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46화
*
“베로니카가 온실 관련 업무를 모두 맡게 되어서 저도 급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근데 그래도 될까요? 일단 본업은 기사인데 말입니다. 거의 들키기는 했지만, 스파이로 잠입한 상태고요. 물론 제가 일을 너무 잘해서 주겠다고 한 거겠지만요. 심지어 상당히 많이 받았습니다. 실은 공작님께서 주시는 급여와 거의 비슷할 정도입니다.”
어제 일을 보고하는 체이스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래도 나름 기사인데, 농부(?)로서도 급여를 받게 되었다며 ‘어떻게 할까요?’라고 곤란해하며 묻고 있었으나, 올라가는 광대와 입꼬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어쩐 일로 아침 일찍 레이나의 저택이 아닌 자신의 집무실로 왔나 했더니, 자랑하려고 온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부하는 체이스 외엔 없었다. 심지어 점점 사담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싫은 것은 아니었다. 레이나가 뭘 하며 지내는지 듣는 것도 퍽 흥미로웠고.
“……받아 둬. 두 업무 모두 잘 해내고 있으니 굳이 받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앗! 정말이십니까? 예. 그럼 거절하지 않고 둘 다 받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얻게 된 돈에 체이스가 신이 난 듯 헤헷 웃었다.
레이나에게 돈이 없다면 모르겠는데, 그녀는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었다.
루벨라이트 공작가에서 가지고 왔다던 물건들이 하나같이 값을 매길 수 없을 고가의 보물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알고 가져온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어지간한 귀족 가문의 재산만큼은 될 터였다.
생각해 보니 눈과 마물밖에 없는 이 극지에서 필요한 사람들만 쏙쏙 골라서 채용한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운이 좋은 타입인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이만 출근해 보겠습니다. 아! 안타깝게도 아침 식사 시간은 지났군요. 조금 더 일찍 보고할걸 그랬습니다…….”
대체 어느 쪽을 본업으로 생각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로스틴은 어쩐지 조만간 괜찮은 기사 한 명을 잃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숨을 내쉰 그가 서류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가지.”
“어? 저택에 볼일이 있으십니까?”
“그래. 농사를 짓는 경은 바빠서 몰랐겠지만, 공녀께 소개해 줄 사람이 어제 도착했거든.”
묘하게 타박하는 말투였다.
사실이었기에 멋쩍게 웃은 체이스가 로스틴과 함께 심연의 저택으로 향했다.
“공작님, 이곳인가요? ……공녀님께서 지내시는 저택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생각했던 것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동행한 금고 장인이 레이나의 저택을 훑으며 감상을 내뱉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검은색 불꽃을 휘감은 저택이라니,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끔찍하다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로 레이나의 저택은 기괴했다.
“절대 마왕의 저택이 아닙니다. 그저 공녀님께서 검은색 마법을 사용하실 뿐이죠.”
체이스가 괜히 변명했다.
검은색 마법을 쓰는데 마왕이 아니라니, 웃기지도 않는 변명이었다.
그러나 마왕을 누구보다 증오하고 있을 로스틴이 별말이 없는 터라, 금고 장인은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어? 다들 어디 간 거지?”
저택 앞마당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체이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대었다.
원래 이 시간에는 다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인데,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이 된 체이스가 서둘러 저택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보다도 먼저 로스틴이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그는 1층 홀에서 안나와 미아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달콤해 보이는 디저트를 두 손에 잔뜩 들고 있었다.
“어? 로스틴 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공녀는?”
어째서인지 로스틴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레이나가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는 하지만.
오해를 당하기 쉬운 사람이었기에 괜히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아, 공녀님께선 지금 침실에 계십니다. 새벽에 일이 좀 있었거든요.”
“새벽에? 무슨 일이지? 혹시 공녀의 방으로 향하려던 길인가?”
그가 자연스럽게 미아의 손에서 디저트 접시 하나를 가져가며 물었다. 도와주는 척 동행하기 위함이었다.
진부한 수법이었으나, 아주 잘 통하는 수법이기도 했다.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인 미아가 레이나의 방으로 향하며 새벽에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눈을 크게 뜬 로스틴이 급히 물었다.
“……침입자가 있었다고? 다친 사람은? 공녀는 괜찮은가?”
“네. 레이나 님은 괜찮으세요. 사람들도 다 괜찮은데, 마물 하나가 조금 다쳐서요.”
“마물?”
묻는 순간, 레이나의 침실에 도착했다.
똑똑, 노크하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레이나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먼저 들어가라며 로스틴이 문을 열어 주니, 처음 받아 보는 에스코트에 살짝 뺨을 붉힌 미아가 안으로 들어갔다.
로스틴은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째서인지 안에서 냉기가 훅 밀려 나왔다.
복도보다 추운 방이라니, 이상했다.
한편, 깜짝 상자처럼 나타난 로스틴에 레이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여긴 어쩐 일이야? 나 세금도 잘 내지 않았어? 혹시 밀렸어?”
“아니, 세금을 뜯으러 온 것은 아니다. 그보다 새벽에 습격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냐고 물어보려고 했거늘.
눈앞에 보인 뜻밖의 생명체에 로스틴이 차게 얼어붙었다.
“……?!”
루카?! 대체 왜 제 동생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아니, 심연의 저택에 가도 된다고 했으니까 상관없긴 한데, 어째서 공녀의 침대 위에서 그녀와 함께 뒹굴거리고 있는 것인지.
심지어 루카는 그냥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도 아니고, 벨벳 쿠션 위에 올라간 상태였다. 검은색 불꽃까지 몸에 두르고 말이다.
루카가 있어서 방이 추웠구나. 아니, 용케도 그걸 알아차렸군. 다행이었다. 지금 그게 문제는 아니었지만.
로스틴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레이나가 새 디저트를 루카의 앞에 내려놓았다.
“삐이, 미아가 새 디저트를 만들어 왔네. 어때? 마음에 들어?”
루카가 케이크를 한입 먹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몸이 작아서 그런지, 별로 티가 안 나서 더 귀여웠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삐이?”
“응. 얘 이름이야. 삐이, 삐이거리면서 울길래 붙여 봤어. 마음에 드나 봐. ‘삐이야.’라고 부르면 귀여운 까만 눈으로 쳐다봐.”
“…….”
루카. 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거야. 넌 10살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무뚝뚝하고 냉랭한 성격이었잖아.
그런데 삐이라니? 그런 장난감 같은 이름으로 불려도 정말 괜찮은 거야? 좋아하지도 않는 디저트는 또 왜 계속 먹고 있는 건데.
수많은 의문과 감정을 담은 눈으로 로스틴이 루카를 응시했다.
대충 그가 뭘 묻고 싶어 하는지 눈치챈 루카가 대답하지 않겠다며 휙 고개를 돌렸다. 그것으로 무언의 대화가 끝이 났다.
“응? 삐이가 너 싫은가 봐. 그냥 보기만 했는데 막 고개를 돌리네.”
“아니, 나는…….”
걔 친형인데.
로스틴이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미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물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 생물이 다친 건가?”
어딜 어떻게 다친 거지? 뒤늦은 걱정에 로스틴이 스스로를 자책하며 물었다.
어깨를 으쓱인 레이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 응. 근데 어딜 다쳤는지 잘 모르겠어. 말이 안 통해서 그런지,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없고. 혹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그런 것치고는 음식은 잘 먹는데…….”
루카가 깨어난 것은 고작해야 두 시간 전이었다.
기절한 루카를 쿠션 위에 올려놓은 레이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동안 조심스럽게 루카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특별히 다친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괜찮아 보여. 아마 평소처럼 불꽃 근처에서 쉬다가 침입자에게 당한 게 아닐까 생각해. 걷어차였다든가?”
“……놈은 어디에 있지?”
설명을 전부 들은 로스틴이 이를 갈았다. 당장 그 침입자라는 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둬 놨어. 케일란이 지키고 있고. 기절한 상태지만 곧 깨어나지 않을까? 방이 아주아주 따뜻하거든.”
아덴은 딱 더워 죽기 직전의 온도로 맞춰 놓은 방에 갇혀 있었다.
“얼굴을 봐야겠어.”
로스틴이 살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왜 저렇게 화가 났지? 꼭 가족에게 해를 끼친 원수라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얼떨결에 정답을 맞힌 그녀가 알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따라와.”
알아서 고문 중인데, 굳이 만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보고 싶다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제 일에도 종종 참견했었기에 그저 영지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관심을 가지는 건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