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92화
레이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주일 만에 깨어났더니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개중 가장 시급한 것은 세수였다. 세숫물을 기다릴 여유도 없이 제 발로 욕실에 가서 시원한 세안을 마친 그녀가 다음으로 중요한 볼일을 처리했다.
“미아! 나 양 완전 많이 줘!”
“예! 공녀님!”
당연하게도 식사였다.
잠을 자는 사이에 미음이나 수프 같은 것을 입에 넣어 주었다고는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뭐라도 입에 쑤셔 넣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평소의 두 배나 더 먹어 치운 레이나가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배를 두드렸다.
사실 이 정도 배고픔이면 세 배는 먹어야 마땅한데, 일주일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된 탓인지 그 이상은 몸에서 받아 주지 않았다.
어쨌든 시급한 일들을 모두 처리한 뒤에야 감옥에 갇혀 있는 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만나야 한다고 아우성이라니, 줘 패기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뜻밖에도 그 반대였다.
“부디 부하로 삼아 주십시오!”
“……갑자기?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많은 건데?”
부하로 받아 달라며 무릎을 꿇은 수많은 대머리들을 보며 레이나가 아연실색했다.
하나, 둘, 셋, 넷, 열…… 족히 오십은 되어 보였다. 반짝반짝 대머리들에 불꽃이 반사되어 괜히 눈이 시렸다.
얼마 전부터 저택에 침입하려 한 놈들이 꽤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아니, 분명히 이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잠이 든 사이에 꽤 늘었어. 마왕이 여기저기 나타나서 여기가 은신처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 멍청한 놈들.”
케일란이 두꺼운 철문을 발로 차며 말했다. 그래서 자신이 톡톡히 교육했다는 말도 함께였다.
레이나가 북부 미궁은 물론, 서부 던전과 황실의 마물들까지 모두 없앴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덤으로 몇 대 패서 정신 교육까지 싹.
그리하여 강한 자에 대한 존경과 숭배하는 마음만이 남은 죄수들이 자청해서 레이나의 부하가 되기로 마음을 먹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레이나에게 그런 사소한 일은 알 바 아니었다.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잠깐만, 그럼 얘네 식사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식사는 어떻게 충당한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아주 죽는 줄 알았다고. 미아가 최대한 간단히 조리할 수 있는 대량의 음식을 만들긴 했지만, 종일 요리만 했다니까?”
자신 역시 손이 부르터라 계속 설거지만 했다며 케일란이 툴툴거렸다.
그는 안나 또한 죄수들의 옷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고도 일러바쳤다.
그것에 대한 자각은 있었던 모양인지, 죄수들이 머쓱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수많은 민폐를 끼쳐 놓고, 부하로 받아 달라고? 제정신이야?”
흉흉한 검은색 기운을 일렁이던 레이나가 힘을 방출하며 저택 밖을 가리켰다.
“부하고 나발이고. 너희들 전부 당장 여기서 다 꺼져.”
그 바람에 모처럼 큰돈을 들여 지은 감옥이 개박살이 났다.
조금 마음이 쓰렸지만, 어차피 이제 더는 사람을 가둘 일이 없을 테니 괜찮았다. 괜한 놈들에게 아까운 음식과 천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고.
“뭐 해? 당장 나가지 않고.”
사색이 된 죄수들의 한가운데에 뜨겁고 커다란 불꽃 덩어리 하나를 던진 레이나가 저택 밖으로 몸을 돌렸다.
“히익!”
“으악!”
갑자기 나타난 뜨거운 불꽃에 죄수들이 혼비백산 흩어졌다.
죄수들을 처리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정문 앞에 모인 수백의 사람들이었다.
“어어어! 공녀님이시다!”
“고, 공녀님!”
“루벨라이트 공녀님!”
그냥 근처까지 다가가기만 했는데, 레이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반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공녀님! 뒤늦게 인사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일전에는 마물을 없애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공녀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는데……! 검은색 마법을 사용하시는 걸 보고 괜한 두려움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서부에서는 진작에 감사 축제까지 열었다던데……. 저희가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니 부디 북부를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부, 북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잠이 든 사이에 소문이 아주 가지가지 퍼진 모양이었다. 가짜 마왕이 여기저기서 설치고 다닌 덕분인 것 같았다.
어차피 딱히 북부를 떠날 생각일랑 없었기에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이자, 뒤따라와서 눈치만 보고 있던 죄수들이 북부 사람들의 말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예! 맞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갑자기?
뭘 어떻게 돕고 열심히 하겠다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꾸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 반질반질한 머리에 빛이 반사되어 눈이 아팠다. 안 보이는 곳으로 꺼져 주는 게 제일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너흰 얼른 안 꺼져?”
레이나가 어림도 없다는 얼굴로 선을 긋자, 죄수들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시무룩해졌다.
흥, 내 이럴 줄 알았지. 만족스러운 결말에 케일란이 죄수들을 비웃었다.
“너희들 때문에 다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청소에, 빨래에, 바느질에, 식사 준비에……. 얼마나 할 일이 많았는 줄 아냐고. 쌤통이다!”
그러니 분노하며 씩씩대야 마땅하거늘, 어째서인지 몇몇 죄수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청소…….”
“빨래……?”
“설거지?”
“저 그런 잡일 잘합니다! 부모님이 저만 시키셨습니다!”
죄수 중 한 명이 케일란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두 번이나 매몰차게 거절한 레이나는 더 이상 공략할 수 없으니, 행동 대장처럼 보이는 그라도 어떻게 구워삶아 보겠다는 듯.
“뭐, 뭐야! 이거 안 놔?!”
“케일란 님! 부디 저를 부하로 받아 주십시오! 급여는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거지는 제가 도맡겠습니다!”
“저는 청소에 자신이 있습니다!”
“전 농사도 가능합니다!”
대머리들이 하나둘 손을 들고 일어나 자신의 장점을 어필했다.
다른 거라면 모르겠는데, 농사도 가능하다는 대머리의 외침에 레이나의 한쪽 눈썹이 삐죽 움직였다.
“아니, 이 대머리들이! 야! 난 그런 권한 없다고! 그리고 필요-”
“네 마음대로 해.”
필요 없다고 말을 이으려고 했는데.
불쑥 끼어든 레이나가 허락에 가까운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고는 북부 사람들의 무리에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대머리들이 케일란을 구세주 보듯 쳐다보았다.
케일란이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그의 손에 막대한 권력이 쥐여졌다.
*
대신관과 함께 황성에서 레이나를 만났던 그날, 울면서 홀로 감옥에서 뛰쳐나온 성녀는 누구보다 먼저 마왕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
새카만 머리카락에 새빨간 눈. 흉흉한 검은 불꽃을 전신에 두른 그는 정말 신탁에서 일컫는 마왕 그 자체였다.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담 위에서 싸늘한 눈으로 성녀를 내려다본 마왕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마물이 나타난 것은 그 직후였다. 그가 손을 뻗자마자 소환진이 생기고 황성은 마물 떼거리에 휩싸였다.
“으, 으아아악!”
“마물이다! 마물이야!”
“사, 살려 줘!”
곧장 죽어 가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러니 성녀답게 빨리 마물들을 해치워야 마땅하거늘.
생각지도 못한 존재를 목격한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얼이 빠져 담 위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대체 왜……?’
그럼 검은 마법을 쓰던 레이나라는 여자는 뭔데……?
거짓말까지 해서 모함했던 그녀가 마왕이 아니라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만인의 앞에서 그녀가 마왕이라며 소리친 적도 있었다.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에도, 레이나가 마물을 부린 게 아니냐며 분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정말 그녀가 마왕이 아니라면, 눈앞의 남자가 진짜 마왕이라면, 자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라는 말인가.
그사이, 한 차례 마물을 불러낸 마왕의 눈이 멀리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번뜩였다.
그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녀가 그에게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을 때였다.
휙-!
아무렇지 않게 휘두른 남자의 손끝에서 검은색 밧줄 뻗어 나와 성녀의 전신을 구속했다.
미동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옥죄임에 성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두 번째 소환진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안 돼……!’
그 뒤,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마왕은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췄다.
그동안 꽁꽁 묶여 바닥에 누운 그녀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비명만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검은색 불꽃이 시야를 뒤덮었다.
순식간에 황성 전체를 뒤덮은 검은 힘은 마물은 물론, 성녀를 구속했던 밧줄까지 모두 녹여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진 그녀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멀리 떨어진 곳에 레이나와 황태자가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는 꽤 되었지만, 모두가 입을 닫고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기에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똑똑히 들렸다.
“미…… 안, 하게 되었다.”
그 안하무인이던 황태자가 레이나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넸다.
모두가 대체 뭘 보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이는 성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 설마 저분이 성녀님이신가……?!”
성녀의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혼잣말했다.
“그, 그런가?! 맞아! 이렇게나 많은 마물을 단번에 해치워 주셨으니까!”
“그래, 맞아! 마왕만 검은 마법을 사용한다는 신탁은 없었잖아?!”
다른 이들이 맞장구를 쳤다.
성녀는 자신이라고 반박해야 마땅한데, 방금 본 게 있어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레이나는 이세계에서 온 자신보다 더 세상을 구할 구원자에 가까워 보였다.
‘그, 그럼 나는 뭐야……? 나는 왜 여기에 온 건데……?’
레이나가 성녀라면, 다른 세상에서 소환된 자신은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쉬지 않고 계속 마물을 물리치며 열심히 레벨을 올렸는데.
당황한 성녀는 갑자기 주인공으로 거듭난 레이나를 떨리는 눈으로 응시하며 자문했다.
그러는 사이, 레이나는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황성을 떠났다.
그 속에는 마왕을 찾겠다며 마물들 사이에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아덴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장면이었다.
자신은 그저 잘해 보려고 했을 뿐인데 오해를 받고, 사람들에게서 배척당하여 홀로 남겨지는 상황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열심히 해도 어차피 같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늘 그랬듯, 모든 것을 회피하며 혼자 지내는 편이 나았다.
이내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그녀가 황성 밖으로 뛰쳐나가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