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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4화

혹시나 해서 중얼거리자, 그제야 눈을 뜬 마부가 헐레벌떡 품에서 서류를 꺼내 주소를 읽었다.

“위, 윈터스노우 공작령, 아이스베리 마을 북북서 끝, 시, 심연의 저택…….”

심연의 저택이라니. 이름 한번 고약했다.

그게 여기가 아니길 바랐지만, 불행히도 그 고약한 이름은 눈앞의 저택을 빙 두른 담벼락 정문에 똑똑히 적혀 있었다.

“하.”

욕이 혀끝까지 나왔으나, 질겁한 마부를 앞에 두고 차마 내뱉을 순 없었다. 그녀가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너무하잖아? 애초에 왜 이딴 곳에 저택을 지어 놓은 건데.’

어디가 되었든 그동안 갇혀 있던 거지 같은 방보단 낫겠지 싶었는데.

공작가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를 팔아 안락하게 살면 나름 행복하지 않을까 싶었다.

‘금덩이 동상을 포함해 이 정도 가져왔으면 노후까지 큰 문제는 없겠지 싶었건만.’

아니었다.

역시 최악의 끝엔 최최악이, 최최악의 끝엔 최최최악이 기다리는 법이었다.

‘여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 마물도 다 얼어 죽겠네.’

쌩쌩 부는 바람은 잘 벼려진 칼날처럼 드러난 피부를 괴롭혔고, 눈 덮인 대지엔 미생물조차 살지 않을 것 같았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살라는 건데? 아니, 죽으라고 보낸 건가. 아, 맞네. 그거겠네. 제 손으로 죽이기는 무서우니 알아서 죽으라고. 이 천하의 쓰레기 같은 놈.’

이를 가는데 돌연 마부가 눈밭에 무릎을 꿇었다.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처자식이 있습니다!”

이봐요, 아저씨. 죽인다고 한 적 없잖아요. 안 죽인다고 했잖아. 왜 자꾸 사람을 살인마로 몰아가는 건데.

그럴 생각일랑 전혀 없거늘. 틈만 나면 살려 달라고 하니 이건 뭐 죽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흘기다가 문득 열기를 느꼈다.

시선을 내리자 전신에 검은 불꽃이 일렁였다. 그로 인해 주변의 눈이 전부 녹아 있었다.

“……뭐야, 이거?”

설마 무의식적으로 뿜어낸 힘이 눈을 녹인 건가?

시험 삼아 마부의 반대편으로 가볍게 손을 뻗자, 손끝에서 연기처럼 흩날린 힘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일대의 눈을 모두 소멸시켰다.

“허, 헉!”

놀란 마부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레이나 역시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잃었다.

‘……왜 이렇게 센 건데?’

그동안 억제하려고만 했지, 제대로 힘을 써 본 적이 없었기에 이렇게까지 강력한 마법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황한 레이나는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 손과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맨땅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기 싫은데, 공작이 자신을 다짜고짜 유폐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적당히 해야지. 이러니까 애가 배척당하잖아. 아니, 그리고 레이나 얘는 이렇게 대단한 힘이 있었으면 여주고 남주고 뭐고 다 한 방에 날려 버릴 것이지, 왜 지고 산 거야?’

뭐, 이건 사실 이유가 있긴 했다.

레이나가 레벨 999를 찍은 최종 보스였기에, 여자 주인공이 1,000까지 레벨을 올려서 레이나를 죽인다는 내용이었으니까.

날 때부터 레벨 999인 먼치킨 레이나를 뛰어넘기 위해 여자 주인공은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녀야만 했다.

퀘스트를 받고, 몬스터와 싸우고, 등장인물들의 호감도를 얻어 경험치와 좋은 아이템을 얻는 등, 꽤 귀찮은 일을 반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니만큼 그 사이사이에 피어난 남주 후보들과의 로맨스나, 주위의 슬픈 사연을 도와주며 울고 웃기도 했었지.

‘……응? 잠깐만.’

푸념하던 중 뜬금없는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눈 덮인 설원 위로 손을 뻗었다. 아까보다 힘을 대폭 줄여서 불꽃을 쏟아 내자, 작은 방 하나 크기의 눈이 소멸했다.

힘을 좀 더 줄이니 이번에는 한 평 정도의 눈이, 더 줄이니 반 평.

반복해서 미세하게 힘을 줄이다가, 있는 힘껏 줄이자 점 크기의 맨땅이 드러났다.

‘방금 한 말 취소. 이거 완전 대박이잖아? 잘만 이용하면 괜찮겠는데?’

추운 지역에 오게 돼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색이 칙칙해서 그렇지, 능력 자체가 불이다 보니 눈을 녹이고 따뜻하게 지내기에 제격이었다.

‘혹시 온도도 조절되나? 계속 피어오르게 할 수는? 명령을 내리면 된다고 했으니 한번 해 볼까.’

저택을 따뜻하게 데워 줄 벽난로 같은 걸 만들려면 온도와 지속력이 관건이었다.

만약 생각한 대로 불꽃이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지옥이 천국으로 변하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돌파구를 찾은 것 같아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보고 있는데, 지척에서 풀썩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

고개를 돌리자 마부가 쓰러져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파리한 입술로 바들바들 떠는 것을 보니 추위를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자신은 내내 검은 불꽃이 전신을 감싸고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무능력 그 자체인 마부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가엾게도 열심히 마차를 몰고 와 준 말들의 상태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빨리 모두를 데리고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다행히 찾아 나설 필요 없이 눈앞에 적당한 공간이 있었다.

몸을 녹이기는커녕, 들어갈 수도 없도록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이 문제였지만.

‘연습할 시간이 없어. 당장 저택을 녹여야 해.’

그러니까 잘 들어. 힘이 너무 과해서 저택이 불타지 않게, 꽁꽁 얼어붙은 눈만 녹일 거야. 알겠어?

지금까지 모든 것을 파괴만 해 온 검은 불꽃에게 그리 명령한 레이나는 저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저택이 부서져 자신 외의 모두가 얼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망설여졌다.

“으, 으윽…….”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옆에서 괴로워하는 마부가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좋아.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라면, 시원하게 저택이 박살 나는 멋진 모습이라도 보여 주고 죽게 하자.’

귀족의 저택이 산산조각 나는 모습이라니, 저승길 동무로 나쁘지 않은 광경이겠지.

그리 생각한 레이나는 힘을 방출했다.

그와 동시에 손끝에서 꽃잎처럼 휘날린 검은 불꽃이 한차례 저택을 휘감았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정말 박살 난 건 아니겠지. 긴장하며 수증기가 사라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자, 잠시 뒤.

“……!”

얼어붙어 있던 눈은 온데간데없이, 깨끗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런 허허벌판 눈밭에 지은 건지 의문일 정도로 저택은 그럭저럭 괜찮은 모양새였다.

아마도 처음 지을 때만큼은 정성을 들인 모양이었다.

‘좋아. 내 힘. 그리고 나 자신.’

뿌듯함에 셀프 칭찬을 마친 레이나는 재빨리 마차와 말들의 연결을 해제한 뒤, 말 등에 마부를 얹었다.

“너희들, 살고 싶으면 따라와. 죽고 싶으면 남아 있고.”

힘 자체가 센 게 아니라 마법 때문에 쓸데없이 파괴력만 있는 거라 강제로 말들을 끌고 갈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알아서 따라와 줘야만 했다.

“푸르릉!”

다행히 레이나가 위험하지 않다고 느낀 건지, 아니면 말들도 이 방법밖엔 없다고 느낀 건지, 모두 순순히 그녀를 따라 저택 안쪽으로 움직였다.

육중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람이 불지 않아서 더는 죽을 만큼 춥진 않았다.

물론 차게 언 몸을 녹일 수 있을 만큼 따뜻한 것도 아니었다. 마부와 말들의 몸을 녹일 무언가가 필요했다.

“차게 언 몸을 덥힐 수 있는 꺼지지 않는 불이 필요해.”

주문을 외우듯 명령하며 힘을 사용하자 천장에 불꽃이 나타났다.

샹들리에와 엇비슷한 크기의 거대한 검은 불꽃은 명령대로 꺼지지 않고 한참이나 머리 위에서 활활 타올랐다.

‘와, 세상에. 만능이잖아, 이거?’

대체 어떤 멍청이가 저주라고 한 거야? 잘만 사용하면 만백성이 행복하게 살겠는데.

열기를 뿜어내는 불씨 덕분에 실내가 곧 온기로 채워졌다.

이 정도면 얼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너무 따사로워 봄인가 싶을 정도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바닥에 눕혀 놓은 마부의 뺨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네 마리의 말도 퍽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리를 잡아 쉬고 있었다.

레이나 역시 잠시 쉬다가 저택 내부를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걸음을 옮기려는데, 때를 맞춰 마부가 깨어났다.

“여, 여긴……!”

“금방 깨어났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레이나를 발견하곤 기겁하며 다시 애원 모드에 들어갔다.

“사, 사, 사, 살려-”

“살려 줄 테니 그만 좀 해. 한 번만 더 살려 달라는 말을 꺼냈다간…….”

결론을 말하지 않고 말꼬리를 늘리자, 마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일희일비하는 게 재미있기는 했지만, 모처럼 되돌려 놓은 안색이 다시 사색이 되어 갔기에 놀이는 여기까지였다.

“상상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지게 만들어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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