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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40화

“끝…… 인가?”

레이나의 혼잣말과 함께 검은 마법이 서서히 걷혔다.

다행히 ‘날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아넣다니, 대단하군. 그럼 이제 내 진짜 모습을 보여 주겠다.’라는 끔찍한 전개는 아니었다.

마법이 사라진 자리엔 대신관과 트리버가 한데 얽혀 쓰러져 있었다.

곳곳에 상처를 입고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몰골이기는 한데, 죽은 건지 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가까이 가서 살펴보려고 걸음을 떼려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황태자였다. 그의 뒤에 사색이 된 아덴과 기사들이 보였다. 개중에는 이젠 제법 머리가 풍성해진 대머리들도 있었다.

루카를 공작 성에 데려다준 뒤 레이나가 걱정이 되어 사람들을 모아서 온 아덴은 하필이면 대신관이 흑화하고 사람들을 공격하는 장면부터 목격하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대신관이 신전 전체에 공격을 날려 정신이 없는 와중에 부상도 입었고.

어쨌든 그런 건 지금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트리버와 대신관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레이나가 트리버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이, 로스틴이 대신관을 살폈다.

그는 대신관의 심장에 손을 얹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번에는 코에 손을 가져다 대곤 얼굴을 굳혔다.

“……죽지 않았군. 심장은 뛰지 않는데, 이상하게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다.”

심장이 안 뛰는데 숨은 쉰다니. 이 자식, 진짜 인간이 아니구나. 혀를 찬 레이나가 트리버의 이마를 짚은 손으로 힘을 넣어 주며 답했다.

“트리버 역시 살아 있어.”

“다행이군.”

대신관만 공격하라고 했으니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내내 대신관을 붙들고 있었던 탓에 부상의 정도가 심했다.

레이나는 물끄러미 트리버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용케 견뎠구나. 이렇게나 심하게 다쳤는데 피하지도 않고.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 걸 보면, 본연의 의지로 악행을 저지른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도 이용을 당한 것이겠지.

어찌 되었든 살았으니 다행이었다.

어느 정도 마력을 불어넣어 급한 불은 껐으니, 깨어난 뒤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이다.

이제 아직도 끈질기게 숨이 붙어 있는 대신관을 조져야 했다.

진짜 인간이 아닌 모양이니, 언제 벌떡 일어나 또다시 미친 짓을 할지 몰랐다.

트리버의 몸에 제 겉옷을 덮어 준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대신관에게 힘을 사용했다.

“……뭐야? 좀비야? 왜 안 죽어? 이 정도 공격했으면 귀신도 죽을 텐데.”

그러나 어째서인지 대신관의 숨이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더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았다. 미약하지만 숨은 붙어 있는 이상한 상태였다.

“설마 뭘 어떻게 해도 죽지 않는 존재, 그런 건 아니겠지.”

레이나의 혼잣말에 로스틴이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하고 시선을 맞춰 왔다.

그럼 얘를 어떡하지? 가둬? 가두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그사이에 회복해서 탈출하면 큰일이고.

서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성녀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세라는 대신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레이나, 내가 해 볼게. 내가 해야 하는 것 같아.”

세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신관을 완벽하게 끝낼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생각 말이다.

신의 계시라고 말한다면 이상하겠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등을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이자 여주가 그렇게 하겠다니, 레이나가 알겠다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로스틴 역시 레이나의 옆에 붙었다.

그러자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세라가 대신관의 심장 위에 손을 얹고 천천히 주문을 외웠다.

“신성한 빛.”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바닥에서 뻗어 나간 빛이 대신관의 전신을 감쌌다. 잠시 뒤, 대신관의 낯빛이 눈에 띄게 창백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별안간 ‘파삭’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에 금이 갔다. 마치 도자기로 빚은 인형이 부서지기라도 하듯, 그의 피부가 금이 가며 점점 바스러졌다.

“……!”

“허…….”

지켜보던 이들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관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육체 자체가 인간과 다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간 대신관에게 신성력을 사용하자, 그는 이내 모두 부서져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신의 사자라고 불리며 천 년이나 세상에 군림했던 자이거늘. 마지막이 참으로 비루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내가 가져가지.”

그 모습을 끝까지 보고 있던 황태자가 대신관의 잔해를 자루에 수습하며 말을 이었다.

“죽어서 가루가 되긴 했지만, 죗값은 치러야 할 테니까. 죽었다고 끝이 아니라는 것을 톡톡히 보여 주겠어. 연관된 자들 또한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황태자가 모두 목격한 참이었기에 증인도 필요 없었다.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이 널려 있었고.

앞으로 그의 악행을 만인이 알고 헐뜯게 만들겠다며 황태자가 이를 갈았다.

그사이 성녀는 뒤늦게 다친 사람들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적이었든 아군이었든 가리지 않고 모두.

개중에는 동부의 루벨라이트 공작과 남부의 공작, 그리고 그들이 준비한 용병들도 있었다.

몸이 다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색이 되어 기겁을 하던 루벨라이트 공작은 황태자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마주하곤 이내 부리나케 도망갔다.

“……저 새끼도 공범이었던 모양이군. 단단히 조사해야겠어.”

당장 조사단을 꾸려야겠다며 황태자가 빠르게 신전을 벗어났다.

“성녀님……!”

“역시 성녀님밖엔 없습니다!”

“오, 우리의 구세주……!”

씻은 듯이 상처를 회복한 사람들이 뒤늦게 성녀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제 저희 신전을 이끌어 주실 분은 성녀님밖엔 없습니다!”

“성녀님! 부디 신전을 이끌어 주십시오!”

개중에는 신전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에 성녀가 곧장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전 이제 더 이상 신전과 관련되기 싫어요. 모든 일이 끝났으니 떠날 생각이에요.”

“아, 아니! 어디로 떠난다는 말씀이십니까?!”

“서, 성녀님이 계셔야 할 곳은 바로 신전입니다!”

당연하게도 신관들이 기겁했다. 성녀가 신전을 떠난다면 남은 건 그야말로 몰락밖엔 없었다.

“그만……! 제 이름은 성녀가 아니라고요! 성녀인지 뭔지 안 할 거니까, 이제 그런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지도 마세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아무 데나 갈 거니까 참견하지 말아요!”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세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녀 역할을 하느라 그간 여러 가지 고생을 한 것만 생각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 그럼 저희는……!”

“신의 부름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신전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신전인지 나발인지는 알아서 해. 왜 얘한테 난리야?”

원망을 쏟아 내는 신관들을 향해 비아냥거린 레이나가 기어코 눈시울을 붉힌 세라의 손을 잡았다.

“세라, 우리 집 가자. 파자마 파티 하기로 했었잖아? 모든 일이 다 끝났으니 그 약속, 이제 지켜야지. 모킹주도 실컷 마시고, 미아의 안주도 배가 터질 때까지 먹자.”

기분을 풀라는 뜻에서 한 말인데, 오히려 그것이 세라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갑자기 레이나에게 와락 안긴 그녀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세라의 등을 토닥인 레이나가 도끼눈을 뜨고 신관들을 위협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네놈들도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

흉흉하기 그지없는 기색에 신관들이 입을 닥쳤다.

그러나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이제 신전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망연자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그건 레이나가 알 바 아니었다. 몸을 담은 직장(?)이 망하고 말고는 스스로 해결할 문제였다.

그리하여 레이나는 세라를 포함한 제 사람들과 함께 북부로 돌아갔다.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반긴 것은 케일란이었다. 곡창 지대에서 농사를 짓고 있느라 뒤늦게 소식을 전달받은 케일란은 그럴 줄 알았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대신관, 그 자식! 어쩐지 음흉했다니까! 레이나한테 마왕이네 어쩌네 하더니, 자기가 마왕이었다니!”

아니, 내가 마왕인 건 맞긴 한데. 걔가 그렇게 된 건 의문이긴 했지만.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진실도 있다는 것을 아는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러고 보니 공녀님께 편지가 한 통 도착했습니다.”

“편지? 누가 보냈는데?”

집사가 건네는 편지를 받아 들며 레이나가 물었다.

그러자 집사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게, 그러니까…… 루벨라이트 공작 부인이십니다.”

뜬금없는 이름에 편지를 꺼내던 레이나의 손이 우뚝 멈췄다. 아니, 그분이 대체 왜……?

서둘러 편지를 꺼내서 읽자, 공작과의 이혼 소송을 준비하고 있으니 증인이 되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나 싶지만, 영애께서 남편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 역시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공작, 이 자식. 자신뿐만 아니라 새 부인까지 괴롭혔었구나. 정말이지 재활용 불가능한 쓰레기였다.

아니, 쓰레기는 쓰레기가 되기 전엔 나름의 쓸모가 있는 물건이었을 테니,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망할 놈의 자식이었다.

편지를 다 읽은 레이나가 도끼눈을 뜨자, 로스틴이 자신이 보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아, 응. 소송을 할 거라는데, 사실 나는 이런 쪽은 잘 몰라서. 로스틴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에 꼼꼼하게 편지를 읽은 로스틴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돕겠다. 그런데 시기가 참으로 애매하군. 곧 공작은 처벌을 받게 될 테니까.”

“공작이 처벌을 받아?”

그래도 나름 공작인데, 그런 걸로 처벌을 받기도 하나? 레이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지금까지 대신관을 도운 것 같으니 처벌을 받을 테지. 보아하니 몰래 용병을 모은 것 같기도 했고.”

귀족이 정해진 숫자 이상의 용병을 몰래 모으는 것은 반역죄에 해당했다. 마물들로부터 북부를 지켜야 하는 로스틴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럼 빨리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같이 처벌받을 수도 있잖아. 아니, 잠깐만. 나도 처벌받는 건 아니지? 무려 직계잖아!”

보통 반역죄는 삼대를 멸하곤 했다. 일가친척까지 모두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괜한 불똥이 튀면 어쩌냐며 레이나가 걱정을 하자, 로스틴이 그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공녀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도울 테니.”

“정말이지? 진짜 나 안 죽게 도울 거지?”

“그래, 당연한 소리야.”

황족 일가를 때려죽여서라도(?)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로스틴의 진지한 눈빛에 레이나의 마음이 급격하게 안심이 되었다.

뭘 어떻게 해 주겠다는 말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잘 마무리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맞잡자, 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케일란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굳이 손을 잡고 쳐다보면서 말해야 해? 그냥 조금 떨어져서 말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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