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34화
“대신관은 깨어날 기미가 없는가?”
황제의 물음에 성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전혀 차도가 없습니다…….”
“허어, 어찌 이런 일이…….”
대신관을 전적으로 믿는 자신마저 의문을 가질 정도의 일이니, 어서 일어나서 변명이든 뭐든 해 주었으면 하거늘.
신전의 힘은 절대적이지만, 이는 전적으로 신전과 대신관을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무후무한 능력을 가진 성녀의 존재도 컸으나, 힘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레이나나 로스틴같이 다른 방식으로 강한 자들도 있었기에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었다.
결국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신관이었다.
언제부터일지 모를 아주 예전부터 변함없는 외모를 지닌 그를, 사람들은 신의 사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십이 다 되어 가는 황제가 기억하는 한, 대신관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늘 똑같았다.
선대, 선선대 황제 또한 그리 말했고, 황실에 내려오는 역사서에도 대신관에 대해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는 불멸의 존재임이 확실했다.
그런 대신관에게 불순한 의혹이라니. 이는 세상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신의 존재 그 자체에 의문을 갖는 자가 나타날지도.
그도 그럴 것이,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의 말을 전한 것은 대신관 혼자였으니, 그의 부정은 신의 부정과도 다름없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하루빨리 벗어야 할 의혹이었다. 이대로 불신이 가중된다면 신전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은 제국의 황실에도 타격이 올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의혹을 벗지 못한다면…….’
신전과 대신관이 제국과는 무방하다는 변명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리라.
한번 의혹이 생긴 이상, 언제 또 다음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침음하며 사람들에게 물러가라 손짓한 황제가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진실이 무엇이든, 일단 빠져나갈 방법부터 생각해 내야 했다.
*
신전에 도착한 황태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어째서인지 이동석을 지키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동석을 통해 신전을 방문하는 자는 최소 고위 귀족이었기에, 이동석 옆은 늘 누군가가 지키고 있었다.
때문에 또 어떤 머저리가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바들바들 떨며 심기를 거스를까 나름 기대했는데, 아무도 없다니 괜스레 기분이 나빴다.
가뜩이나 짜증이 났는데, 기분까지 더러워진 황태자가 성큼성큼 신전 중앙 홀로 향했다.
‘왜 아무도 없지?’
이상하게도 홀까지 가는 내내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다.
누가 되었든 좋으니 지나가다가 만나면 분을 조금 풀고 갈 생각이었는데, 십여 분을 걸었음에도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사이에 대신관이 뒤지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래서 다들 놈의 옆에서 꺼이꺼이 눈물이라도 짜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쉽게 죽을 위인은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황태자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대신관의 방에 가까워지자 여러 명의 곡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신전의 모든 신관이 모이기라도 한 듯, 활짝 열린 그의 방 앞에 눈물을 훔치는 신관들로 빼곡했다.
“대, 대신관님……!”
“대신관님!”
‘진짜 죽은 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놀란 그가 서둘러 대신관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신관!”
그러자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던 대신관이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태연한 얼굴이었다. 안색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설마 전하를 부르셨습니까?”
대신관이 묻자, 신관 전원이 퍼뜩 놀라 자신은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대체 뭘 하러 왔냐며 대신관이 황태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걱정을 할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오히려 박수를 치면 쳤지, 걱정하며 방문할 사이는 아니었다.
“며칠이나 깨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죽었는지 확인하러 왔는데, 안타깝게도 살아 있었군.”
“비웃으러 오신 거였군요.”
그럴 줄 알았다며 대신관이 낮게 웃었다. 일주일도 넘게 쓰러져 있던 주제에 기분이 퍽 좋아 보였다.
“세간에 어떤 소문이 떠도는지도 모르고 아주 신이 났군.”
그에 황태자가 비아냥을 감추지 않았다.
방금 막 깨어나 옷을 입고 있던 참이라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대신관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에 대한 소문인가요?”
“깨어나자마자 곧장 들었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인데, 모르는 걸 보면 주변 놈들이 네게 좋은 말만 하나 보군.”
이에 대신관이 눈짓하자, 지척에 있던 고위 신관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상황을 전달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대신관이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곤 혼잣말했다.
“그래서 신께서 제게 그런 신탁을 내리셨던 거군요.”
“서, 설마 쓰러져 계신 동안 신탁을 받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오오오오! 신관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신관을 전적으로 믿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세간의 소문을 해명할 수도 없어서 마음을 졸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신탁을 받았다니. 역시 대신관은 신에게 선택받은 자였다. 이렇게 위기에 맞춰서 해답을 주시니 말이다.
“어떤 신탁이지?”
신탁을 받았다는 말에 황태자가 호기심을 보였다. 분명 제 좋을 대로 받은 신탁이겠지만, 어쨌든 돌파구가 있다는 말로 들렸기에 그 내용이 궁금했다.
그에 대신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이번에 받은 신탁은 조금 특별했다. 아니, 정확히 신탁은 아니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 대신관은 조금 신비로운 공간에 다녀올 수 있었다. 텅 빈 새하얀 공간이었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신탁이 무수하게 펼쳐져 있었다.
개중에는 대신관이 보지 못했던 신탁도 존재했다. ‘마음에 드는 남주 후보를 한 명 골라서 함께 신년회에 참석하세요!’나, ‘티파티를 준비하고 남주 후보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세요!’ 같은 뜻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이 대다수였다.
대체 이것들이 뭘까. 신탁의 파도에 갇힌 대신관은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선택지를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신탁 하나를 실수로 만지게 되었다.
[최종 보스의 힘이 너무 강력합니다! 파티원 중 한 명을 희생시켜 틈을 노리세요!]
동시에 주변을 무수히 둘러싸고 있던 선택지가 소멸하더니, 여러 명의 이름이 대신관의 눈앞에 나타났다.
[케일란 모어]
[아덴 크로니클]
[레오]
[조슈아 록펠러]
.
.
.
[테오도르 대신관(모든 남주 후보들의 루트를 클리어해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떠오른 이름 중에는 대신관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신관은 홀린 듯 저도 모르게 자신의 이름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놓인 신탁이 사라지고 새로운 신탁이 나타났다.
[축하드립니다! 팀원 테오도르 대신관을 희생해서 최종 보스를 물리쳤습니다! 마지막을 함께할 남주 후보를 고르세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또다시 나타난 선택지를 눈앞에 둔 대신관이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어느새 선택지가 사라지고, 다시 처음처럼 수많은 신탁이 눈앞을 둘러쌌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눈을 끔뻑이던 대신관은 다시금 신탁을 건드려 보았다.
그 뒤,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신탁을 만지자마자 내용이 이어지는 듯한 또 다른 신탁이 나타났고, 마지막엔 동료 한 명을 희생하여 틈을 노리라는 선택지가 나타났다.
개중에는 레벨이 부족하여 동료들과 함께 희생하여 최종 보스를 물리치라는 신탁도 있었다.
그렇게 모든 신탁을 눌러 본 대신관은 신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까닭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이나라는 뜻밖의 방해물 때문에 망가져 버린 세상을 원래대로 돌릴 방법을 찾으라는 깊은 뜻이 분명했다.
쓰러져 있던 동안 본 신비로운 상황을 떠올리며 대신관이 입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희생이 필요하다는 신탁이었습니다.”
“희생이라니, 그게 무슨-”
그게 무슨 말이냐며 황태자가 물으려던 때였다. 대신관의 푸른 눈이 기묘한 색으로 빛났다.
그 뒤, 곧장 쿠우웅! 귀가 먹어 버릴 것처럼 거대한 소리와 함께 신전이 온통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중심을 잡지 못한 황태자가 비틀대며 벽을 짚었다. 창문 근처에 있던 신관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마, 마, 마물이! 마물이!”
“마물이라고?!”
놀란 신관들이 간신히 중심을 잡고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자 정말 창밖에 끝없는 마물 무리가 소환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 어떻게 대신관님께서 깨어나시자마자……!”
소문에 기름이라도 붓듯 하필이면 지금 마물이 나타날 수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신관이 사색이 되어 대신관을 돌아보았다.
마물을 목격한 다른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라고 갖은 해명을 해도 부족한데, 이제 어쩌냐며-아니, 정말 소문이 사실인 건 아니냐는 듯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정말 마물을 소환한 게 너인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황태자가 대신관의 멱살을 쥐었다.
그에 대신관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런 건 이제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성녀는 어디에 있죠? 신께서 마지막을 알려 주셨으니, 모든 걸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