고 사치를 부린 적은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호텔의 예약도 내가 한 게 아니다. 직원들에게 ‘최고급으로!’라는 언질만 줬고 결과를 받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동생과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 직원이 보이는 친절에 크게 놀랄 필요도, 황송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말했다.
“일단 부모님은 소통이 안 되시니까 네가 부모님 챙겨서 짐 먼저 풀어.”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이거 뭐 잘못된 거 아냐?”
단순하게 방이 큰 것을 넘어서는 서비스에 즐거움보다 겁부터 덜컥 먹은 모습이다. 낯선 체험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역시도 자주 겪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인간의 적응력은 편한 일에 가장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니 말이다.
< 휴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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