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71화
[곧 신탁의 마왕이 세상 밖으로 나와 폭주할 예정입니다! 이세계에서 올 구원자와 함께 마왕의 악행을 막아 주세요! (사전 고지 불가)]
깜빡이는 표시는 아직 일을 끝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몇 달 전에 마지막으로 받은 신탁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말이었다.
설마 성녀와 함께 마왕을 막는 신탁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다음 신탁이 없는 것인가.
‘아니, 정확히는 마왕이 폭주하지 않았어.’
마왕의 폭주가 없으니 악행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레이나가 신탁대로 행동하지 않아서, 정해진 운명을 거슬러서 신탁이 기능을 멈추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정말 그 여자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진 거였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신탁이 고지한 대로 일이 진행되게 만들어야 했다.
아직 약하지만 성녀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었고, 마왕의 악행을 막을 의지도 충분하니 남은 것은 하나였다.
‘마왕의 폭주.’
정확히는 폭주한 마왕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생각을 정리하자, 상황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진짜 마왕을 폭주하게 만들 방법은 모르나, 그렇게 보일 만한 방법은 익히 알고 있었다.
대신관이 눈을 감았다. 내면 깊숙이 자리한 신력을 몽땅 끌어 올린 그가 머릿속으로 조용히 상황을 그렸다.
‘제국 전역에 마물 소환진을 만들어서, 내 신력이 바닥날 때까지 마물을 소환한다.’
그와 동시에 정말 대신관이 그린 상황처럼 제국 전역에 마물 소환진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곧장 무수한 마물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급격한 신력 소모에 대신관이 피를 토했다.
“쿨럭!”
이렇게 대대적으로 마물을 만든 것은 처음이었다.
계속해서 신력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대신관이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각혈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피가 흥건한 입매를 손등으로 닦으며 잠시 눈을 감고 기다렸다.
다행히 삼십 분쯤 지나자, 신력이 바닥나서 마물을 만드는 일도 끝이 났다.
현기증은 아직이었지만, 각혈은 멎은 상태였다.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킨 그가 침묵의 방을 나섰다.
“대신관님?!”
“대신관님!”
“헉! 대신관님?!”
방 밖에선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덴과 성녀도 있었다.
그녀가 앞섶이 피로 흥건한 대신관을 보곤 사색이 되어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대, 대, 대, 대신관님……?! 괘, 괜찮으세요?!”
성녀는 서둘러 대신관에게 치유의 빛을 사용했다.
그러나 신력을 전부 소모하여 이렇게 된 것이었기에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대신관은 쓸데없이 마력을 소모하는 성녀에게 이만 되었다며 한 걸음 물러섰다.
“……괜찮습니다. 쉬면 낫습니다. 갑자기 신탁을 여러 개나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라며 한 신관이 다급히 말했다.
“제국 각지에서 마물이 출몰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곳에서 연락을 받다 보니 감히 대신관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성기사들을 보냈습니다……!”
송구하다는 듯 그가 머리를 숙였다.
이에 대신관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습니다. 하필이면 제가 침묵의 방에 들어갔을 때 신탁을 받아 상황이 이렇게 되었네요.”
침묵의 방은 이름 그대로, 안에서 무엇을 하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았다.
밖에 있는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대신관이 종종 찾는 곳이었다.
물론 방금 전처럼 분노를 표출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저 시끄러운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조용하게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찾곤 했었다.
“신탁의 내용만 말씀드리고 저는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곧 쓰러질 것 같거든요.”
그의 안색이 파리했기에 누군가가 의사를 부르러 사라졌다. 어떤 이는 대신관을 부축하기도 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곧 정신을 잃을 것 같았기에 대신관이 서둘러 신탁을 읊었다.
“제국 전역에 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아니,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미 실행된 상태라 다들 알고 있겠지만요.”
쿨럭, 연달아 말을 한 탓에 대신관이 피를 조금 토했다.
“대신관님!”
“아아아……! 대신관님!”
“어떡해……!”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졌다. 자신을 부축한 신관에게 머리를 기댄 대신관이 말을 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마왕의 짓입니다. 남부와 북부로 보낸 마물들을 저희가 너무 빨리 해치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며 신관들이 분노를 토해 냈다.
반면 자신이 본 것과는 상이한 말에 아덴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통스러워하는 대신관에게 정신이 팔린 성녀만이 모순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니 부디 피해 지역들을 최대한 많이 도와주세요. 무력은 물론, 구호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지원도 필요할 겁니다.”
말을 잇던 대신관이 성녀를 보며 미약하게 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녀님의 힘이 도움이 되겠지요.”
그걸 끝으로 대신관이 눈을 감았다. 정말 기절한 것은 아니고,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요점만 쏙쏙 말해 준 대신관 덕분에 할 일이 명확했다.
아직 신전에 남아 있던 성기사들이 빠른 무장을 마치고 제국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잡일이라도 돕겠다며 여러 가지 물품을 챙겨 전쟁터로 향했다.
“대신관님……! 저 열심히 하고 올게요! 그러니 부디 건강하게 회복하셔야 해요……!”
훌쩍이며 눈물을 훔친 성녀가 대신관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자신이 눈을 감고 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귀찮았다. 더는 그녀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기운이 없었다.
*
그리하여 신전의 모두가 마물을 처치하러 제국 전역으로 흩어졌다.
대신관이 신력을 쏟아부은 효과가 있었는지, 다들 엄청난 수의 마물에게 습격당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는 레이나가 뿌리내린 북부도 마찬가지였다.
막 게임이 끝난 직후, 다시금 몰려든 마물 떼에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공작 성으로 피신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베로니카가 탄식했다. 그녀는 남편, 아들과 함께 공작 성 홀 구석에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집사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려움에 휩싸여 서로의 손을 잡고 오들오들 떨었다.
마물들이 나타나자마자 레이나가 다시 해치우긴 했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공작 성 주위의 마물들을 해치운 레이나는 다른 곳도 둘러보겠다며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로스틴 역시 마찬가지인 상태였기에 더더욱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니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어도 모자라거늘.
함께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트리버에 집사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어어! 트리버! 위험하게 혼자 어딜 가는 거야?”
돌아선 트리버의 얼굴에 무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대답하기 퍽 곤란하다는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아, 혹시 화장실에 가는 건가?”
끄덕끄덕.
“조심해서 빨리 다녀와야 해. 공녀님께서 외출 중이시라서 아주 위험하니까. 알겠지?”
이제 성인의 모습이 된 트리버였으나, 얼마 전까지 아이였던 탓에 어르고 달래는 말투였다.
그럼에도 딱히 개의치 않아 한 트리버가 알겠다며 방긋 웃었다.
물론 그의 목적지는 화장실이 아니었다. 홀을 벗어나 복도를 걷던 그는 제일 처음 마주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공작 성을 벗어났다.
순식간에 허허벌판으로 걸어간 그는 허공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냄새를 맡았다.
“-!”
그러다가 무언가를 찾았는지 트리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달려갔다.
한참을 내달리던 그의 걸음이 멎은 곳은 아직 퇴치당하지 않은 마물들이 모여 있는 숲이었다.
“캬아악!”
“케에에엑!”
공격 대상을 찾은 야수형 마물들이 거칠게 포효하며 트리버에게 달려들었다.
개중 제일 빠른 한 놈이 트리버를 향해 날아올랐다.
한껏 세운 날카로운 발톱이 그를 공격하려고 했을 때였다. 마물을 향해 트리버가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마물이 검은색 연기가 되어 트리버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놀란 마물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캬, 캬악?!”
“흐음, 뭐로 만든 거지? 맛이 별론데. 너무 떫어.”
입술을 혀로 적신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이나는 이런 맛이 아니었는데. 더 달콤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는데.”
그녀의 마법은 늘 신비로운 맛이 났다.
목에 건 고리에서도, 손목과 발목에 찬 고리에서도 늘 생기 넘치는 신선한 맛이 났다.
반면 눈앞의 마물들은 맛없고 텁텁했다.
재료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위가 좀 상하기도 했다.
‘맛은 없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항상 맛있는 것만 먹을 순 없으니까.’
가끔은 불량 식품을 먹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품평을 마친 트리버가 다시 식사를 시작하려 붉은 눈을 빛냈다.
“케엑!”
“캬아악?!”
본능적으로 눈앞에 있는 존재가 자신들을 학살할 포식자라는 것을 느낀 것인지 마물들이 뒷걸음쳐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몸을 움직인 트리버가 마물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