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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36화

“레이나……!”

“공녀!”

생각지도 못한 등장이었던 모양인지 레이나에게 모든 이들의 이목이 쏠렸다.

좀 부담스러운데. 그리 생각하던 것도 잠시, 레이나가 서둘러 로스틴의 곁으로 달려갔다.

“괜찮아?”

“괜찮다.”

제 상태를 면밀하게 살피는 레이나에 로스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벌써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레이나가 자신을 구해 주는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놀랍게도 안심이 되었다.

나름 검술로 이름을 날렸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수치스러울 법도 한데, 레이나의 도움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갑자기 루카가 찾아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형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하도 걱정을 해서 와 봤는데, 진짜 위험했잖아?”

“루카가? 그 녀석, 북부 성이 아닌 공녀의 저택으로 이동했던 모양이군.”

곧장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건만. 멋대로 목적지를 바꾼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스틴이 신전으로 향한 뒤, 루카는 목적지를 공작 성에서 심연의 저택으로 변경했다.

북부에서 동부로 바꾸는 거라면 모를까, 지척에 있는 위치였기에 마법사들은 달리 의문을 품지 않고 루카의 명령에 따랐다.

그리하여 루카는 갑자기 심연의 저택 마당 한가운데에 나타나게 되었다.

덕분에 야외 침대에서 쉬고 있던 레이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경험을 한 참이었다.

심지어 로스틴이 위험하다고 하여 두 번이나 심장이 떨어졌다. 그 길로 곧장 신전으로 날아올 만큼 깜짝 놀란 것이다.

“아덴과 함께 공작 성으로 돌아갔으니 루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고맙다.”

걱정할 것이 분명했기에 루카를 잘 돌려보냈다고 전달하니 로스틴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자 트리버의 기세가 더할 나위 없이 흉흉해졌다. 신전을 모두 불태워 버릴 것처럼 분노를 키우던 트리버가 이내 제 몸을 묶은 레이나의 불꽃을 단번에 흡수했다.

“윽……!”

그와 동시에 레이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일전에도 느낀 적이 있던 감각이었다. 갑자기 힘이 사라지는 느낌이기도 했다.

로스틴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그 모습을 목격한 트리버가 이를 갈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

“레이나!”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울분에 가까웠다.

신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한껏 미간을 찌푸린 레이나가 방금 본 믿을 수 없는 장면을 입에 담았다.

“……야, 설마 너 지금 내 힘 흡수한 거야?”

그러고 보니 일전에 케일란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트리버가 레이나의 힘을 흡수하고 몸집이 커졌다고.

당시에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아 그냥 넘어갔었는데, 불행히도 방금 트리버의 몸속으로 제 힘이 흡수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참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 어째서인지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린 트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레이나와 나는 이어져 있어. 레이나의 힘 덕분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잖아. 내 모든 것은 레이나로 이루어져 있어.”

“아니, 이 무슨 미친…….”

실화야? 쓰레기 같은 소리를 저렇게 진지하게 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물론 사람이 아니고 마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와 자신이 이어져 있다는 말에 레이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 거라면 빨리 멈추라고, 이 미친 힘아!

라고 생각한 순간, 트리버가 레이나의 힘을 대량으로 흡수했다. 그녀가 진실을 알아 버린 이상 더는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레이나가 마력을 가져가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었기에, 트리버는 온 힘을 다하여 그녀의 마력을 빨아들였다.

“……?!”

곧장 힘을 내주지 말라고 명령해 많이 빼앗기진 않았지만, 이미 어느 정도의 마력은 빠져나간 상태였다.

다리에 힘이 풀린 레이나가 쓰러지지 않으려 서둘러 로스틴의 팔뚝을 붙잡았다.

로스틴이 그런 레이나의 허리에 손을 받쳤다. 덕분에 넘어지지 않은 그녀가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트리버에게 소리쳤다.

“이 배은망덕한 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딱히 열심히 키우지는 않았지만, 배은망덕한 것은 확실했다.

그의 모든 것이 자신으로 이루어졌다니, 잘 모셔도 시원치 않은데 왜 힘을 빼앗고 난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레이나가 씹어 먹을 듯 화를 내자, 트리버가 스스로도 몹시 참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나가 나만 봐주질 않으니까.”

뭐? 갑자기 손발이 퇴화될 것 같은 말에 레이나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트리버가 말을 이었다.

“나만, 나랑만 지냈으면 좋겠는데, 레이나가 그렇지 않으니까. ……나보다 저놈을 더 좋아하니까!”

뭘 잘했다고 로스틴을 향해 윽박을 내지른 트리버가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마법을 날렸다.

그에 로스틴이 불길이 몸에 닿기 직전 서둘러 검을 휘둘러 이를 소멸시켰다.

마법이라고 만능은 아니었다. 강한 힘을 가진 검사라면 검기로 마법을 튕겨 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인지 더더욱 분노한 트리버가 마력을 키웠다.

“으, 으아아악!”

“사, 살려 줘!”

“도망쳐!”

전투 능력이 없는 신관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개중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대신관을 대피시키려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에 반해 성녀를 도우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마왕을 어떻게든 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도망치기 급급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생과 현생에서 익히 겪은 일이었기에, 성녀는 이런 일로 상처받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을 이곳에 붙들어 두는 존재들을 드디어 알아내, 빨리 상황을 해결하고 자유의 몸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신성한 빛!”

틈을 노린 성녀가 전력을 다하여 신성 마법을 사용하자, 이를 정통으로 맞은 트리버가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그가 레이나의 마력과 대신관의 마물을 흡수하여 방대한 힘을 가졌다고는 하나, 레이나와 로스틴, 세라까지 3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몸에 타격이 오자 정신이 흔들렸다. 레이나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녀와 대치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트리버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러려고 힘을 키운 게 아닌데……!’

레이나와 돈독한 관계를 쌓은 로스틴이 밉고 싫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녀와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로스틴을 비롯한 떨거지들을 떨어뜨리기만 하면 되는데, 왜 굳이 레이나까지 적으로 돌려야 하는지 트리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내 말을 들어라!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다고 레이나를 다치게 하긴 싫어.’

- 이제 거의 다 끝나 가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트리버가 목소리와 대치하는 사이, 대신관이 레이나를 공격했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음산하고 칙칙한 어두운 마법에 놀란 레이나가 반사적으로 방어막을 쳤다.

재빨리 대응한 덕분에 대신관의 마법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렇다고 의문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뭐야, 이거? 왜 새카매?!”

검은색 마법을 쓰는 자는 마왕뿐이라고 그렇게 장담하더니, 어째서인지 여기저기서 검은색 마법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이를 사용한 이가 다름 아닌 대신관이었다.

“대신관님……?!”

성녀가 충격에 휩싸였다. 로스틴의 눈도 파르르 떨렸다.

“마물을 소환한 것도 모자라서 검은색 마법까지 사용하다니, 신탁의 마왕은 레이나가 아니라 대신관, 네놈이었군. ……루카의 저주가 풀렸던 것도 역시 우연이 아니었어.”

제국을 천 년이나 괴롭혔던 마물 역시 그러했다. 트리버 또한 마물을 소환하긴 했으나,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아직 몇 달밖에 살지 못한 트리버가 천 년 동안 제국에 계속 마물을 보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반면 대신관은 달랐다. 그는 언제일지도 모를 까마득한 옛날부터 살아왔고, 늙지도 않았다.

마물이 나타날 위치를 정확하게 예언하는 것도, 신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마물을 부르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모두 맞아떨어졌다.

그러니 되든 안 되든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아야 정상이거늘, 대신관은 해명 대신 다시금 레이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뭘 하고 있습니까? 어서 본분을 다해 마왕을 해치우십시오.”

심지어 함께 공격하자며 성녀를 재촉했다.

그러나 현재 성녀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관이 수상하다는 의심은 했지만, 설마 검은 마법까지 사용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이래서야 진짜 마왕은 대신관이라고밖엔 볼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신탁을 언급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신탁에서 일컫는 모든 조건이 대신관과 부합했다.

성녀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이, 레이나가 대신관의 공격에 맞섰다. 로스틴의 검 역시 대신관에게 향했다.

머릿속에서 목소리와 씨름을 하던 트리버 또한 레이나를 공격한 대신관을 적으로 확정하곤 손바닥에 불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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