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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화

신의 축복을 받은 그레이스 제국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신탁이 하나 존재했다.

[세상이 어둠의 힘을 지닌 마왕에게 잠식당했을 때, 이세계의 소녀가 나타나 모두를 구원하리라.]

그러나 신탁이 무색하게도 세상은 천 년 동안이나 평화로웠다. 모두가 신탁의 진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고명딸인 레이나에게서 불길한 검은 마법이 발현되었다.

당시 고작해야 8살이었던 레이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었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어떻게 우리 가문에서 저런 끔찍한 악마가!”

마왕이 깨어났다는 소문이 퍼졌다간 가문 자체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방법을 강구하던 루벨라이트 공작은 딸인 레이나를 유폐하고, 그녀의 힘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레이나의 손에 닿았던 것들도 없애 버렸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전부.

그렇게 10년.

악마를 낳았다며 공작에게 핍박받던 공작 부인은 명을 달리했고, 레이나의 존재는 점점 잊혀 가는 듯싶었다.

후처를 통해 본 귀한 아들이 자꾸 환청이 들린다며 밤마다 울음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어머니, 아버지! 무서워요……! 흐흑, 자꾸 목소리가 들려요……! 지하에 괴물이 살고 있어요……! 절 죽이러 올 거예요……!”

새 공작 부인은 그렇지 않다며 아들을 달랬지만, 그녀 역시 의문의 목소리를 들은 바가 있었다. 두 모자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이쯤 되자, 공작은 당장이라도 온 세상에 비밀이 새어 나갈 것만 같았다.

레이나를 지금처럼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전 부인처럼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으나, 그녀는 그럴 수 없는 존재였다.

근처에 다가가는 것도 두려웠기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아니,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에 내다 버리는 것이 현명할 듯싶었다.

그리하여, 해가 지고 달마저 구름에 가린 어두운 새벽.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세상에 나타나선 안 될 존재가 밖으로 나왔다.

무려 1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레이나는 인간의 형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단단히 포박된 전신에선 검은 연기가 일렁였고, 넘치는 마력으로 색이 바랜 머리카락은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대체 저게 무어란 말인가……!’

하인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질겁했다.

공작이 시키는 대로 포박하여 밖으로 끄집어내기는 했지만, 본능적으로 치밀어오르는 공포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서 그 끔찍한 것을 마차로 옮겨! 빨리 눈앞에서 치워! 서두르지 않고 뭘 해?!”

그것은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겁에 질려 어서 제 딸을 치워 버리라며 윽박질렀다.

하지만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지하에서와 달리, 지금은 주위에 있는 촛불로 인해 모두가 그녀의 모습을 본 뒤였다.

아무리 주인의 명령이라고 해도 감히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하인은 없었다.

그렇게 새카만 연기만이 어두운 새벽을 더욱더 불길하게 만들어 가고 있을 때였다.

번쩍. 레이나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헉……!”

“히, 히익!”

지켜보던 이들이 놀라 숨을 삼켰다. 레이나의 눈이 피로 물든 붉은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눈이 핏빛을 내며 주변을 훑었다. 안광이 닿는 곳곳마다 저주가 깃드는 것만 같았다.

“저, 저건, 저건……! 신탁에 나오는 마왕……!”

개중 누군가는 신탁을 떠올리고는 까무룩 눈을 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마, 말도 안 돼!”

“신탁이 사실이었다니……!”

분노한 마왕의 힘이 모두를 덮치고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여, 이윽고 마왕의 시대가 도래하리라.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을 때였다.

바싹 말라비틀어져 껍질이 벗겨진 레이나의 입술이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열렸다.

“미안한데, 혹시 장거리 여행이라면 마차에 베개 하나만 같이 넣어 줘요. 그냥 누워 있으려니 목이 너무 아프고 머리에 쥐가 다 나네.”

그러나 불행히도 그곳에 그녀가 한 말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피가 찔끔 묻어나는 입술을 혀로 적신 레이나가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푹신한 건 바라지도 않으니, 대충 비슷한 거라도 좀. 보고만 있지 말고 빨리요.”

답답하다는 듯 재촉하는 말에 누군가가 바람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또 다른 누군가는 손을 허우적대다가 근처에 있던 사파이어 조각상을 집어 레이나에게 내던졌다.

퍽!

그녀의 몸에 맞은 조각상이 데굴데굴 굴러 기묘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레이나의 눈이 지옥에서 피어난 불꽃처럼 새빨갛게 타올랐다.

여기에 있는 전원,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한 뜻을 내포한 것처럼.

“히, 히익!”

“으, 으아아악!”

이제 모두 신탁대로 죽는 것인가!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이들에게 레이나가 흉흉한 눈을 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시선이 저택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치울지 고민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저주가 쏟아질 것만 같아서 모두가 바들바들 떠는데, 레이나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것도 이리 던져. 저것도. 저것도. 저기에 있는 것도. 전부 다 이리 내놔.”

겁에 질린 하인들은 반사적으로 레이나가 가리키는 것들을 모두 가져왔다.

황금으로 만든 초대 공작의 전신상은 물론이고, 사파이어를 깎아 만든 아름다운 새의 조각상, 희귀하고 거대한 보석 장식물들.

이름을 길이 남긴 명인의 검, 제국을 수호한 전설적인 기사의 방패, 명장의 혼이 깃든 세기의 명화들까지.

“전부 마차에 실어.”

하인들의 움직임이 평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재빨라졌다.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레이나의 지시에 귀를 기울이고, 따랐다.

그들의 신속한 움직임 덕분에 짐칸은 물론이고, 마차 안쪽에까지 짐이 가득 찼다.

일을 마친 하인들이 바들바들 떨며 지시를 기다리는 것을 본 레이나가 전신을 옭아맨 포박을 검은 마법으로 순식간에 불태웠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기지개를 켜자, 사색이 된 공작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뒷걸음질 쳤다.

“사, 살려, 살려-”

그가 목숨을 구걸하며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장이라도 저 불온한 검은 연기가 자신을 녹여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볼품없는 몰골의 공작을 그대로 지나친 레이나는 더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제 발로 마차에 올랐다.

‘서, 설마 이대로 떠날 생각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신탁대로라면-아니, 그동안 공작이 한 일을 생각한다면 이곳의 전부를 능지처참해도 모자랄 판인데.

레이나의 돌발 행동에 얼이 빠진 자들이 뻣뻣하게 굳어 눈만 끔뻑였다.

이는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겨우 목숨을 부지했나 싶어 참았던 숨을 내쉬려는데, 갑자기 창문을 연 레이나가 휙 고개를 내밀었다.

바싹 겁을 먹은 공작이 몸을 움츠렸다.

“양육비라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비웃음을 머금으며 어서 출발하라는 듯 마차 외벽을 쿵쿵 두드리자, 놀란 마부가 허겁지겁 마차를 출발시켰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 여물을 잔뜩 먹인 말들이 힘차게 다리를 뻗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공작과 하인들을 뒤로한 채, 마차는 곧 점이 되어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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