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38화
*
레이나가 생각한 대로 로스틴은 보는 눈이 있었다.
당연했다. 그는 단순한 귀족일 뿐만 아니라, 너른 북부 전체를 군림하는 공작이었으니까.
심지어 6년 차.
어쨌든 그러한 연유로, 로스틴은 레이나가 공작저에서 들고 나온 보물들을 평가했다.
“……이렇게 큰 사파이어는 처음 보는군. 심지어 깎아서 조각까지 해 놓았다니, 원래는 더 컸겠지.”
“그럼 얼마야?”
“글쎄, 부르는 게 값이지 않을까 싶은데. 황금 동상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동상은 금을 쓸어 모아서 만들면 그만이었지만, 보석은 그렇지 않았다.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팔지 않으면-아니, 물건이 없으면 살 수가 없었다.
때문에 금보다 보석이 더 값비쌌다.
심지어 레이나가 공작저에서 들고나온 보석상들은 쉽게 볼 수 없는 크기들이었기에 모두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럼 대체 자신은 얼마나 부자가 된 것인지. 혹시 알짜배기만 쏙쏙 골라 온 건가.
레이나가 기쁨에 겨워하는 사이, 로스틴이 검 하나를 주워 들어 한 차례 휘둘러 보았다.
“게다가 이 검, 초대 공작이 사용했던 검 같은데. 가볍지만 날카롭고 사용하기 편하군. 초보자가 사용해도 그럴듯한 위력을 내겠어.”
딱히 화려한 검도 아니라 아무런 기대도 없었는데, 재료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도 없는 진귀한 검이라며 그가 평가를 마쳤다.
그 외에도 그림, 조각상, 장식물 등등.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들 대부분이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었다.
갑자기 얻게 된 일확천금에 레이나가 떨리는 제 양손을 꼭 붙잡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대충 방치했잖아?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하지?”
“……훔쳐 가진 않을 것 같은데.”
누가 감히 검은색 불꽃을 담 전체에 두른 저택에 침입해서 물건을 훔쳐 갈까.
그럴 바엔 차라리 다른 귀족들의 저택에 몰래 잠입하는 것이 나았다.
오히려 그쪽이 더 넓고 사용인들도 많아서, 정체를 잘만 감춘다면 들킬 염려가 적었으니까.
그러니 어지간하면 이곳에 도둑이 들 일은 없겠지만, 로스틴은 괜히 한마디 거들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필요하다면 유능한 금고 장인을 소개해 주겠다.”
“정말? 그런 장인이 있어?”
“그래. 윈터스노우 공작 성의 금고를 만든 자이기도 하지.”
“소개해 줘! 이 방 전체를 금고로 만들어야겠어. 안에 금화와 보물을 전부 넣고, 앞에 불까지 지펴 놓겠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접근하면 바로 녹여 버릴 만큼 강력한 불꽃으로.
그쯤 되면 금고가 필요 없어도 무방했지만, 로스틴은 훌륭한 선택이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고마워. 사실 처음엔 그다지 좋은 인상이 아니었는데, 지금 보니 조금 직설적이라서 그렇지, 그쪽 상당히 괜찮은 성격 같네.”
그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사실 로스틴보다 레이나가 더 직설적이었고.
그러나 아주 다행히도 둘 다 직설적인 말투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을 해 줘야 더 잘 알아듣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공녀 역시 처음과는 전혀 다른 인상인 것 같군.”
“칭찬이지?”
레이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로스틴이 즉답했다.
“칭찬이야.”
“고마워. 같은 동네에서 사는데 앞으로 잘 지내자. 오늘처럼 종종 도와주면 더 좋고. 아니, 도와줘.”
우리 이제 친구잖아.
방긋방긋 잘도 웃는 레이나에, 로스틴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렇게 넉살 좋고 귀여운 마왕이라니, 존재할 리가 없었다.
라고 잠깐 생각했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웃음기를 걷어 냈다.
“용건은 모두 끝났으니 이제 가 봐야겠군. 즐거운 식사였다.”
“응? 세금 안 가져가? 얼마야? 한 번밖에 안 봐준다며. 그러니 빨리 지금 가져가야지.”
“아아, 그렇지. 주에 금화 한 닢이다.”
“그렇게나 싸다고?”
사실 싼 건지 비싼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죽을 때까지 밀릴 일은 절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그리 말한 것인데, 로스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더 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아냐! 그럴 리가 있겠어? 오히려 깎아 달라고 할 판인데, 은화 한 닢으로. 깎아 줄래? 응?”
레이나가 로스틴의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얼굴에는 장난기가 그득했다.
빈말이라는 걸 아는데, 그러니 대충 자연스럽게 맞받아쳐야 하는데.
당혹스럽게도 레이나가 상당히 귀여워 보임과 동시에 그녀와 닿은 팔에서 불이라도 붙은 것 같아 로스틴이 정색하며 그녀를 떼어 냈다.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어.”
그러고는 엉덩이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신속하게 저택을 떠났다. 언뜻 귀 끝이 붉어진 것 같기도 하였다.
“아니면 아닌 거지,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할 건 뭐야.”
너무 애교가 과했나. 좀 친해진 것 같아서 장난친 거였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괜히 오해받을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흠, 흠. 뭐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다음부터는 자제해야겠다.’
생각을 마친 레이나가 언제 철벽을 당했냐는 듯 돌아서서 미아를 찾았다.
“미아! 이제 디저트 먹을 시간 아니야?”
로스틴에게 차단당한 것보단 당장 미아의 디저트를 먹는 것이 더 중요했다.
*
샘에서 발견된 성녀가 눈을 뜬 것은, 만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아무런 이상도 없다고 하였지만, 도통 깨어나지 않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성녀의 회복을 기도했다.
“어, 어! 깨어나셨다! 성녀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오오오! 저희의 기도가 신께 닿은 모양입니다!”
“어서 대신관님을 불러오십시오!”
그녀가 바삐 움직이는 신관들 속에서 얼이 빠진 채로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무슨 일인데……?”
여긴 어디지? 저 사람들은 누구고? 이게 다 무슨 상황이야?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는 신관들을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는데.
띠링!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눈앞에 이상한 글씨가 나타났다.
「축하드립니다! 귀하께서는 <이 세계는 사랑의 힘과 함께> 특별 패키지판에 당첨되셨습니다! 본 게임은 사용자의 동의하에 진행됩니다. 진행에 동의하시겠습니까?」
눈앞에서 ‘YES’와 ‘NO’ 버튼이 교차로 반짝였다.
구석에 아주 작게 ‘한번 선택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라고 써진 글씨가 보였다.
‘아아! 맞아! 아까 게임 샀지?’
세간에서 꽤 인기 있는 게임이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도 유행하고 있었고.
소심하고 여린 성격 탓에 대학교에 입학한 지 반년째 친구가 없었기에, 이걸 계기로 친구를 사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게 되었다.
게임은 해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강의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게임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도착한 기억이 없어.’
그런데 왜 자신은 갑자기 게임을 하게 된 것일까.
의문을 품자, YES / NO 버튼 위에 작은 설명 창이 떴다.
「당신은 귀가하던 도중 트럭에 치여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판 진행을 원하지 않을 시, 현실로 돌아가게 됩니다.」
‘어……?’
그제야 그녀는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오늘따라 어째서인지 매일 오르던 육교 대신 무단 횡단을 선택했다는 것을.
‘그, 그럼 설마 나 지금 죽은 거야……? 법을 어겼다고 벌이라도 받은 거야……?’
상황을 인식하자,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마른 손과 발, 그리고 인간의 머리카락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투명한 백발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소설 속에서나 보던 상황이었다. 트럭에 치여 이세계의 새로운 몸으로 빙의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 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눈앞에서 깜빡이는 설명 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귀가하던 도중에 트럭에 치여서 사망. 진행을 원하지 않으면 현실로 돌아간다…….’
트럭에 치여 죽은 자신의 몸으로.
그녀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상황에서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여나 시간제한이라도 있어서 강제로 ‘NO’ 버튼이 눌릴까 봐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YES’ 버튼을 눌렀다.
「환영합니다! 귀하께서는 지금부터 <이 세계는 사랑의 힘과 함께>의 주인공인 성녀가 되셨습니다!」
폭죽이 터지는 축하 음과 함께 시스템 창이 바뀌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 주르륵 이어졌다.
모처럼 주인공이 되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뒤늦게 가족이 떠오르며 눈물이 찔끔 나왔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귀찮아도 절대 무단 횡단 따위 하지 않았는데. 아까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후회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현실의 자신은 죽었고, 지금은 게임 속 캐릭터가 된 상태니까.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염치없지만 제발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부드러운 미성의 누군가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성녀님. 당신이 오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저는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대신관 테오도르라고 합니다. 앞으로 성심성의껏 성녀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사르르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얼굴에 그녀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