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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99화

“이게 뭐야? 나한테 주는 거야?”

장미 한 송이와 편지라니, 꽤 로맨틱했다.

물론 상대는 열 살짜리 아이였고, 편지가 아니라 초대장이라고 했지만-그럼에도 레이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귀엽기도 하지.’

형과는 전혀 다르게 생겨서 그런가. 귀엽기 그지없었다. 꽃향기를 한 번 맡은 그녀는 곧장 초대장을 확인했다.

[성인식 초대장]

그러고 보니 마을 축제 때 로스틴이 성인식이 열릴 거라고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났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였구나. 두 번의 삶을 살면서 처음으로 받게 된 성인식 초대장이었다.

잊지 않고 챙겨 준 로스틴에, 레이나의 마음이 괜히 두근거렸다.

‘뭘 입고 가지? 머리는? 이번에는 한껏 꾸미고 가도 이상하지 않겠지?’

부디 지난번 축제 때와 같은 불상사는 없어야 할 텐데. 일전에는 너무 수치스러운 나머지 접싯물에 코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도중 이상한 점이 하나 떠올랐다.

그의 성격대로라면 초대장 정도는 직접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픈 동생을 시키다니 상당히 의외였다.

‘겉으로는 딱히 아파 보이지는 않지만.’

대체 무슨 저주에 걸린 거지? 여기까지 혼자 마차를 타고 왔을 정도면 중병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정신적인 병일 수도 있고.

쑥스러운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루카를 물끄러미 훑던 레이나는 이내 자신이 손님에게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곤 서둘러 안으로 초대했다.

“일단 들어올래? 마침 아침을 먹으려던 참이었거든. 디저트까지 먹고 곡창 지대로 갈 예정이니까, 시간이 된다면 함께 먹자.”

미아의 음식이라니, 거절할 리가 없었다. 아니, 오늘은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모두 누리려고 온 것이었기에 이쪽에서 먼저 부탁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응.”

루카는 곧장 레이나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디저트를 먹은 적은 많았지만 식당에서 정식으로 밥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기대에 잔뜩 부푼 마음으로 식당에 도착하자, 불행히도 딱히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있었다.

‘나 말고 또 조막만 한 놈.’

펠릭스였다.

새 얼굴의 등장에 펠릭스가 눈을 반짝였다. 내내 공작저에서만 지낸 아이는 새로 접하게 된 모든 것이 다 재미있기만 했다.

“어! 손님인가요?”

“응, 맞아. 윈터스노우 공작의 동생이래.”

루카를 알아본 체이스가 깜짝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루카 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초대장을 주러 왔대.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겸사겸사 같이 식사하게.”

레이나가 손에 든 성인식 초대장을 흔들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체이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드리웠다.

아니, 저걸 왜 루카 님이 가지고 오신 걸까. 로스틴 님께서 손수 공녀님께 전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셨던 것 같은데.

후에 알고 당황할 주군의 얼굴이 눈에 훤했다.

“그, 그러셨군요…….”

한편, 저택 사람들은 뒤늦게 아이의 정체를 깨닫곤 공손히 예를 차렸다.

“아이고, 루카 님!”

“세상에, 몸은 괜찮으셔요?”

안부를 묻는 것은 덤이었다.

그렇다는 듯 루카가 눈을 깜빡여 대답을 대신하니, 다들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뜻밖의 손님인 루카까지 모두 착석하자, 곧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들 고정석이 있었기에 필연적으로 새로 온 루카와 펠릭스는 나란히 옆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몹시 바른 펠릭스의 자세에 루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족인 자신보다 꼿꼿하고 우아한 태도였다. 괜히 민망해진 루카는 엉망진창으로 대충 앉아 있던 자세를 고쳤다.

“음식은 어때? 입에 맞아?”

레이나가 기대하며 두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제저녁에 이어 함께 식사를 하게 된 펠릭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대답했다.

“네! 오늘도 엄청 맛있어요!”

루벨라이트 공작저의 주방장보다 실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루카 역시 의외라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다행이네, 둘 다 입맛에 맞다니. 당연한 일이지만.”

디저트만 맛있는 게 아니었구나. 맛도 맛이었지만,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좋았다.

늘 방에 틀어박혀서 혼자 조용히 식사했던 때와는 달랐다. 다들 얼굴에 생기가 넘쳤고, 즐겁다는 듯 크게 웃기도 했다.

‘매일 여기에 와서 같이 먹고 싶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괜히 자신처럼 매일 혼자 식사할 형이 떠올랐다.

저주에 걸린 뒤로 성격이 꽤 삐뚤어진 터라, 루카는 인간이 된 날에도 제 형과 식사했던 기억이 손에 꼽았다.

형에 대한 생각에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진 루카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무리 진수성찬이 눈앞에 있다고 해도 입맛이 없으면 먹을 수가 없었다.

이를 옆에서 유심히 보던 펠릭스가 제 몫의 감자 샐러드를 루카에게 밀어 주었다.

“……? 뭐야? 왜 네가 먹던 걸 나한테 줘?”

의아하여 묻자, 펠릭스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아! 먹던 거 아니에요. 손도 안 댔어요. 감자 샐러드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드시라고요.”

불행히도 정답이었다. 축제에서도 감자만 조졌을 정도로 루카는 감자를 가장 좋아했다.

‘그렇다고 굳이 자기 몫의 음식을 나한테 줄 필요는 없는데.’

맞은편에 앉은 케일란은 벌써 세 그릇째 음식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 먹고 싶으면 새로 달라고 하면 그만이거늘…….

작게 고개를 끄덕인 루카가 펠릭스의 감자 샐러드를 한입 먹었다.

‘……생각보다 나쁜 놈은 아닐지도.’

그에 펠릭스가 배시시 웃었다.

루카는 왠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감자 샐러드에 집중했다.

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레이나가 또래다 보니 금방 친해진 모양이라며 방긋 웃었다.

*

식사를 끝내고 돌아갈 줄 알았던 루카는 레이나와 함께 곡창 지대에 가겠다고 조르고 또 졸랐다.

“정말 괜찮은 거야? 피곤하진 않고? 아픈 곳은? 성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로스틴이 걱정하지 않을까?”

아픈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심지어 남의 아이라서 그런지 레이나의 걱정이 산더미였다.

“괜찮아. 오늘은 밖에 나가도 되는 날이라서 나온 거고. 그렇지?”

루카가 제 뒤에 멀뚱멀뚱 선 마부에게 물었다.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마부는 로스틴이 루카의 행동에 제약을 거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카가 사람이 되는 날은 극히 드물었다. 한 달에 한 번꼴이었다.

때문에 로스틴은 루카가 사람이 되는 날만이라도 자유롭게 지내라며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레이나의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먼 거리를 이동하는 거라서 좀 걱정인데…….”

전생에 몸이 아팠던 그녀였기에, 아픈 아이는 아주 작은 계기로도 금세 상태가 안 좋아질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공녀님이 옆에 계시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이를 펠릭스가 커버했다. 루카를 변호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정말로 레이나가 옆에 있으면 만에 하나 몸 상태가 안 좋아져도 금방 의사에게 데려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아군의 등장에 눈을 댕그랗게 뜬 루카가 펠릭스를 보았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펠릭스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매사에 까칠하기만 하던 루카가 눈동자를 굴리며 뺨을 긁었다.

“흠, 알겠어. 그 대신 그쪽이 로스틴한테 말 좀 전해 줘. 곡창 지대에 있을 테니 시간 나면 들르라고.”

레이나가 루카의 마부에게 말했다.

이동석을 사용하여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기에, 번거롭게 마부까지 함께 데려갈 수는 없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되도록 일찍 올게.”

그리하여 레이나는 루카와 펠릭스의 손을 잡고 곡창 지대로 향하게 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덴이 데려왔다. 자신 외에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그녀가 새삼스레 안도했다.

사람이 되는 시간은 고작해야 하루였기에, 북북서 근처밖엔 가 본 적이 없는 루카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았다.

경계를 넘어 동부로 넘어가 보기도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북부 이외의 땅을 밟게 된 아이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몸을 숙여 흙을 매만졌다.

“신기해…….”

사실 북부와 크게 다른 건 없었으나, 다른 지역이라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뭔가 특별한 느낌이었다.

근처에서 이를 목격한 펠릭스가 루카에게 다가가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북부와는 조금 다르죠? 동부는 비가 적당히 내리고, 따뜻한 날씨거든요. 공작저 근처는 숲도 울창해요.”

그래서 작물이 잘 자랐다. 동부가 북부에 작물을 대량으로 수출하는 것도 그 덕분이었고.

“나중에 몸이 더 괜찮아지면 같이 동부에 놀러 갈래요? 사실 저 동부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재미있는 곳도 많이 알아요.”

처음으로 동년배에게서 함께 놀러 가자는 권유를 받은 루카가 잠시 눈을 깜빡이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몸이 더 괜찮아지면.’

과연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사정도 모르고 눈앞에서 해맑게 웃는 소년과 함께 동부의 이곳저곳을 놀러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응.”

얼굴을 조금 붉힌 루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꽤 귀여운 친구라고 생각한 펠릭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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