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21화
“무얼 보고 있었습니까?”
뒤를 이은 대신관의 질문에 성녀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아, 지하 창고요. 이렇게 멋진 저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문이 있어서 뭘까 궁금해하던 참이었어요.”
이제는 딱히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듯 다른 곳을 돌아보고 싶다는 표정을 짓자, 창고 문을 힐끗 확인한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더 구경하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대신관은 레이나가 유폐되어 있었던 창고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그래도 한번 살펴보았을 텐데, 대의가 코앞인 데다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사소한 장소 따위를 주의 깊게 볼 여유가 없었다.
돌아가자는 말에 성녀가 반색했다.
“모처럼 오셨는데 더 계시지 그러십니까.”
공작이 한 차례 권유했으나, 대신관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공작을 올려다보는 성녀의 눈 역시 흥미라곤 전혀 없이 메말라 있었다.
“응접실에서도 말했다시피 일이 바빠 그럴 여력이 없네요.”
그래도 공작의 권유이니 잠깐이라도 저택을 둘러보는 것이 예의이거늘, 대신관은 깔끔하게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네, 저도 어서 돌아가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어요. 제가 모르는, 공작님만큼 아픈 환자가 아주 많을 테니까요.”
가만히 대신관의 뒤를 따라도 되었을 성녀 역시 굳이 입을 열어 공작의 권유를 거절했다.
“흠, 흠. 그러셨군요. 큰일을 하셔야 하니 어쩔 수 없겠지요…….”
그쯤 되자 공작은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허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여기서 나고 자란 장녀는 물론이고, 공작 부인과 장남마저 떠나 버린 터라 공작저는 어쩐지 쓸쓸함마저 감돌았다.
공작 스스로도 허전하여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대신관과 성녀에게 저택을 조금 더 돌아보라고 권할 정도였거늘.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대신관과 성녀가 돌아가자, 공작저는 누구도 살지 않는 텅 빈 공간처럼 고요해졌다.
“차 가져와! 다들 뭐 하고 앉았어?!”
그에 머쓱해진 공작이 괜히 하인들에게 호통쳤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기하던 하인들이 서둘러 다과를 내온 뒤, 다시 공작의 눈에 띄지 않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주인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일을 잘한다고 칭찬해야 마땅하건만, 어째서인지 공작은 현 상황이 불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다들 돌아오게 되어 있어. 제까짓 게 집을 나가 봤자지!”
보석류를 꽤 챙겨서 나간 것 같기는 했지만, 사치스러운 여자이니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권력 때문에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 분명했고.
그러니 기다리는 것이 답이었다. 대신관이 주고 간 큰 숙제도 있으니, 바삐 살다 보면 어느새 머리를 조아리며 돌아와 있을 것이다.
‘그땐 절대 봐주지 않을 테야. 돌아오자마자 혼을 단단히 내서 다시는 대들지 못하게 만들어야겠어.’
생각을 마친 공작이 집사를 호출했다.
“출신을 가리지 말고 최대한 많은 사병을 모아라. 일단은 계약만 해 두고, 호출하면 바로 모일 수 있도록 연락망을 만들어 놔.”
사병이라는 말에 흠칫 놀란 집사였으나, 공작의 말을 거역한 전 집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아는 그였기에 그저 조용히 예를 차리고는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갔다.
*
곧장 신전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대신관은 성녀와 함께 남부 공작 성으로 향했다.
“대신관님! 성녀님!”
도착을 알리자 남부의 공작이 헐레벌떡 버선발로 마중을 나왔다. 눈은 성녀에게 향한 채였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 추궁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먼 길을 와 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여쭈었습니다.”
혹여나 오해라도 할까 봐 남부 공작이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하인들에게 서둘러 다과를 준비하라고 눈짓한 뒤, 두 사람을 손수 응접실로 안내했다.
“음? 대신관님?!”
그런데 뜻밖에도 선객이 있었다. 다름 아닌 모어 백작 일가였다. 모어 백작가의 영지가 남부와 인접해 있어 두 가문의 사이는 그럭저럭 좋은 편이었다.
남부 공작이 몹시도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대신관과 성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오실 줄 알았다면 따로 자리를 마련했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온 제 잘못이지요.”
다행히 대신관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 방긋 웃기까지 했다.
“마침 많은 도움이 필요했는데, 잘되었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남부 공작과 모어 백작 일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에는 케일란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인식에서 가족에게 잡힌 그는 빠져나갈 틈을 찾지 못하고 남부의 공작 성에까지 끌려와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케일란이 성녀에게 눈짓했다. 딱히 그녀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나마 물을 사람이 성녀밖엔 없었다.
그러나 성녀도 대신관의 계획을 모르는 상태였다. 그녀가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젓자, 불만스럽게 혀를 찬 케일란이 비뚜름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곧 마물들이 날뛸 것입니다.”
다행히도 머지않아 케일란을 포함한 사람들은 대신관의 방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금도 간간이 마왕과 함께 마물이 날뛰고 있는데, 여기서 더 많은 마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에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신탁이 내려온 겁니까?”
모어 백작가의 장남의 물음에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마물이 나타날 거라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빠르게 성녀의 레벨을 1,000까지 올려야 했기에, 신전에 틀어박혀 죽기 직전까지 마물을 뽑아낼 생각이었다.
그러한 대신관의 속셈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마다 마왕을 욕하며 치를 떨었다.
이미 충분히 시달리고 있거늘, 얼마나 더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냐는 원망의 말과 함께.
“그리고 신께서는 마물이 남부에 집중될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한곳에 마물을 소환해야 성녀의 광역 마법으로 잡기 편할 것이다. 시간도 단축될 것이고.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할 지역으로는 남부가 제격이었다.
번번이 남부를 위기에서 구해 낸 성녀를 남부 공작이 무척이나 아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찾아오셨군요…….”
“네. 아무래도 신전과 가장 가까운 남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대신관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남부 공작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부의 모든 인력을 총동원하여 마물을 소탕하겠습니다. 성녀님도 계시니 모두 안전할 테지요.”
성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애정과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가 말만 한다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런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성녀가 조용히 눈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때까지 대화를 경청하던 모어 백작 부인이 마침 잘되었다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 케일란도 여기에 남아 함께 마물을 상대하는 편이 좋겠네요.”
갑자기 자신이 언급되자 케일란이 미간을 찌푸렸으나, 남부 공작은 맞는 말이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케일란 영식을 남부의 기사로 임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에 모어 백작 일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뭐든 좋으니 케일란에게 명예직을 하나 내려 달라 부탁하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사라니. 귀족 출신인 만큼 정식으로 황성에서 받는 기사직보다는 못했지만, 그간의 케일란의 언행과 지금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넘치는 자리였다.
더불어 성녀와 함께 남부에 나타난 마물들을 해치운다면, 땅에 처박히다 못해 내핵까지 뚫고 들어간 케일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씨! 진짜! 싫다니까!”
그런 가족들의 노력도 모르고, 케일란이 불같이 화를 냈다.
어차피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살겠다는데, 대신 살아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훈수를 두는지 모르겠다며 그가 불만을 쏟아 냈다.
“기사는 무슨 기사야! 난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케일란, 이놈의 자식이! 감히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물론, 불행히도 돌아온 것은 백작 부인의 등짝 스매싱뿐이었다.
매번 제 인생을 멋대로 휘두르려는 백작 부인에 잔뜩 화가 난 케일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흠, 케일란 영식께서 조금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긴 하지만, 실력은 출중하여 함께 남부에서 싸워 줬으면 했습니다만…….”
그러지 못하게 될 것 같은 상황에 남부 공작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백작 부인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공작에게 답했다.
“쟤가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마물이 나타난다는데 보고만 있을 애는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근처 어딘가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마물이 나타나면 금방 돌아올 테니까요.”
그러니 기사직을 내려 달라며 백작 부인이 부탁하자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남부를 도와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편, 오가는 대화가 영 불편했던 성녀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행할까요?”
“네?! 아, 아니요!”
목적지를 들었으면서 동행하겠다는 공작에 말에 기겁한 성녀가 헐레벌떡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역시 조금 불편했다. 잘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종종 이렇게 쓸데없이 과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대신관은…….
[상태 이상에 걸렸습니다!]
[회복 중입니다!]
성녀의 눈앞에 또다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아직 완전히 치유되진 않았지만, 자체 회복 능력 덕분에 어느 정도 기억을 회복한 그녀가 복잡한 심경으로 복도를 걸었다.
한데 그때, 조금 전에 뛰쳐나간 케일란과 조우하게 되었다.
“아……!”
그는 몹시도 못마땅한 얼굴로 성녀를 훑더니 이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야, 너는 그냥 주변에서 잘한다면서 추켜세워 주니까 마냥 행복하고 재미있지? 대신관의 말이라면 전부 다 옳다고 생각하고?”
케일란이 혀를 차며 그녀를 비웃었다. 그는 레이나보다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세상 고고한 척하는 성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 성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이윽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