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27화
헛소리를 내뱉는 루벨라이트 공작을 마주한 로스틴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 공작 부인과 똑같이 생긴 얼굴을 한 이를 딸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로스틴이 물었다.
“그럼 그녀는 누구란 말입니까? 전 공작 부인의 얼굴을 쏙 빼닮았던데.”
얼굴뿐만이 아니라 키나 체형 또한 닮아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으나, 루벨라이트 공작은 이를 전면 부정했다.
“아니, 공작께서 무얼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여식은 그런 끔찍한 것이 아니오!”
“10년 전에 직접 유폐까지 하셨다고 집사가 진술한 바 있습니다만.”
“집사가 잘못 안 것이오! 지금처럼 독단적인 이상 행동을 하는 놈이 뭘 알겠소?! 내 장녀는 몸이 약해 10년 전부터 요양 중이거늘!”
세간에는 그리 발표한 상태였다. 몸이 너무 아파서 요양 중이라고.
아직 세상 경험도 적은 어린놈이 뭘 안다고 재수 없는 얼굴로 따박따박 반박을 하는 것인지.
아무래도 말로만 반박해선 안 될 일인 것 같았다.
공작은 비뚜름하게 선 로스틴을 무시하고 다짜고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는 수갑이 채워져 구금된 상태였다.
그러나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답지 않게 퍽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고문을 당해 지쳐 쓰러진 것일 뿐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공작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네 이놈!”
고함을 치며 방에 들어온 루벨라이트 공작을 발견한 집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가, 가, 각하!”
실수한 것도 모자라, 공녀의 존재를 북부 공작에게 들키고, 심지어 공녀를 암살하려 하다가 실패하여 구금되기까지 한 상태였다.
필시 무사하지 못하리라. 아니, 무사하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삼대, 사대가 멸할 것이 분명했다.
철컹!
수갑이 채워진 것도 잊은 채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으려고 하던 집사의 손목이 침대 프레임에 걸려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런 집사의 멱살을 냅다 잡아챈 공작이 그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짝-!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것이냐!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내가 내 여식을 유폐했다니!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 게야!”
그에 집사는 공작이 레이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선택은 아니었다.
애초에 레이나를 유폐했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외국에서 요양하고 있다며 그녀의 존재를 숨기기 시작했으니까.
어차피 8살 이후로 그녀를 본 사람은 없었고, 가문의 특징이었던 눈과 머리 색마저 변해 버린 상태였다.
대역을 세우든, 앓던 지병으로 급사했다고 하든. 둘러댄 뒤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 버리는 편이 나았다.
의견을 교환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결이 비슷하기 때문인지 동일한 결론에 다다랐다.
살기 위한 한 줄기 희망이기도 했기에 집사가 그럴듯한 거짓말을 읊었다.
“시, 실은 검은색 마법을 사용하는 불길한 것이 스스로를 공녀님이라고 칭하고 있어서 알아서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저, 정말 죄송합니다……!”
물론 로스틴에게 진술한 것과는 다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고문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진술했다고 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고문을 피하려 거짓 진술을 하는 경우는 꽤 많았고, 번복쯤이야 루벨라이트 공작의 권력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다.
혹은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방법도 하나 있었다.
둘 중 공작의 선택은 후자였다.
분에 못 이겨 집사를 때리던 공작이 그의 손에 몰래 무언가를 건넸다.
얇고 긴 뚜껑이 달린 물건.
보나 마나 뻔했다.
루벨라이트 공작은 집사가 스스로 저지른 죄와 함께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걸로 일이 잘 해결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는다면 더 큰 엄벌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단번에 끝내야만 했다. 각오를 다진 집사가 공작에게서 받은 물건을 손에 꽉 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자결하는 것뿐이었다.
문가에 기대서 그 꼴을 보고 있던 로스틴이 집사의 손을 걷어차 버리기 전까지는 그럴 계획이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로스틴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들었다. 뚜껑을 열자 잘 벼려진 칼날이 나왔다.
아주 작은 단도였지만, 무시할 수 없었다.
손목이나 목을 깊게 벤다면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으니까.
어린 공녀를 유폐했다는 점도 그러했지만, 루벨라이트 공작은 인간의 목숨을 벌레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듯싶었다.
로스틴은 그가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이 못 견디게 짜증이 났다.
“집사의 신변은 내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만에 하나 자해 가능성을 염두에 둔 로스틴이 집사의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있었던 일도 낱낱이 보고할 겁니다. 더는 공작께서 하실 일은 없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기를.”
“아니! 나는 돌아가지 않을 거요! 내 집사를 이곳에 두곤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요!”
루벨라이트 공작의 반박에, 로스틴이 듣기 싫다는 양 미간을 찌푸리며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끌어내. 이동석 근처까지 정중하게 모셔.”
이동석까지 데려다주지는 말고,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게 근처까지만.
“잠깐 기다리시오! 아무리 북부의 공작이라고는 하지만, 감히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소!”
루벨라이트 공작이 분노했다. 그는 로스틴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 이를 갈았다.
그러나 이곳의 법은 로스틴이었다. 반역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굳이 귀찮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기에, 로스틴이 어서 공작을 데리고 나가라며 손짓했다.
그에 공작은 쓸모없는 짐짝처럼 기사들에게 들려 성에서 쫓겨났고, 집사는 자해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구속되었다.
‘공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걸 보니 쉽게 공론화해선 안 될 것 같군.’
그랬다간 공녀가 공격당할 위험이 컸다.
아무래도 정식으로 재판을 요구하기 전에 공녀와 입을 맞출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녀가 괜한 의심을 받지 않게 말이다.
다른 마음이나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무고한 사람에게 끔찍한 누명을 씌우지 않기 위한 선택일 뿐이었다.
*
로스틴의 기사들은 진정으로 충직했다. 상대가 공작이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루벨라이트 공작을 이동석 근처에 내버리라는 로스틴의 말을 그대로 따라, 공작을 정말 이동석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벌판에 내려놓았다.
“네놈들 모두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다!”
루벨라이트 공작이 소리쳤지만, 이미 기사들은 미련 없이 사라진 뒤였다.
네, 네. 그러든지 말든지요.
어차피 이곳의 법과 진리는 로스틴이었다. 그들은 그저 제국의 법보다 위인 그의 말을 따를 뿐이었다.
‘이 일을 어찌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공작이 추위에 떨며 갈등했다.
되돌아갈 수도 없고, 되돌아간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일단은 이동석 쪽으로 걷는 것이 좋을성싶었다.
‘어차피 그것이 내 여식이 아니라고 우기면 될 일이기는 한데.’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의 얼굴이 너무나도 전처와 닮아 있는 점이 문제였다.
‘잠깐만. 그 여자가 밖에서 낳은 자식이라고 둘러댈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전처는 사교계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어디서 뭘 하고 다녔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더는 루벨라이트 공작가와 관련이 없는 여자이기도 하고.
‘그것을 낳은 그 여자의 잘못이니, 만에 하나 잘못되면 그리 변명해야겠어.’
애초에 이상할 정도로 레이나는 자신을 전혀 닮지 않았다.
변명이 아니라, 정말로 전처가 외도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녀만 쏙 빼닮아 있었다.
그나마 닮았던 머리 색과 눈 색마저 유폐당한 사이 변해 버려 레이나에게서 공작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부녀지간이라고 하는 것이 의아함을 불러일으킬 만큼.
‘……흠, 좋아. 그렇게 하면 최소한 가문이 망할 일은 없겠군.’
다소의 먹칠은 피할 수 없겠지만, 진실이 밝혀졌을 때 닥칠 비난과 책임보다는 훨씬 나았다.
생각을 정리하니 그럭저럭 마음이 편해졌다.
비록 집사를 없애는 건 실패했지만, 조금 아까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 이상의 허튼소리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제 파악 하나는 잘하는 놈이니까. 암, 그래야지. 안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드디어 모든 것을 깔끔하게 처리할 길이 보이자, 공작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추위와 싸우며 걸음을 서두른 그는 간신히 이동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동석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굳이 신분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자들이 곧장 루벨라이트 공작저로 돌려보내 주었다.
불쾌한 경험과 걱정을 따뜻한 목욕물로 털어 낸 그가 시원한 얼음물과 함께 휴식을 취하려 했을 때였다.
뜻밖의 방문객이 그를 찾았다.
“고, 고, 공작님! 대신관께서 찾아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