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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54화

한편, 괜히 심기가 불편해진 로스틴은 저녁을 먹고 가도 되겠냐며 레이나에게 허락을 구했다.

“여기서 저녁을 먹고 가겠다고? 상관은 없지만, 그쪽 항상 바쁘지 않았어?”

늘 일에 치여 있는 느낌이었는데. 아니, 느낌이 아니라 일에 치여 있었다.

그래서 볼일이 생기면 일정을 피해 쓸데없이 일찍 저택에 방문하곤 했었다.

“오늘 하루는 미궁에 가려고 시간을 비워 두었기 때문에 괜찮아.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기도 하고.”

“그래? 그럼 같이 먹자. 미아도 좋아할 거야.”

사람이 늘어날수록 힘들어야 정상인데, 미아는 제 음식을 먹어 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기뻐했다.

레이나의 허락이 떨어졌기에, 오랜만에 로스틴도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물론 아이도 함께였다. 마물이라서 인간이 먹는 음식을 먹는지 의문이었는데, 앞에 놓아주니 알아서 잘 먹었다.

식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서 주변이 많이 지저분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별안간 로스틴이 케일란을 지적했다.

“아이는 그렇다고 치겠는데, 케일란 경의 주변은 왜 그렇게 지저분한 건지 모르겠군.”

모두의 시선이 케일란에게 향했다.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두 그릇째를 비우고 있던 그가 화들짝 놀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예, 예……?”

“모어 백작가는 꽤 예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알고 있는데, 경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어서 말이지.”

뽀각. 갑자기 로스틴이 케일란의 뼈를 부러뜨리는 말을 쏟아 냈다.

부정하기에는 그의 그릇 주변이 지저분한 건 사실이었다.

매번 음식만 나오면 눈이 돌아가서 먹는 것에 집중하여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음식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사실 레이나도 내내 케일란의 식사 매너가 거슬렸지만, 그녀라고 어디서 교육을 받은 건 아니라 그냥 넘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지적에 케일란이 멋쩍게 웃었다.

“하, 하하……. 미아의 음식이 워낙 맛있어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슬픈 스토리였다. 그간 망나니처럼 음식을 해치우던 케일란이 쪼그라들었다.

물론 로스틴의 지적은 타당했다. 몇 년이나 세상을 떠돌며 용병으로 살았던 탓에, 그는 평민보다 식사 예절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상기할 수가 없을 정도로 경망스럽게 지내서 잊고 있었지만, 그는 귀족이었다. 그것도 명망 높은 백작가의 영식.

고치지 않으면 흠이 될 것이 분명했다.

마침 로스틴이 일러 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모두가 흐뭇하게 식사를 재개했다.

케일란도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너무 식사를 빨리하지 않나? 벌써 두 그릇이나 음식을 비운 것 같은데.”

그러나 로스틴의 지적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모처럼 마음을 다잡고 깨끗하게 식사하려는 케일란을 다시 두드려 팼다.

“앞으로 가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먹는 것이 좋겠어. 경 때문에 미아가 쉴 틈이 없기도 하고 말이야.”

“앗.”

마침 새 음료수를 가져오던 미아가 움찔 반응했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그녀도 내심 케일란이 조금만 천천히 먹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가 너무 빨리 먹어서 매번 음식을 다시 준비하고 가져오기 바빴던 것이다.

“그건 그래. 음료도 한 번에 다 마시고, 스테이크도 와아앙 한입에 넣고. 그러니까 미아가 쉴 새 없이 계속 뭘 가져와야 하잖아. 그리고 너무 빨리 먹으면 속 다 버려.”

레이나가 거들자 케일란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그동안 그녀의 눈에 자신이 그렇게 보였겠구나, 생각하자 괜히 의기소침해졌다.

게다가 존경하는 로스틴마저 연달아 주의 줄 정도로 자신의 식사 예절이 엉망이었다니.

잘 보여서 칭찬을 받아도 부족한데, 얼마나 못나게 보였을까 싶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조심하겠습니다. 미안했다, 미아.”

“아닙니다.”

아까부터 계속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광경에 체이스가 눈을 빛내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어쨌든 그렇게 케일란의 예절 교육이 끝난 뒤, 다시 식사가 재개되었다.

물론 잘 고쳐지지는 않았다. 아까보다 더 급박하게 세 번째 그릇을 해치운 케일란이 아덴에게 식사를 전달하겠다며 다급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네. 명색이 귀족이니까 고치는 게 좋긴 할 텐데.”

“차차 고치겠지. 그보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온실이 더 많아진 것 같군.”

“아! 새로 지었어. 앞으로 더 대단해질 거야. 두고 보라고.”

레이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빛냈다.

다행히 그녀의 관심을 돌리는 것에 성공한 듯싶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최근에 심은 새 모종과 새 일꾼, 그리고 넓힌 온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기 시작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베로니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부담 없이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다.

그 시각, 아덴 몫의 식사를 가지고 식당을 나선 케일란은 감옥에 도착했다.

‘식사 시간인가. ……흥, 음식이 아까우니 오늘부턴 먹도록 해야겠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마왕의 부하 따위가 만든 음식은 먹지 않으려 했지만, 생각해 보니 음식에는 죄가 없었다.

게다가 자꾸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다름 아닌 케일란이 했던 말이었다.

“나라고 마왕을 해치웠다는 타이틀을 달고 싶지 않았겠냐고.”

‘……놈의 머리카락이 없는 것도 나와 비슷한 이유일까.’

좋아서 저따위 몰골을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덴 역시 그러했다.

거울을 통해 제대로 확인한 것이 아니기에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감히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 여자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니 먹을 것이다. 비참하고 모욕적이어도, 음식을 먹고 체력을 회복하여 복수하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세상일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식사를 가져온 케일란이 쾅! 소리가 나도록 거세게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했다.

“젠장, 젠자앙-! 그동안 내내 꼴사나운 모습만 보였었다니!”

그러면서 손에 든 식사를 입에 때려 넣었다.

‘대체 왜?’

아덴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저건 분명 자신의 식사일 텐데, 왜 자기가 처먹고 앉았는지.

게다가 왜 울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아덴이 케일란에게 말을 걸려고 하자, 매서운 눈을 한 케일란이 윽박을 질렀다.

“알겠어! 알겠다고! 이제 더 이상 먹으라고 안 할 거야! 자꾸 귀한 음식 남기는 거 짜증 나니까 그냥 내가 먹을 거라고! 그러니까 좀 닥쳐!”

아니, 먹겠다고. 먹을 거라고. 먹으려고 했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케일란의 눈이 정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슨 한입이 저렇게 큰지, 이미 음식이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다.

다 먹은 식판을 내던지고 엉엉 우는 케일란에, 아덴은 이마를 짚으며 조용히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대신관을 만난 이후부터 어째 일이 단단히 틀어지고 있었다.

*

식사를 끝내고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해치운 뒤, 레이나를 따라 온실 산책까지 마친 로스틴이 이만 가 보겠다며 외투를 걸쳤다.

“혹여나 문제가 생긴다면 꼭 연락하도록.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달려올 테니.”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나서 못 움직일 때도 연락해도 되지?”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로스틴이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표정이 진지해서 진심 같았다.

‘하여간 가끔 의문의 개그 캐릭터라니까.’

레이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는 이제 정말 떠나려고 말에 오른 그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손 줘 봐.”

“손?”

갑자기 손은 왜.

의문이 들었으나, 그가 착실하게 손을 펼쳐 내밀었다.

그러자 레이나가 그의 손에 검은색 불꽃 덩어리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추워 보여서. 난로 같은 거니까 가져가. 그냥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돼. 어디 다닐 때 가지고 다녀.”

사실 로스틴은 추위를 그다지 타지 않았고, 레이나 역시 그가 추워 보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냥 만들어 주고 싶었다. 조금 더 따뜻했으면 했다.

오늘 일을 기점으로 전우애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그녀가 괜히 말을 보탰다.

“내가 죽을 때까진 꺼지지 않을 거야. 생명체에게는 해를 끼치지 말라고 해 놨으니 화상 입을 일도 없을 거야. RR 인증!”

“RR 인증?”

“레이나 루벨라이트가 안전을 인증했다는 뜻이야.”

만든 본인이 인증해 봤자 의미가 없었으나, 로스틴은 그저 작게 웃었다.

“고맙게 받도록 하지.”

레이나가 만든 불꽃이라면 아주 요긴하게 쓰일 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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