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53화
바닥까지 끌리는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마치 방금 해치웠던 마물을 떠올리게 하는 외형이었다.
“마마……!”
대체 쟤는 뭔가 싶어서 관찰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엄마를 찾은 소년이 갑자기 레이나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황한 레이나가 서둘러 소년을 밀쳤다.
“뭐야, 뭐야, 너? 어디서 나온 거야?”
마물의 잔해에서 나타난 것을 똑똑히 보았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에 저도 모르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마마……!”
그러나 소년은 말을 할 줄 모르는 듯, 밀쳐져 넘어진 상태로 반복해서 엄마만 찾을 뿐이었다.
시선은 계속 레이나에게 닿아 있었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당혹스러운 것은 로스틴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꺼냈다.
“……안면이 있는 아이인가?”
“그럴 리가 없잖아.”
무슨 헛소리야, 그게.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뒤늦게 자신의 말에서 이상함을 깨달은 로스틴이 검을 단단히 손에 쥐었다.
겉은 아이라고 해도, 속은 어떻게 되어 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수상한 점이 포착되는 순간 바로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마마……! 흐흑, 마마아……!”
그러나 아이는 그저 울며 엄마만 찾을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계속 레이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오해할 리 없겠지만, 다시 말해 둘게. 나 쟤 엄마 아니야. 처음 봐. 난 올해 갓 성인이 된 순수한 사람이라고.”
아이가 있다고 순수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레이나는 순수(?)했다.
“알겠다. 공녀의 순수함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지.”
그녀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로스틴이 더는 오해하지 않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의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아이를 관찰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뜻밖의 물건이 있었다.
“잠깐만, 저거 이동석 아니야?”
아이의 손에는 소형 이동석이 쥐어져 있었다. 마물만 공격하라고 해서 그런지, 다행히 이동석은 파괴되지 않은 상태였다.
“너, 그거 이리 가져와 봐.”
레이나가 아이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불행히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에 그녀가 이리 오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보디랭귀지는 남녀노소, 만국 공통인 모양이었다.
울음을 뚝 그치고 반색한 아이가 다시 레이나에게 달려왔다.
한번 밀쳐진 탓인지 머뭇거리던 아이는 조심스럽게 팔을 벌려 레이나를 안으려고 했다.
“안 돼.”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단호히 거절하자, 아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마물 속에서 나왔기 때문인지, 그 모습이 딱히 가엾게 보이진 않았다.
레이나가 아이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내놔. 내 거야.”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에 고개를 갸웃거린 아이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역시 보디랭귀지가 최고였다. 아이의 손에서 소형 이동석을 낚아챈 레이나가 서둘러 거리를 두었다.
이제 이동석을 사용하여 저택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냉정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레이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얘 어쩌지?”
그녀가 로스틴에게 물었다. 네가 결정하라는 듯.
“글쎄…….”
아주아주 안타깝게도 로스틴 역시 아이를 앞에 두고 매정해질 수 없는 남자였다.
아이의 나이가 루카와 비슷해 보여서 더욱 그러했다.
마물 속에서 나왔으니 마물일 것이 분명한데, 그냥 두고 가기에는 기분이 찝찝했다.
모처럼 미궁을 깨끗하게 정리했는데, 내버려 두고 갔다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좋아, 이렇게 하자.”
좋은 생각이 난 모양인지 레이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아이의 목과 손발에 검은 불꽃이 생겼다.
“본색을 드러내거나 허튼짓을 하려고 하면 바로 조여서 제압해.”
지시를 내리자, 대답이라도 하듯 불꽃이 한 차례 어두운 빛을 뿜었다.
과연, 몇 번이나 침입자들을 제압했던 방법이라 그럴듯했다.
“현명하군. 그럼 이제 공작 성에 가둬 놓고 지켜보도록 하지.”
그리 대답한 로스틴이 아이의 팔을 잡으려고 했을 때였다. 화들짝 놀란 아이가 레이나의 뒤로 숨었다.
“……놀라고 피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썩 불쾌하군.”
왜 마물인 자기가 놀라고 난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자꾸 레이나에게 집착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겉만 아이이지, 속은 마물일 게 뻔한데, 모르는 척 마마라고 부르는 것도 별로였다.
로스틴이 다시금 아이의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도망가지 못하고 잡혔는데, 남은 팔로 레이나를 꽉 붙들고 있어서 떼어 내기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내가 데려갈게.”
보다 못한 레이나가 데려가겠다고 나서자, 대충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아이가 눈을 빛냈다.
“아니, 그건 위험해.”
“아는데, 내가 그쪽보다 더 강해.”
그런 식으로 받아치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아이를 구속한 게 레이나의 힘이기도 했고.
왜 자신은 조금 더 강하지 못한 걸까. 조금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지만 괜히 입맛이 썼다.
최대한 서운한 티를 내지 않은 그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려 줬으면 좋겠어. 공녀가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도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언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니 최대한 돕고 싶었다.
로스틴이 어떤 생각으로 그리 말했는지 잘 알 것 같아, 당연하지 않겠냐며 레이나가 그의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알려 주기 전에 알아서 와. 레이더망 세워 놓고.”
애초에 그는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기도 전에 총알처럼 나타나곤 했다.
부른다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울 정도였다.
“레이더망? 그게 뭐지? 어떻게 세워야 하는 거지?”
로스틴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대었다.
평범한 행동인데, 어쩐지 좀 귀여워 보였다. 친해져서 그런 모양이라며 레이나가 픽 웃었다.
“그런 게 있어. 알아서 잘 세워서 찾아와.”
*
더는 미궁에 볼일이 없어진 두 사람은 마물을 데리고 조속히 귀환했다.
생각보다 빠른 귀가에 레이나의 부하들이 둘을 반겼다.
아니, 갈 땐 분명 둘이었는데, 셋이 되어 돌아왔기에 의문을 먼저 표했다.
“어? 그 아이는 누굽니까? 미궁에 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미궁에서 애를 만났을 리는 없을 텐데.
체이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자, 아이가 레이나의 다리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마마!”
“……?”
순간 정적이 일었다.
그 누구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뭐, 뭐야! 둘이 미궁에 가서 뭔 짓을 하고 온 거야?! 왜 애가 생겼는데!”
케일란이 급발진했다.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평소 같았다면 헛소리하는 케일란을 언짢게 보았을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다른 무언가도 아닌 아이를 데려왔기에 모두가 제발 제대로 설명해 달라며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였다.
“미쳤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상식적으로 좀 생각해. 그 어떤 짓을 해도 몇 시간 만에 이렇게 큰 애는 안 생겨. 물어볼 걸 물어봐야지, 진짜.”
그건 그렇겠지만, 그럼 대체 걔는 뭐냐는 눈빛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단 당분간 같이 지낼 테니 설명은 해 둬야 하는데…….
미궁 최종 보스의 잔해에서 나왔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아이의 목 언저리를 눈짓하며 대충 말했다.
“얘는 그냥…… 오다 주웠어.”
손목과 발목에도 불꽃의 고리가 채워져 있었다.
“정확히는 미궁에서 돌아오다가 주웠어.”
그제야 사람들은 아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략 열 살쯤 되어 보임에도 언어 능력이 또래보다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도.
“아! 뭐야! 그럼 빨리 그렇다고 말을 했어야지! 괜히 오해했잖아! 아-! 진짜! 깜짝 놀랐네!”
왜 더 빨리 말하지 않았냐며 케일란이 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집어 던지면서 극대노했다.
“왜 화는 내고 난리야? 그리고 그거 다시 주워.”
레이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자 흠, 흠. 괜히 헛기침한 그가 내던졌던 걸레를 조용히 주워 들었다.
“뭐, 알겠어. 그렇게 알게. 흠, 흠. ……나는 다시 청소하러 가 봐야겠다.”
뭐야, 대체. 레이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속이 다 시원해졌다며 케일란이 이상한 운율의 청소 노래를 부르면서 발걸음 가벼이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오호?”
이에 상황을 지켜보던 체이스가 턱 끝을 매만지며 흥미로움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