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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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으로 가는 내내 황태자는 레이나를 포박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구속할 수 있는 물질이 없었다. 줄로 묶으면 줄을 태우고, 쇠사슬로 묶으면 쇠사슬을 녹였다.
심지어는 마법도 소용이 없었다. 레이나는 자신을 속박하는 그 어떤 힘도 모두 녹이거나 튕겨 냈다.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드디어 마왕을 잡았다고 생각했건만, 포박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황태자가 분노했다.
벌써 스무 번째 쇠사슬을 녹인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택을 떠나자마자 불안해져서 능력 제어가 잘 안 되는 걸 어떡해. 포박하고 싶으면 알아서 잘 포박해 봐.”
“이런 건방진……!”
당장이라도 포박하여 저 가느다란 목을 내리치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그리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레이나를 구속하는 걸 포기한 그는 곧장 그녀를 황성으로 데려갔다.
*
“세, 세상에……!”
“거, 검은 마법……!?”
“마왕?!”
마왕이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황성을 거닐기까지 하여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황태자가 동행 중이기는 했으나, 마왕은 포박 하나 하지 않은 상태였다.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인지 착각할 법한 상황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레이나가 한마디 거들었다.
“흐음, 여기가 황성이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좋네. 진작 올 걸 그랬나 봐. 공기도 상쾌한 것 같아. 응? 저건 무슨 꽃이지?”
꽃내음을 맡기라도 하려는 듯 레이나가 얼굴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마치 황성에 놀러라도 온 듯한 행동이었다.
“허……!”
“대체 황태자 전하께선 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왜 황태자가 마왕을 저리도 자유롭게 거닐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이는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황태자가 마왕을 내버려 두는가. 아니, 왜 같이 정원을 걷고 있는 것인가.
따로 묻지는 않았으나, 따가운 그들의 시선에서 황태자는 모두가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마왕을 잡아 왔는데, 그 업적을 칭송받아야 마땅한데, 도리어 무능하다고 욕을 먹는 기분이었다.
‘젠장!’
수치스러움에 당장이라도 레이나에게 엄벌을 내리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포박을 당하기는커녕 마법조차도 튕겨 내고 있는 상태였다.
괜히 만인의 앞에서 건드렸다가 창피한 꼴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황태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가둬 놓고 처형한 뒤에 효수해 버리면 되니까.’
마왕을 죽이면 모두 끝날 일이었다. 천 년이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마왕을 이렇게 순순히 잡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킨 그는 보란 듯이 당당한 걸음으로 레이나를 감옥으로 데려갔다.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이기는 했으나, 그녀가 황태자를 따라 감옥으로 이동하자 다들 이유가 있나 보다 생각하며 다시 황태자를 우러러보았다.
이윽고 도착한 감옥은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칙칙하고, 퀴퀴하고, 지저분했다. 마치 예전에 유폐되었던 곳을 떠올리게 했다.
“들어가.”
황태자가 두꺼운 철장으로 단단히 둘러싸인 독방을 가리켰다.
돌을 대충 깎아 만든 침대가 전부인 작은 방이었다.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레이나는 군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고 가만히 갇혀 있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기사가 두꺼운 철문을 열쇠로 잠금과 동시에 힘을 방출하여 모든 것을 녹여 버렸다.
“……헉!”
“……?!”
바보들.
지금까지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포박하지 못했으면서, 고작해야 허접한 쇠창살 속에 가두려고 하다니.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쇠창살은 물론이고 두꺼운 철문까지 단숨에 녹여서 꽤 놀란 모양인지, 우습게도 황태자가 말을 더듬었다.
레이나가 자신도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 불안했나 봐. 나도 모르게 힘이 써졌네. 나중에 배상할게. 다친 사람은 없지? 미안, 미안.”
불꽃을 맞은 기사들의 갑옷과 검이 녹기는 했지만, 신기하게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가벼운 태도로 사과하는 레이나에 황태자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갈았다.
“……다른 곳으로 옮겨!”
그가 괜히 기사들에게 화를 냈다. 얼이 빠져 있던 기사들이 서둘러 레이나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어쩌지? 여기 터가 별로인가 봐. 자꾸 힘이 폭주하네.”
그러나 다른 방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쇠로 뒤덮인 감방은 녹여 버렸고, 돌로 뒤덮인 감방은 부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자, 황태자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기사의 검을 빼앗아 든 그가 레이나를 위협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죽고 싶어?! 지금 장난하는 거야?!”
“죽고 싶을 리가 있겠어? 어쩔 수 없잖아. 불안한걸. 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끌려왔기도 하고.”
레이나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갑자기 내 저택에 구금됐다고 생각해 봐. 내 집처럼 마음이 편하겠어? 날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는데?”
동행한다고 했지, 이 끔찍한 곳에서 얌전히 갇혀 있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레이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무죄 입증이었다.
그 어떤 짓도 하지 않았는데 더러운 감방에 갇혀서 불쾌한 체험을 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렇게 불만이면 제발 날 좀 구속해 봐. 사실 나도 불안하거든? 아직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지만, 불안한 마음에 그렇게 될지도 모르니까.”
“닥쳐!”
계속해서 화를 돋우는 레이나의 말투에 버럭 소리를 지른 황태자가 감옥 문을 걷어차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힘을 사용한 레이나가 그가 차려던 문을 순식간에 녹여 버렸다.
덕분에 허공에 발길질을 하게 되어 넘어질 뻔한 황태자가 퍽 우스운 꼴로 중심을 잡았다.
“미안, 소리를 지르니까 놀라서 그만.”
“……너!”
문 앞에 선 황태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죽인다.”
그가 레이나를 잘 감시하라는 말과 함께 감옥을 빠져나갔다.
“조심해서 다녀와.”
그런 그에게 레이나가 살가운 인사를 보냈다. 물론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
감옥을 벗어난 황태자가 향한 곳은 신전이었다. 그는 곧장 대신관을 찾아가 마왕을 붙잡았다고 고했다.
“마왕을 잡았다고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대신관은 썩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어딘가 곤혹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반면 함께 소식을 전해 들은 성녀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물었다.
“그럼 이제 제가 해치우면 되는 걸까요? 신탁대로요!”
황태자 역시 그리 생각하여 신전으로 온 것인데, 대신관이 소극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음, 글쎄요. 일단 가서 한번 만나 봐야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요!”
어쩐 일인지 대신관의 반응이 석연치 않았지만, 황태자는 두 사람과 함께 다시 황성으로 돌아갔다.
성녀와 대신관을 데려왔으니, 이제 그 천지 분간 못 하던 마왕도 끝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감옥에 도착한 황태자는 뜻밖의 장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황태자의 목소리가 분노로 가라앉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도 그럴 것이, 레이나는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 쉬고 있었다.
얌전히 갇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리 편하게 늘어져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대체 왜 이딴 것을 가져다주었냐는 듯 기사들을 매섭게 훑자, 반쯤 졸고 있던 레이나가 기지개를 켜며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부탁했어. 불안해서 감옥을 통째로 무너뜨릴 것만 같았거든. 덕분에 안정을 취했어. 감옥도 무사하고, 나도 무사하고.”
기사들은 죄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할 뿐이었다.
괜한 폭력의 현장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레이나가 황태자와 그 일행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손님이 왔네?”
예상했던 손님이었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레이나의 태도가 기가 막힌다는 듯 노려보는 성녀와 표정을 지운 대신관.
마침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레이나는 성녀와 꼭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성녀님, 또 보네.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이야. 참 잘됐어.”
분노에 찬 레이나의 불꽃이 위협하듯 크기를 키우며 일렁였다.
그녀의 불꽃에 닿은 감옥의 천장과 벽이 쿵, 쿵 소리를 내며 무너질 듯 울렸다.
그러자 기사들이 사색이 되었다. 황태자 역시 다시금 긴장했다.
그 사이에서 최근 들어 레벨을 상당히 올린 성녀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뭐죠?!”
뭘 잘했다고 허리에 손은 올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레이나가 거짓을 고한 타락한 성녀에게 그녀의 죄를 물었다.
“성녀께서 내가 마물을 부리는 걸 봤다고 했다던데, 사실이야? 정말 내가 마물을 부리는 걸 보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