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94화
“저, 정말이십니까?”
“저희에게도요?!”
사람들이 반색하며 물었다. 준다면야 당연히 받고 싶었다. 아니, 꼭 받고 싶었다.
남부나 동부, 서부에 가까운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다들 상황은 같았다.
여름을 없애 추운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달리 할 일이 없어서 매일 집에서만 하루를 보냈다.
한데 레이나가 자비를 베풀어 준다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농작물을 키울 자신이 있었다.
때문에 희망 회로를 돌리던 사람들이 문득 아주 큰 문제점에 봉착했다.
“어, 그런데 불꽃을 주셔도 작물을 살 돈이 없지 않아……?”
공작가에서 지원금을 받긴 하나, 조금 윤택한 생활을 할 정도였다.
취미로 텃밭에서 키울 아주 소량의 작물이라면 괜찮겠지만, 이곳처럼 대량의 농사는 불가능했다.
그런 작은 텃밭을 위해 레이나가 먼 길을 오가게 만드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레이나를 오라고 할 순 없어, 사람들이 머쓱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렇지…….”
“죄송합니다, 공녀님. 괜한 말씀을 드려서…….”
“응? 괜찮은데.”
어차피 시간도 많고.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 괜찮지 않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돈도 없어서 작물도 사지 못하는걸요!”
“예!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공녀님께 작물까지 받을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습니다! 그건 저희가 싫습니다!”
“음, 그래? 그럼 아이스베리 마을처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레이나가 모든 지원을 하고, 사람들은 재배만 하여 급여를 받는 형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하려 했는데,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거라면 내게 생각이 있는데. 공녀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어?! 공작 각하?!”
“공작님을 뵙습니다!”
“고, 공작님을 뵙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로스틴이었다. 어느새 사람들을 헤치고 레이나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긴 어쩐 일이야?”
“성의 찻잔을 모두 빌려 갔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싶었지.”
다른 것도 아니고 찻잔을 빌려 가다니, 갑자기 이 무슨 생뚱맞은 일인가 싶어서 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일주일이나 레이나가 깨어나지 못하여 걱정하고 있던 참이기도 하였다.
“아아, 빌려줘서 고마워. 먼 길을 와 주었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뭐라도 좀 대접하려다 보니 그만.”
레이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찻잔을 백 개나 넘게 빌린 건 좀 너무했던 모양이다.
“아니, 북부의 주민들을 잘 대접해 줘서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미리 알았다면 도와줄 사람도 함께 보냈을 텐데.”
그리 답한 로스틴의 눈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잡일을 하는 대머리들에게 향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몰골이었으나, 이렇게까지 많은 대머리들은 처음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손은 필요 없을 듯싶었다.
“저들은…….”
마침 대머리 중 하나가 그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자 로스틴이 말끝을 흐렸다.
상당수가 함께 민머리가 되어서 그런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을 마왕의 은신처로 착각하고 쳐들어왔다가, 정신 교육을 당하고 저렇게 되었어.”
케일란, 아덴과 비슷한 루트였다.
어쨌든 자발적으로 이곳에 남은 거라면 더는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필요 없어지면 레이나가 알아서 잘 쳐 내겠지 싶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여기 모인 사람들에 대한 건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로스틴이 화제를 전환했다.
“농장에 대해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아, 그렇지. 그 얘기를 하고 있었지. 응, 뭔데? 무슨 제안?”
사사로운 잡담을 거쳐 두 사람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로스틴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제안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레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다.
“아이스베리 마을처럼 온실을 만들 생각이라면 재배할 적당한 땅을 내가 지원하지. 그러니 공녀께서 그 땅을 이용해 온실을 만들고, 북부 사람들을 고용해 주었으면 한다.”
“북부에서 사업을 하라는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일전에 공녀의 세금은 면제한 참이니, 사업이라고는 해도 세금은 내지 않아도 돼.”
그렇게 하면 이득밖엔 없는 사업이 된다. 레이나는 세금을 내지 않고 사업을 할 수 있어서 이득이었고, 북부 사람들은 직업을 가질 수 있어서 이득이었다.
불행히도 로스틴만 얻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배한 작물들을 북부에 우선적으로 유통해 주었으면 한다. 북부는 모든 식량을 영지 밖에서 수입하고 있어서 그에 따른 비용이 상당하거든.”
아니, 다행히 그 역시 이득인 모양이었다.
“당연히 좋지! 당장 그렇게 하자!”
“오오오!”
감사의 말만 전하려고 온 것이었는데, 뜻밖의 직장을 얻게 된 사람들이 반색했다.
“온실 작업을 하려면 힘이 필요할 테니 제가 돕겠습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대머리들까지 의욕이 넘쳤다. 그렇게까지 도울 일은 없을 텐데, 나서서 하겠다니 말릴 필요는 없었다.
“혹시 이전부터 계획해 둔 거였어?”
마치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곧장 나오는 사업 계획에 레이나가 의문을 가졌다.
미리 준비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술술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계획을 꺼낼 순 없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로스틴이 그녀의 물음에 긍정했다.
“사실 예전부터 내내 생각은 했었다. 북부에선 작물 하나 키울 수 없어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판매자가 얼마를 부르든 살 수밖에 없었거든.”
북부의 식량은 동부와 남부의 공작가에서 반반씩 수입하고 있었다.
북부민 전체의 식량을 충당해야 했기에, 어지간한 규모의 상단이나 업체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북부에선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 식자재를 생산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그들은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으로 작물을 판매했다.
북부만이 황성에서 막대한 지원금을 받고 있기도 하였기에 그에 대한 반발심도 적게나마 들어가 있었다.
“자급자족까지는 무리겠지만, 수입량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폭리를 감당하면서까지 계속 계약 관계를 이어 가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이를 영지민의 힘을 빌려 해결할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고서라도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응, 좋아.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
다른 곳도 아니고, 동부의 루벨라이트 공작가가 끼어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레이나가 퍽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량 북부에서 자급자족되게 해 보자.”
“전량?”
전량 자급자족하려면, 땅도 땅이지만 엄청난 양의 힘이 소모될 터였다.
미궁과 던전을 단번에 처리한 그녀였기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계속해서 힘을 사용해야 하는 일이기에 상당한 힘이 들 것이 분명했다.
굳은 로스틴의 표정에서 그녀를 향한 걱정을 읽은 레이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해 보고, 아니면 말고.”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혹시 생각해 둔 땅 같은 거 있어? 넓고, 평평하고, 눈도 적당히 내리는 곳이면 좋을 것 같은데.”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말로만 되네, 안 되네 떠들고 있는 것보다는 가능한 지역을 직접 찾아가서 확인하는 것이 나았다.
“북동쪽에 큰 평야가 있긴 한데.”
기후만 아니었다면 곡창 지대가 되었을 법한 대단한 평야가 있었다.
레이나의 말대로 눈이 적당히 내리고, 동부와의 경계에 자리하여 북북서 끝보다는 날씨가 선선했다.
“동부와의 접경 지역이라는 말이지?”
“그래.”
로스틴의 대답을 들은 레이나는 잠시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다시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가방을 하나 들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감도 잡히지 않아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레이나를 주목했다.
그 순간, 그녀가 로스틴에게 손을 내밀었다.
“……?”
얼떨결에 로스틴이 레이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가방 속에서 이동석을 꺼낸 그녀가 그가 말했던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이동을 시작했다.
“잠-”
잠깐만, 이라는 말이 쉴 새 없이 바뀌는 공간 사이에 흩어졌다.
일주일이나 깨지 못했다더니, 왜 이렇게 힘이 넘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그 튼튼한 로스틴이 아주 약간의 메스꺼움을 느낄 때가 되어서야 이동은 멈추었다.
남은 이동석 개수를 세어 본 레이나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 맞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벌판이었다. 북북서보다는 눈이 덜 내리는 모양인지, 쌓인 눈이 그렇게 많진 않았다.
동부와 바로 붙어 있어서 그런지 날씨도 그럭저럭 선선했기에, 북북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힘을 크게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맞다.”
로스틴이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이곳은 북부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 평지였다. 기후 문제만 없었다면, 필시 제국을 아우르는 대단한 곡창 지대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을 텐데.
불행히도 대신관의 힘을 빌려 북부 전체의 여름을 없앤 탓에 쓸데없이 평평하기만 한 광활한 공터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동부와의 경계는, 아마도 여기겠고.”
레이나가 눈이 쌓이지 않은 평지를 돌아보며 혼잣말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능력을 사용하면 될지 감이 잡혔다.
손을 뻗은 그녀가 조용히 명령했다.
“평지 전체에 불을 깔아.”
화르르륵-!
그와 동시에 엄청난 양의 불꽃이 벌판을 뒤덮기 시작했다. 익숙한 광경이었으나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이를 눈앞에서 목격한 로스틴은 마치 세상이 전부 암흑으로 물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신관이 예언했던 음침하고 음습한 암흑이 아닌, 선명하고 아름다운 순수한 어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뻗어 나간 불꽃은 정말 평지를 모두 뒤덮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지친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레이나가 로스틴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마침 바로 옆이 동부이니,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이도록 엄청난 작물을 키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