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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75화

아니, 그것보다 이 무슨 미친 사람이란 말인가.

불꽃으로 태워 버리려던 레이나는 순간 멈칫했다. 방금 전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침입자가 떠올라서였다.

지시도 내리지 않은 공격을 당해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만난 직후라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불안해졌다.

때문에 그녀는 있는 힘껏 자신을 껴안은 사람을 밀쳤다. 다행히 그리 세게 안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너 뭐야? 미쳤어?”

레이나가 서둘러 거리를 두었다. 헛소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서 갑자기 사람을 막 껴안다니.

‘미친놈 아니야?’

따귀라도 때려야겠다 싶어서 손을 들자, 제 실수를 깨달은 서부 공작이 서둘러 양손을 얼굴 옆에 들어 올렸다.

“아아! 미안해요. 너무 기뻐서 그만 실수를 저질렀어요. 사과드립니다, 루벨라이트 공녀.”

그런데 목소리가 조금 특이했다. 남자치고는 꽤 얇은 편이었다.

‘얼굴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머리 스타일도 익숙하고.’

설마 남주 후보?

연보랏빛을 은은하게 띠는 은발에 같은 색의 눈동자. 그것도 모자라서 예쁘장하게 잘생기기까지 했다.

키가 조금 작았으나, 작은 사람이 취향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레이나가 순간적으로 공작의 정체를 떠올렸다.

“노엘 테미스?!”

“오, 저를 아시는군요?”

정답이라는 듯 노엘이 방긋 웃었다. 상상도 못 한 정체에 레이나가 잠시 굳었다.

노엘 테미스 서부 공작은 남주 후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꽤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노엘은 밝고 호탕한 데다가 친절하기까지 했다. 서부 던전 퀘스트를 진행할 때도 물심양면 여주를 도와주었다.

어느 정도 호감도를 올리기 전까지는 조금씩 데면데면하고 톡톡대는 다른 남주 후보들과는 달랐다.

노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태도로 여주에게 잘해 주었다.

마왕을 물리친 다음에는 서부에서 사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꽤 극진한 대우를 해 주다 보니, 괜히 더 정이 가고 호감이 생기는 캐릭터였다.

레벨을 올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던 남주 후보들은 잘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노엘은 첫눈에 누구인지 알아볼 만큼 말이다.

그런 귀한 분이 왜 이런 누추한 곳에. 레이나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자, 노엘이 재차 사과했다.

“놀랐다면 정말, 정말 미안합니다. 다른 마음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에요. 오해 마세요. 같은 성별이기도 하니까. ……아! 근데 이건 크게 상관없을지도. 아무튼.”

그래, 사실 노엘은 여자였다. 이성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보니 그녀는 공략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여주의 조력자일 뿐.

‘아니, 아니.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쯤에서 괜찮다는 대답을 해야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레이나는 개차반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존댓말을 하면 캐릭터가 이상해지는데…….’

사실을 토로하며 전부터 좋아했다고 말하는 것도 웃겼고, 노인은 물론 로스틴에게도 안 한 존댓말을 하는 것도 웃겼다.

심지어 이미 미쳤냐고 반말로 화까지 낸 참이었다. 그런데 사과를 받았다고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그럼 이제 미친 사람의 주어는 노엘이 아니라 자신이 될 것이다. 다들 뭘 잘못 먹은 건 아닌지 걱정이나 하겠지.

고심 끝에 레이나는 대답을 골랐다. 그녀의 안색이 퍽 어두웠다.

“……알겠어. 이제 그러지 마.”

세요, 노엘 공작님. 흑흑.

어쩔 수 없이 반말로 답한 레이나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다행히 착한 노엘은 그런 사소한 것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용서를 받아서 기쁘다는 듯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네! 그럴게요.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고마워요, 루벨라이트 공녀.”

이쪽이 반말했으면 그쪽도 반말로 대답할 것이지, 왜 저렇게 쓸데없이 예의를 지킨다는 말인가.

공작이 어린 영애에게 존댓말을 하고, 외려 어린 영애는 공작에게 반말을 하는 기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역시 너무 좋은 캐릭터야.’

자신이 버려진 곳이 북부가 아니라 서부였다면, 결단코 냅다 반말을 갈기지 않았으리라.

“……용건은?”

무엇인가요, 공작님.

레이나가 최대한 무례하게 보이지 않도록 짧게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노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감사?”

요? 뜬금없이요? 레이나가 되물으니 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녀께서 저희 서부의 마물들을 해치우시고, 뒷정리를 도와주시기까지 하셨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레이나는 이제 말끝을 흐리기로 했다. 인성이 없는 듯 있는 듯 애매하게 보여 그나마 좀 마음이 편했다.

“보았어요. 이 두 눈으로 직접.”

그녀가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스스로의 눈을 가리켰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새벽에만 몰래 갔는데, 들켰던 거야?

아니, 본 건 둘째 치고, 그걸 보고 굳이 고맙다고 말하러 여기까지 왔다고?

‘……사실이라면 진짜 좋은 사람이잖아?’

감탄하여 말을 잃은 것인데, 레이나가 불쾌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오해한 아덴이 대신해서 추가 설명했다.

“북부와 서부의 경계에서 마주쳤던 그날, 같은 장소에 공작님도 계셨다. 공녀를 보고 누구냐고 물으시기에 내가 아는 대로 설명했을 뿐이고.”

그 후에도 괜히 생각이 나서 서부 경계에 갔다가 이곳저곳에서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레이나를 몇 번이나 보았다는 말이 뒤따랐다.

고마워서 뭐라도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저택까지 오게 되었다고.

‘생색을 내려고 한 일이 절대 아닌데.’

어쩌다 보니 경계가 맞닿아서 조금 도와준 것뿐이거늘.

이것도 높은 행운 덕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무 생각 없이 한 일로 서부 공작에게 잘 보였다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알겠어. 이해했어. 그냥 우연히 도와준 거라서 인사까지 하러 올 필요는 없었지만.”

이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노엘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꼭 인사를 드려야 할 만큼 큰 은혜였는걸요.”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아 보였다. 아무래도 장소를 이동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런데 식사는?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식사라도 하면서 얘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손님이 왔는데 차만 주고 돌려보낼 순 없었다. K-유교걸의 마음 한구석에는 꼭 손님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해야 한다는 철칙이 있었다.

……물론 방금 먹긴 했지만, 또 먹을 수 있었다.

원래 오늘은 두 배를 먹으려고 했었기 때문에 같이 먹으면 딱 적당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

다행히 공작은 미아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요리사의 음식 솜씨가 대단하군요! 제 성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납니다.”

“음, 그건 좀…….”

차라리 자주 놀러 오세요.

바로 거절하자, 농담이었는지 노엘이 하하 웃었다.

그러고는 깨끗한 물로 입을 헹군 그녀가 ‘그러면.’이라고 운을 떼며 드디어 본심을 내뱉었다.

“공녀께서 서부에 오시는 건 어떠신가요?”

갑자기 대화가 왜 그렇게 흐르는 거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노엘이 말을 이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뭐든 드리겠습니다. 저택, 기사, 하인, 그도 아니면 보석이나 예술품도 괜찮겠지요. 그리고 이건 대외비인데, 서부에는 멋진 남자들도 많습니다.”

띠용? 갑자기?

그러나 노엘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레이나는 그녀가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진심으로 피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자신이 서부에서 살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아니, 곰곰이 따져 보면 오히려 쫓아내야 마땅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와 달라고 부탁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검은색 마법을 쓰는데?”

그래서 자신의 최대 단점을 언급하며 솔직하게 묻자, 노엘이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꺼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지요. 게다가 제가 듣고 본 바로는, 공녀께선 남을 돕거나 바른 일에만 마법을 사용하신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되묻는 그녀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믿음과 확신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맞는 말 대잔치이고, 자신 역시 그리 생각하며 살고 있기는 한데,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않았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괜히 머쓱해졌다.

“그…… 렇기는 하지.”

레이나는 힐끗 아덴을 쳐다보았다.

‘혹시 쟤가 좋게 말해 준 건가?’

언제 생각이 바뀐 거지. 거의 마지막까지 마왕 놈이라고 욕을 했던 것 같은데.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주눅 들고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탁이 전부인 세상도 아니고요. 이번 일도 예언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나 큰일인데, 피해도 엄청났고요.”

이번에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도 않았는데, 신탁인지 나부랭이인지 때문에 몸을 사릴 필요는 없었다.

‘솔직히 이제 엿이나 먹으라면서 내 마음대로 굴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 아니야?’

애초에 따져 보면 그 신탁이라는 게 너무 자기 멋대로였다.

윈터스노우 공작 일가의 저주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정작 중요할 때는 기능을 안 하는데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맞아. 내가 왜 하지도 않은 일과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변명하고 숨어 살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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