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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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는 정말로 유능했다. 물통부터 알아보긴 하였지만, 생각보다 더 건축에 조예가 깊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나무를 썰고, 땅을 깊게 파고, 나무를 옮기고, 고열로 단단하게 붙였더니 그럴듯한 온실이 뚝딱 만들어졌다.
“꽤 하잖아? 반나절도 되지 않았는데 온실을 만들어 내다니.”
물론 만든 것은 레이나였다.
집사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힘을 사용하여 순식간에 완성해 버렸으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라지만, 주인에게 실컷 지시를 내린 집사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레이나 역시 어딘가 찝찝하고 피곤했으나, 완성된 온실을 앞에 둔 뿌듯함이 더 컸다.
“이제 모종만 심으면 되는 거야?”
“예, 예……. 심은 작물들이 얼지 않고 잘 자라도록 25도 전후의 불꽃만 만들어 주신다면 될 것 같습니다…….”
“그거야 쉽지.”
그의 말대로 바닥에 따뜻한 불꽃을 깐 레이나의 시선이 조금 위로 향했다.
햇빛을 받기 위해 뚫어 놓는 천장이었다.
“근데 말이야, 집사. 저것도 어떻게 해야 하지 않아?”
소복소복 조용히 내리는 눈이라면 지면에 깔아 놓은 불꽃으로도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북부의 눈은 생명을 앗아 갈 듯 매서웠다.
여차하면 작물이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뒤늦게 레이나의 지적을 알아차린 집사의 안색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당황한 그가 입을 벙끗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은 그녀가 다시금 손을 뻗어 온실 천장에 뜨거운 불꽃을 흩뿌렸다.
“어때, 이 정도 열기를 깔아 두면 대량의 눈이 내려도 작물에 피해를 끼치는 일은 없지 않겠어?”
외려 눈들이 수증기와 물이 되어 작물에 내릴 것이다.
그럼 그날은 물을 안 줘도 되니 완전히 개이득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눈이 내릴 때마다 온도를 조금씩 조절해 주는 것만으로도 번거롭게 물을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물론 번거롭게 물을 주는 것은 집사일 테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이었지만. 어쨌든.
‘뭐야. 나 진짜 사기잖아?’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감탄밖에 안 나왔다.
이 좋은 능력을 왜 사람을 죽이는 데에만 사용했던 걸까.
‘레이나, 너 세계 정복을 하지 말고 농장을 경영하지 그랬어. 그럼 세계 최고의 농장주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작물에 대해 잘은 모르나, 온실만 제대로 짓는다면 재배하기 까다로운 향신료나 과일, 약재 같은 것도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아도취 상태인 레이나의 옆에서 집사가 손가락으로 소심한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시각.
‘대체 뭐 하는 짓거리람.’
마차를 끌고 저택에 도착한 여성이 북 치고 장구 치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떨떠름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마부에게 말을 걸었던 중년 여성이었다.
집사의 끈질긴 레이나 자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을 사람들이 검은 마법을 불길하게 생각했기에, 그들을 대신하여 모종과 묘목을 모아서 저택에 찾아온 참이었다.
“주문한 것들을 가지고 왔는데…….”
뒤늦게 레이나와 집사의 시선이 여성에게 향했다.
전 공작 부인을 쏙 빼닮은 레이나의 얼굴에 흠칫 놀란 여성이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처음으로 받아 본 정중한 인사에 레이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 요 며칠 홀대를 받아서 그렇지, 자신은 그런 위치의 사람이었다.
만난 지 1분도 되지 않았건만 벌써 눈앞의 여인에게 호감이 생겼다.
레이나는 여성의 뒤로 보이는 마차를 힐끗 보며 물었다.
“모종을 가져왔다고? 이름이?”
“아, 음. 바질과 루꼴라, 케일, 로메인, 트레비소, 그리고-”
“잠깐.”
여성이 자신이 가져온 모종들의 이름을 천천히 읊는데, 레이나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 말이야. 모종 말고 네 이름.”
“아아.”
하긴, 모종이 한두 개도 아닌데 일일이 이름을 늘어놓는 것도 웃겼다.
괜히 머쓱해진 여성이 뺨을 긁으며 대답했다.
“베로니카입니다.”
“베로니카. 예쁜 이름이네.”
이름을 칭찬한 레이나가 그녀의 몸에 따뜻한 기운을 둘러 주었다.
화들짝 놀란 베로니카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제는 집사가 된 마부의 손을 만져 보아서 알고 있기는 했지만, 직접 몸에 두르게 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 따뜻해…….”
베로니카의 전신에 따뜻함이 들어찼다. 차게 언 몸의 겉만 녹여 주던 난로와는 차원이 달랐다.
레이나의 검은 불꽃은 작은 난로로는 덥힐 수 없는, 그녀의 심장과 뼛속 구석구석까지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저녁때쯤 사라질 거야. 추워 보였는데 이제 따뜻하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말이야, 베로니카.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레이나의 입술이 아주 조금 호선을 그렸다. 그저 그것뿐이었는데, 퍽 우아하고 고혹적으로 보였다.
윈터스노우 공작님도 참 잘생긴 얼굴인데, 귀족들은 원래 다 저런가.
빼빼 말라 다 찢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도 저렇게 사람의 마음을 쏙 빼놓을 것처럼 매혹적이라니.
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고 저리 웃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베로니카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예, 공녀님.”
“혹시 너, 농사지을 줄 아니?”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베로니카의 떨림이 멈추었다.
농…… 사? 농, 사? 자신이 아는 그 농사? 이렇게 우아하게 웃어 놓고 갑자기 농사?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해서 북부로 넘어오기 전까지는 농업을 하는 부모님을 도왔기에 어느 정도라면 압니다.”
“어머나, 세상에! 이런 우연이.”
레이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가 반색하며 베로니카의 손을 잡았다.
“혹시 지금 바쁘니?”
“아, 아, 아니요.”
아무리 소문의 검은 마법 능력자라고는 해도, 귀족에게 손이 잡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걸걸한 성격의 그녀라도 말을 더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되었다는 듯 레이나가 곱게 눈을 접었다.
“정말 정말 잘되었구나. 그럼 우리가 만든 온실 좀 봐주지 않겠어?”
“온실, 이요?”
저게 온실이었어? 아니, 북부에서 어떻게 온실을 만들 수가 있지?
싶은 얼빠진 얼굴로 눈을 끔뻑이자, 레이나가 맞잡은 베로니카의 손을 당겨 갓 완성한 온실로 데려갔다.
따뜻한 온기를 내뿜는 온실 앞에서 레이나가 집사를 향해 턱짓하자, 용케 뜻을 알아들은 그가 온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베로니카는 집사의 설명에 맞춰 온실 안팎을 돌아다니며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확실히 조건 자체는 충족이 되어 있군요. 외부에서 찬기가 계속 불어닥친다는 것만 빼면 말이지요.”
그녀가 온실 외벽을 매만지며 말했다.
외부에서 불어오는 찬기와 내부를 덥히는 온기가 충돌하여 온실이 금방 망가져 버릴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극도로 찬 기운이 외부에서 공격하면 벽과 기둥에 균열이 생기고도 남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레이나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연기처럼 뿜어져 나온 불꽃이 온실 외벽과 그 주변까지 모두 감쌌다.
“헉!”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내뿜는 마법에 베로니카가 숨을 삼켰다.
처음에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는데, 지금은 그 능력이 너무나도 경이롭고, 또 그것을 편안하게 사용하는 레이나가 대단해 보였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녀와 눈을 맞춘 레이나가 물었다.
“아직도 별로일 것 같아?”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외부까지 온도를 맞춰 주셨으니, 꾸준한 보수만 해 준다면 오랫동안 튼튼하게 버틸 것 같습니다.”
“그래? 다른 단점은 없고?”
“예.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남은 건 작물에 이상은 없는지, 병충해는 생기지 않았는지 매일 확인을 하고 관리해 주는 정도겠지요.”
레이나의 자줏빛 눈이 반짝였다. ‘그게 바로 너인 것 같아.’라는 눈이었다.
변방으로 쫓겨났지만 귀족은 귀족. 그것도 단순한 귀족이 아닌 공작 영애였다.
그런 사람이 사는 저택의 온실을 관리해 달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오오……?!”
말도 안 된다고 연신 생각하는데, 뒤늦게 레이나의 눈빛을 읽은 집사가 그녀와 같은 눈으로 베로니카를 응시했다.
“그렇군요! 여기 계셨습니다! 작물 전문가가!”
아니라고. 난 그냥 주부라고.
심지어 북부의 날씨가 너무 험악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만 보내는 주부였다.
“급여는 걱정하지 마. 충분히 줄 테니까. 마을과 저택을 오가는 데 춥지 않도록 휴대용 불꽃도 선물해 줄게.”
달리 하는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레이나가 말끝을 흐리자 집사의 표정도 흐려졌다. 어째서인지 그의 눈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무려 공작가의 영애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쉽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사실 딱히 하는 일이 없기도 했다.
더욱이 따뜻하게 오갈 수 있도록 편의까지 봐준다니까 뭐, 어쩔 수 없지.
손을 모은 베로니카가 고개를 조아렸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번째 부하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