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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42화

“머리카락도 꽤 자라서 경께서 대머리였다는 사실은 절대 모를 겁니다. 잘 가십시오. 저도 이만.”

옆에서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체이스마저 케일란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곤 식당으로 사라졌다.

“뭐야, 뭔데…….”

갑자기 이렇게 풀어 주는 게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오늘 하루 업무를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려고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바닥부터 열심히 닦았는데.

‘근데 이렇게 풀어 준다고……?’

이제 가 버리라고? 마치 차이기라도 한 듯 케일란이 황망하게 두 사람이 떠난 복도를 응시했다.

당연히 지금 당장 욕을 한 바가지 날린 뒤 저택을 떠나야 마땅한데, 그게 맞는 건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음? 케일란?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죠?”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자, 베로니카와 마주칠 수 있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케일란이 무언가 이상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곰곰이 그를 훑다가, 이내 그의 목에 검은색 불꽃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녀님께서 용서해 주셨군요! 잘됐네요. 이제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되겠어요.”

당황한 그를 대신하여 베로니카가 축하해 주는데, 화라도 난 듯 일자로 단단히 맞물려 있던 케일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

“예?”

“……다고…….”

그러나 불행히도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작별 인사라도 한 건가 싶어서 베로니카가 어서 가 보라며 그의 등을 두드리자, 갑자기 케일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가! 안 가! 안 가! 안 간다고! 안 갈 거야! 여기에 있을 거야!”

“……예, 예? ……예?!”

왜? 라고 묻기도 전에 그가 씩씩거리며 화를 내곤 식당으로 달려갔다.

식당 앞에 도착한 케일란은 쾅! 부서뜨릴 듯 문을 열어젖히고는 베로니카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리를 크게 질렀다.

“나 안 가! 안 간다고! 안 갈 거야! 안 가!”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안 가, 안 간다고. 메아리도 치는 것 같았다.

아니, 왜 풀어 준다고 해도 안 가는데. 체이스가 레이나의 눈치를 보았다.

식사 준비를 위해 미리 와 있던 탓에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미아와 그녀의 가족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나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서럽다는 듯 케일란이 코를 훌쩍였다.

머리카락이 사라진 것은 유감이었지만, 여기서 지내면서 나름 즐거웠었다.

스스럼없이 대해 주는 사람들도 뭐, 크게 나쁘지 않았고, 식사는 더할 나위 없었다.

때문에 이렇게 급작스럽게 내쫓기는 것은 싫었다. 그냥, 이런 식으로 떠나기는 싫었다.

잠깐의 침묵 뒤, 레이나가 마음의 결과를 발표했다.

“알겠어. 그 대신 청소 열심히 해. 귀 아프니까 소리도 그만 지르고, 문도 천천히 열어. 부서지니까.”

알겠어? 레이나가 시선도 주지 않고 묻자, 케일란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서 앉아.”

“……응.”

언제 문을 부수려 했냐는 듯, 케일란이 얌전히 자리에 가서 앉았다.

미아에게 어서 식사를 내오지 않고 뭘 하느냐는 눈빛을 보내는 것은 덤이었다.

대체 뭐람. 의문이 생겼으나, 모두 모였기에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사람들은 케일란의 목에서 검은 불꽃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설마 자발적으로 남겠다는 뜻인 건가. 머리카락까지 다 태워 놨었는데? 어깨에 칼이 꽂혔던 사람에게 일도 시키고?

물론 매끼 맛있는 식사와 달콤한 디저트를 주고, 시시콜콜한 농담까지 나누기는 했지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선택은 의외였다.

그래도 나름 귀족인데 청소까지 하며 남겠다니. 정말이지 특이한 놈이었다. 따지고 보면 처음 등장부터 범상치 않기는 했지만.

*

청소를 전담할 힘세고 튼튼한 사람이 생겼기에, 하녀장 안나의 시간이 남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밭일을 도울까 했는데, 베로니카의 거절로 한참을 고민하던 안나는 뒤늦게 자신이 그럭저럭 잘하는 일을 떠올렸다.

“내 옷을 수선하겠다고?”

“네. 사실 공녀님 드레스 밑단이 계속 신경 쓰였거든요. 결혼 전에 의상실에서 잠깐 일했던 적이 있어서 수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탁을 하는 과정에서 자꾸 드레스 밑단이 너덜너덜해져서 어쩌나 싶었는데.

‘뭐야, 또 이 엄청난 타이밍은?’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거지? 의아할 정도로 필요한 게 쏙쏙 들어왔다.

“좋아, 그렇게 해 줘. 잘됐다. 청소는 케일란이 전담하면 되니까.”

“감사합니다. 남는 시간에는 저도 청소를 돕겠습니다.”

“그래. 케일란이 힘은 세도 꼼꼼하지가 않더라고. 무리는 하지 말고.”

“네!”

안나는 생각보다 더 솜씨가 좋았다. 의상실에서 잠깐 일한 게 아니라, 의상실 디자이너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레이나가 찢어발겨 놓았던 드레스 밑단들이 안나의 손에 의해 반나절 만에 빠르게 재탄생했다.

타고난 미적 감각이 있는지, 대충 찢어 놓은 밑단에 주름을 만들어 원래부터 그런 디자인이었던 것처럼 수선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거. 왜 이렇게 세련됐어?”

그래도 나름 찢어 놓았던 밑단이 꽤 개성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안나가 수선해 놓은 드레스와 비교하자 넝마가 따로 없었다.

‘다들 그동안 날 뭐로 생각했을까.’

뭐긴 뭐겠어. 거지 같다고 생각했겠지. 현실을 받아들인 레이나는 서둘러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밑단만 고친 게 아니라 옷 이곳저곳도 수선했는지 조금 헐렁했던 전과는 다르게 아주 딱 맞았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이걸 마음에 안 들어 하면 미친 거지.”

이걸 보고도 성에 차지 않아 한다면 머리를 때려서라도 제정신이 들게 만들어야 했다.

안나 덕분에 꼬까옷을 얻게 되어 기쁘게 저택 앞마당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저택에 낯선 여성들이 방문했다.

레이나와 크게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 젊은 여성 셋이었다.

마치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처럼 하나같이 어색한 표정을 짓곤 저택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뭐지? 길을 잃었나?

눈을 끔뻑이며 보고 있자, 뒤늦게 그녀들을 발견한 베로니카가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여기! 다들 들어와!”

“베로니카, 뭐야? 누구야? 친구야?”

갑자기 일하다가 모임을 할 리는 없을 테고. 의아해하며 묻자 베로니카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앞으로 온실에서 함께 일할 사람들입니다. 별 기대 없이 물어봤는데, 셋이나 한다고 하지 뭡니까.”

“그래서 안나에게 밭일을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한 거였구나?”

“예. 이 정도 인력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테니까요. 물론 공녀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하겠지만요.”

사실 말처럼 쉽게 얻은 인력은 아니었다. 퇴근 후에 마을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끝에 얻게 된 인력이었다.

공작 성에서도 저택의 작물을 구매하겠다고 해, 다들 괜찮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베로니카는 문전박대를 당했고, 어쩔 수 없이 외부에서 사람을 구해야 하나 생각하던 때였다.

세 여성이 베로니카의 집에 찾아와 자신들이라도 괜찮다면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왼쪽부터 베키, 캐시, 신디입니다. 인사들 드려. 레이나 루벨라이트 공녀님이셔.”

“아, 안녕하세요!”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송합니다……!”

소개를 받은 베키와 캐시, 신디가 차례대로 레이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나이는 모두 20대 초반. 타지에서 살다가 결혼으로 북부에 오게 된 여성들이었다.

그녀들도 신탁의 마왕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북부 사람들처럼 직접 시달렸던 것은 아니었기에 경계가 덜한 편이었다.

게다가 남편들이 거의 성에서 살다시피 하여, 너무나도 할 것이 없는 북부에 질려서 우울증에 걸리기 직전인 상태이기도 했고.

그래서 용기를 내어 베로니카를 찾았다고 했다. 농사는 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괜찮겠냐고.

설명을 들은 레이나가 손뼉을 짝 마주쳤다. 아주 잘되었다는 듯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허락이라니, 당연히 괜찮지! 원래 하면서 느는 거잖아? 베로니카가 알아서 잘 알려 줄 테고. 안 그래?”

“예. 저도 그럴 생각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새 모종이 도착할 예정이라, 코 묻은 애들 손이라도 빌려야 할 참이었거든요.”

심지어 상당히 귀한 과일의 모종이었다. 맛이 훌륭한 것은 물론이고, 모양과 색까지 예뻤다.

때문에 구하려면 상당한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주문을 취소한 이가 나타나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평소에 누누이 말해 두었거든요. 비싸고 귀한 모종이나 작물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사겠다고.”

결국 운이 좋았다는 뜻이었다.

“베로니카, 나 지금 너무 불안해. 왜 이렇게 자꾸 운이 좋은 거지?”

미세하게 손을 떤 레이나가 베로니카의 팔을 붙잡았다.

좋은 일만 생겨서 불안하다는 귀여운 말에 베로니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글쎄요. 이게 다 마음씨 고운 공녀님께 온 복이 아닐까요?”

“아냐, 아닌 것 같아. 꼭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의 폭풍전야 같단 말이야.”

까닭은 모르겠지만 괜히 불안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만 일어날 순 없었다. 심지어 자신처럼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더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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