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35화
“뭐, 뭐야. 이거 뭐야……! 뭐야……?!”
그는 스푼에 비친 제 모습을 믿지 못했다. 아니,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믿기 힘들 터였다. 케일란은 지금 대머리를 넘어서 눈썹까지 모두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응? 지금 알았어? 처음 만났을 때 바로 태웠는데.”
레이나가 새삼스럽다는 듯 물었다. 냠냠, 신선한 샐러드를 입에 넣으면서.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머리카락 없이 살라는 거야!”
“그러게 누가 함부로 덤비래? 감히 마왕에게 도전할 용기가 있었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았어야지.”
머리카락 조금 없어진 걸 가지고 왜 이렇게 유난이람. 레이나가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머리카락은 조금 없어진 것이 아니었고, 목숨을 내놓고 오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머리카락을 잃은 케일란은 차라리 목숨을 잃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흐윽, 이제 난 틀렸어! 이제 다 끝났다고!”
“으음-오늘 저녁도 너무 맛있네, 미아. 널 채용한 건 내 생에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어.”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케일란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너무 맛있는 저녁을 음미하며 기뻐할 뿐이었다.
하지만 케일란이 이내 눈물을 짜내기 시작했기에, 맞은편에 있던 체이스가 어쩔 수 없이 한마디 거들었다.
“머리카락이야 곧 자라겠지.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도 없던데,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신성한 식사 시간에 울지 마.”
그러나 딱히 위로되는 말은 아니었다. 케일란이 미간을 와장창 구겼다.
“너무하잖아! 흐윽!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은 내 자랑이었다고! 흑흑!”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나름 겉멋에 신경을 쓰는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이쯤 되니 너무 불쌍해 보였던 것인지 안나마저 그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마 모근까지는 타지 않았을 거예요. 곧 자라겠죠.”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하지만 그녀의 위로는 케일란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잡일 따위를 하던 안나가 자신을 위로하기까지 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인질 주제에 어디서 감히 귀한 하녀장에게 소리를 질러?
분노한 레이나가 능력을 사용했다. 케일란의 머리에 새카만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른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두피에 뜨거운 불꽃은 조금 심하지 않나.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레이나가 뜨거운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지 말라며 조용히 말했다.
“자, 됐지?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혹시 겨울 쿨톤이야? 검은색이 잘 어울리네.”
아, 뜨거운 게 아니었어? 그럼 됐지, 뭘 울고 그래. 다들 다시 마음 편히 식사를 재개했다.
그 사이에서 홀로 한참이나 훌쩍이던 케일란은 이내 배가 고팠는지 자리에 앉아서 스푼을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레이나가 불꽃을 거뒀고, 그 이후로 그가 머리카락 때문에 우는 일은 더는 없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베로니카는 수확한 작물과 과일을 가지고 마을로 돌아갔다.
시간이 조금 늦었지만 혹여나 살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큰 목소리로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나와 봐!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가져왔다고!”
작은 마을이라서 그런지 베로니카의 목소리는 곳곳에 닿았고, 곧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뭐? 신선한 과일? 채소?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과일이라니, 못 먹어 본 지가 벌써 반년은 되어 가는데 갑자기 그걸 어디서 가져온 거야?”
설명을 생략한 베로니카가 마차 짐칸에 덮어 놓았던 담요를 걷어 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갓 수확한 과일과 채소가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세상에, 이게 웬일이야!”
“이거 설마 루꼴라야?!”
“콜리플라워도 있잖아?”
조금이지만 사과와 블루베리도 있었다.
제일 처음 마을에서 사 간 묘목에서 열린 것들이었다.
장식용으로 가져다 놓기만 했지, 실제 열매를 본 것은 처음이라 모두가 신기해하며 갓 딴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구경했다.
“이 귀한 걸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저 위에 심연의 저택에서 재배한 거야. 공녀님께서 온실을 만드셨거든. 그 어떤 작물이라도 재배가 가능하지.”
베로니카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레이나의 힘도 힘이었지만, 본인이 가장 열심히 재배했기에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이 경악하며 되물었다.
“설마 전에 본 그 검은 불꽃?!”
“어어! 마을에 왔었던 그 남자 손에 둘러진 마왕의 마법!”
레이나의 검은 불꽃은 아직도 그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였다.
“베로니카! 요즘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자꾸 외출한다 싶더니, 설마 심연의 저택에 다니던 거였어?”
“그러고 보니 지금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그거! 검은색 불꽃 아니야? 설마 너 마왕의 부하라도 된 거야?!”
말도 안 되는 추측이 난무했다.
지난번에 집사가 마을에 방문했을 때 대충 아니라고 하며 넘어갔던 탓이었다.
이제는 레이나가 마왕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베로니카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마왕 아니라니까 그러네! 루벨라이트 공녀님이시라고! 그저 마법이 검은색일 뿐이고, 과일이나 야채를 즐겨 드시는!”
“그거나 그거나!”
“자꾸 그 사람 얘기하지 말라고! 연관되는 것도 무서우니까!”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특히 ‘그거나 그거나’는 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마을을 방문했던 집사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베로니카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치 울화라도 터질 것처럼.
“아! 아니래도! 아니야! 그냥 평범한-아니, 능력 있는 공녀님이실 뿐이라고!”
그렇지만 검은색 마법을 곁들인 탓에 누구도 그녀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좋은 마음으로 싸게 팔려고 가져온 작물들인데, 괜히 마음만 상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냥 대충 둘러대고 비싸게 팔아먹기라도 할걸.
어차피 공작 성에서 매년 보상금이 나와 다들 여유도 있을 텐데.
짧은 후회를 하며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때였다. 작은 손이 베로니카의 외투 자락을 붙잡았다.
“베로니카 아주머니, 이게 뭐예요?”
이제 갓 8살이 된 아이였다.
5년 전 마왕이 보낸 마물들로 인해 부모를 잃고, 공작 성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오빠와 단둘이 마을에서 사는 여자아이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북부에서만 산 아이는 과일을 처음 본 모양인지 호기심을 보였다.
레이나가 마왕인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 베로니카가 소녀의 입에 블루베리 한 알을 넣어 주었다.
“와아! 새콤달콤해!”
다행히 편견이 없는 아이는 있는 그대로 맛을 표현하며 즐거워했다.
덕분에 사람들과 언쟁을 하며 불쾌해졌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베로니카가 소녀에게 사과를 건네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야무지게 한입 베어 물었다.
“이것도 너무 맛있어요! 아삭하고 달콤해!”
“뭐야? 뭔데요? 야, 너 뭐 먹어?”
“베로니카 아주머니! 나도 줘요!”
검은색 마법 때문에 배척했던 어른들과는 다르게, 아이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평소에 과일이나 채소를 볼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갑자기 몰려든 관심에 피식 웃음을 흘린 베로니카가 손으로 과일과 채소를 가리켰다.
“궁금하면 먹어 보렴. 마차에 싣기 전에 깨끗하게 씻어 온 거라 그냥 먹어도 된단다.”
“우와!”
“나 먹을래요!”
“나도! 나도 주세요!”
아이들이 예쁜 색깔의 과일을 집어 입에 넣었다.
얼리고, 말렸던 음식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큼함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때였다.
“뭐 하는 거야!”
“로빈! 엄마가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
“아무거나 아닌데? 베로니카 아주머니가 준 건데?”
“그래도 안 돼! 그건 함부로 먹어선 안 되는 끔찍한 거라고! 어서 이리 와!”
기겁한 부모들에 의해 아이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 과일과 채소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신탁과 마왕, 그리고 검은색 마법을 경계하는 건 잘 알겠는데.
‘그렇다고 남이 공들여 키운 작물을 끔찍하다고 표현하는 건 좀 너무하잖아? 나름 한 마을에서 같이 오래 산 사이인데, 믿어 주지도 않고.’
스스로가 부정당한 것도 아닌데 괜히 속이 타고 마음이 쓰렸다.
베로니카는 마법이 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번 이런 취급을 당했을 레이나가 조금 가여워졌다.
물론 그녀 역시 레이나에게 고용되지 않았다면 거리를 두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는 레이나가 마왕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흥! 같은 마을 사람들이라서 좀 싸게 주려고 했는데. 앞으로 달라고 하기만 해 봐라.”
서운함을 푸념으로 털어 낸 베로니카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뒤늦게 자신의 옆에 홀로 남겨진 아이가 보였다.
데려가는 이가 없는 걸 보니 아직 공작 성에서 오빠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맛있었니?”
베로니카가 소녀에게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베로니카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웠다. 그녀가 과일과 채소를 담요에 싸서 아이의 손에 들려 주었다.
“자, 그럼 이거 다 가져가서 먹으렴. 오빠 돌아오면 함께 먹도록 해. 내가 기른 걸 줬다고 하면 될 거야.”
“정말요? 다 먹어도 돼요?”
“그럼, 그렇고말고.”
“와!”
신이 난 아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는 꾸벅 배꼽 인사까지 하며 감사의 표시를 마치곤 집으로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도 저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며 먹어 줬으면 좋았으련만.
기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두고 봐라.
조만간 어디서도 보기 힘든 귀하고 맛있는 작물을 잔뜩 심어서,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제발 팔아 달라고 해도 팔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