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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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외출을 한 탓에 레이나는 한동안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자게 되었다.
사실 그 뒤에도 몇 번 서부에 다녀왔다.
따져 보면 똑같이 피해를 입었는데, 지역이 다르다고 차별하는 것은 너무 지역감정(?)에 따른 논리였다.
‘애초에 나는 이 세상 사람도 아니고?’
저세상이라고 하기엔 조금 표현이 이상했지만, 어쨌든 한쪽에 소속감을 갖고 북부나 서부를 차별할 이유가 없었다.
괜히 자꾸 눈에 밟혀 찝찝한 것보다야 마음 편하게 도와주는 것이 나았다.
때문에 오늘도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일어난 레이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저택 본관을 나섰다.
“……다들 좋은 아침.”
“호호, 좋은 아침입니다, 공녀님.”
“저희는 점심도 먹은 참인데, 배고프셔서 어째요.”
앞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까르르 웃으며 레이나에게 늦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일을 하러 왔다가 갑자기 마물들에게 공격당해 벌벌 떨었던 인부들도 안정을 찾고 그녀에게 인사했다.
베로니카의 도움으로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연락도 받아 표정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공녀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어? 공녀님 일어나셨어요? 곧장 식사하실 수 있도록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미아는 식사를 차리러 부리나케 주방으로 사라졌다.
햇빛은 따사롭고, 사람들은 안정을 찾았고, 더는 마물도 나오지 않았다.
곧 맛있는 음식도 먹을 예정이었다. 아침을 걸렀으니 평소의 두 배를 먹을 생각이었다.
‘좋아. 이런 게 바로 내가 추구하던 안락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레이나는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켰다.
그때, 앞마당을 청소하러 나오다가 그녀를 발견한 케일란이 한껏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걸었다.
“야, 너 힘 너무 많이 쓴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많이 자? 지난번에 마물 좀 해치웠다고 힘 다 털린 거 아니지?”
오늘따라 저놈의 시비도 썩 괜찮게 들렸다.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적합했다.
“음,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아.”
“……뭐 잘못 먹었냐?”
아니, 이제부터 아주 잘 먹을 예정이었다. 디저트까지 한 번에 싹 먹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펑!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저택 위 허공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레이나는 반사적으로 머리 위로 불꽃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화르륵! 불타는 무언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악!”
퍽!
꽤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에 몸과 지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두피가 여실히 드러난 남자가 헐벗은 채로 바닥을 뒹굴었다.
이를 무심하게 내려다본 레이나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나는 평화가 찾아온다는 말을 왜 했을까?”
전부터 그렇게 많이 겪어 놓고 말이다. 행운이 이렇게나 높은데도 징크스는 이겨 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속으로 눈물을 훔친 레이나가 뭘 잘했다고 아직도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발끝으로 쿡쿡 찔렀다.
“자, 목적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고. 네가 누군지는 관심이 없고 싸워 봤자 너만 손해이니, 이제 그만 일어나서 거적때기 주워 입고 집에 가렴.”
하도 같은 패턴이 반복되어서 그런지 상대하는 것도 귀찮았다. 변명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썩 물러나라며 헐벗은 남자를 다시금 발끝으로 찌르는데, 이상하게 남자가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다.
“으, 으윽……. 아악……! 이, 이 마왕 놈……!”
“얘 왜 이래? 나 털만 벗겼는데……?”
설마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 아니, 그런 연약한 몸이라면 애초에 왜 위에서 저택에 침입할 생각을 한 건데.
“어?! 피, 피! 피가 나요! 이 사람!”
“어어어?! 많이 다쳤는데요?!”
온실에서 일하는 여인들이 남자의 몸을 살피며 경악했다.
몸을 뒤집자, 정말 복부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 집사! 케일란! 미안한데 빨리 방으로 옮겨 줘!”
“예, 예! 공녀님!”
“어, 어!”
이름을 불린 두 사람이 서둘러 남자를 방으로 옮겼다.
베로니카와 여인들은 따뜻한 물과 깨끗한 수건을 가져와 상처를 닦았다. 상처에 잘 듣는 약초도 잔뜩 빻아서 발라 주었다.
“내, 내 배에 뭘 바른 거지……?! 이 쓰레기 같은 마왕 놈, 으윽!”
……약초라고.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비싸고 효과도 탁월하다는 약초.
이건 대체 무슨 적반하장이란 말인지. 참으로 다행히도 걱정했던 마음이 눈 녹듯 싹 사라졌다.
“너 진짜 웃긴다? 지가 멋대로 침입해서 다쳐 놓고. 약 발라 줘도 난리네, 진짜. 흥.”
밥이나 먹어야겠다며 남자에게서 관심을 끈 레이나가 식당으로 향했다.
케일란이 그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그의 표정이 퍽 진지했다.
“야, 저택 하늘에 뭘 어떻게 해 놨길래 애가 저 지경이 됐냐?”
“하늘에 뭘 설치한 게 아니라, 저택 반경 10미터 내에서 공격성을 띤 생명체가 나타난다면 불에 태우라고 해 놨어.”
“와……. 너 진짜 잔혹하다. 어떻게 사람을 산 채로 태우라고 할 수가 있지?”
본인도 한 번 불에 타 보았으면서 케일란이 괜히 오버했다. 그러다가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그 상처는 불에 타서 생긴 것 같지 않던데?”
“그러니까. 난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어.”
추락해서 생긴 상처 같지도 않았다. 바닥에 뭐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저런 식으로 배가 뚫리는 건 이상했다.
‘꼭 마법으로 공격당한 상처 같았어.’
설마. 레이나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된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행운이 1,000이나 되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아무튼 난 아니야. 난 털만 조졌어.”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뗀 레이나가 식당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식당에는 선객이 있었다. 트리버였다.
“레이나! 같이 아침 먹자.”
“어쩐 일이야? 네가 이렇게나 일찍 일어나고.”
해가 중천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트리버가 무해하게 웃으며 말했다.
“레이나와 함께 아침 먹으려고 일어났어. 먹고 다시 잘 거야.”
“그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착석하는 레이나의 뒤에서, 팔짱을 낀 케일란이 트리버를 노려보았다.
“수상한 놈.”
“……?”
트리버가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대었다. 그러다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배시시 웃었다.
“우이씨! 여우 같은 놈!”
이에 케일란이 분노하며 식당을 박차고 나갔다.
트리버가 지난 며칠간 내내 잠만 잤던 탓에, 정체를 파악하기는커녕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저 자식,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어.”
케일란은 원통했다.
그날, 자신과 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나 싹퉁 바가지가 따로 없더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땐 오만 착한 척을 하고 난리였다.
‘착한 척을 할 거면…… 나한테도 그렇게 해 달라고! 왜 나한테만 싸가지가 없는 거야!’
결론은 그거였다. 차별하지 말라.
개차반일 거면 모두에게 개차반 짓을 하든지, 가식을 떨 거면 모두에게 가식을 떨든지.
왜 사람 기분 상하게 차별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씩씩거린 케일란이 마당 청소를 마저 끝내려 빗자루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뜻밖에도 낯선 마차가 저택 정문을 통과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응? 누구지? 어딘가 익숙한 인장인데.”
케일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마차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 저건!”
어느 가문의 문양인지 깨달음과 동시에, 마차가 그의 앞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누구냐고 물을 것도 없이,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며 안에서 세 명의 사람이 튀어나왔다.
“아덴?”
개중 하나는 아덴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시중을 드는 하인이었고, 마지막 한 사람은 케일란도 연회에서나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서부의 공작이었다.
“아덴 경, 여기가 그 검은 불꽃을 사용하는 자의 저택이라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서부 공작이 검은 불꽃으로 자욱한 저택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높으신 귀족 같기는 한데, 레이나의 능력을 언급하며 저택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정체 모를 인물의 등장에 저택 사람들이 잔뜩 긴장했다.
대체 아군인가 적군인가. 아군이라면 믿기지 않았고, 적군이라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모두가 고민에 빠져 있는데, 손님이 왔다는 소리에 식사를 하던 레이나가 밖으로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오오! 진짜다! 진짜야! 맞아! 저 사람이었어!”
그녀를 발견한 서부 공작이 반색하며 서둘러 달려왔다.
뭐, 뭐야? 갑자기 자신을 향해 질주해 오는 사람에 레이나가 당황했다.
불꽃이 공격하지 않는 걸 보면 공격하려는 마음은 없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아서 손에 불꽃을 만드는데.
와락-! 갑자기 서부 공작이 레이나를 껴안았다.
“……?!”
“드디어 만나게 되었어! 내 구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