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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84화

더 보낸다고?! 레이나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이 많은 술을 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근데 왜 또 로스틴은 주지 말라는 건지.

“와,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모킹주라니……!”

“흠, 흠. 나 병째로 들고 마셔도 돼? 사실 아까 마셨던 건 입가심용조차 안 되었어.”

케일란의 알코올 중독자 같은 발언에도 딴지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아쉬웠던 탓이었다. 딱 한 잔만이라도 좋으니 조금 더 마시고 싶었다.

편지를 다시 고이 접어 봉투에 넣은 레이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뭘 굳이 물어? 마시고 싶은 만큼 마셔. 노엘이 다 같이 마시라고 보낸 거래.”

“어머나.”

“그럼 한 상자 다 내 거!”

케일란이 곧장 상자를 열고 술병을 꺼내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일전에 로스틴이 한 차례 주의를 주었건만, 그에게서 귀족의 고상함 따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으이구, 쯧쯧. 저래서야 언제 훌륭한 귀족이 되려나.

귀족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던데, 이제는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라서 모두가 속으로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아무래도 조만간 로스틴과 함께 식사를 해야겠네.’

레이나 역시 그리 생각했다. 물론 케일란을 생각하는 바다같이 넓은 마음은 아주 잠깐이었다.

병나발을 부는 케일란을 뒤로한 사람들이 술병을 챙겨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다.

*

다음 날, 레이나는 잊고 있던 인물과 조우하게 되었다. 바로 서부로 떠나기 전에 가둬 놓았던 침입자였다.

“일전에는 죄송했습니다! 부디 부하로 받아 주십시오!”

“……갑자기?”

왜 일이 그렇게 된 건데? 레이나가 철장 너머에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박은 침입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있던 케일란이 깐족거리며 설명에 나섰다.

“나랑 구면이라서 내가 잘 설명해 줬어. 공녀는 마왕 같은 게 아니라고 말이지. 북부 미궁은 물론이고, 이번 마물 소동 때 나타난 마물들까지 시원하게 없애 버린 일도 다 말해 줬어.”

에헴. 케일란이 시건방을 떨었다.

그에 침입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아덴 경께서 결코 아니라고 하셨으니 그런 것이겠지요! 심지어 서부도 도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함부로 오해하고 침입해서 죄송했습니다!”

“야! 왜 거기서 아덴이 나와!”

“아, 케일란 님의 설명도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역시 믿음이 가는 건 아덴 경이십니다. 그분만큼 올곧은 분도 없으시니까요.”

“야! 너 이 자식!”

케일란이 분노하며 철창을 발로 걷어찼다. 어디 한번 감옥에서 10년은 썩어 보라며 그가 저주를 퍼부었다.

“아덴이 뭐라고 했는데? 아니, 그것보다 다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오는 거야? 누가 광고라도 하는 거야?”

이러다가 제국 최대의 감옥이 되게 생겼다. 빨리 원인을 찾아서 더는 침입자들이 오지 못하게 막아야 할 것 같았다.

레이나의 물음에 침입자가 씩씩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제가 추리해서 왔습니다. 이번 마물 소동에서 북부가 가장 피해를 입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여겼죠.”

침입자의 이름은 레오. 이름처럼 멋진 연갈색 머리카락에 같은 색의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 물론 지금은 대머리였지만.

직업은 용사였다. 레이나는 레오가 본인의 직업을 말하는 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맞아. 남주 후보 중에 그런 놈도 있었지.’

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던 터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K-성질 머리를 가졌던 그녀는 남주 후보들을 방패로 삼아 서둘러 레벨을 1,000까지 올리고 최종 보스를 무찔러야 한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기억에 남을 정도로 썩 마음에 드는 놈도 없었기에, 연애는 능력치를 얻기 위한 덤일 뿐이었다.

이제는 모두 대머리로밖엔 보이지 않았고.

“아무튼 그래서 북부를 뒤지다 보니 여기까지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마물들을 어떻게 처리했냐고 물으니 다들 공녀님의 이야기를 해서 찾기 쉬웠습니다.”

레이나는 서부에서만 정체를 들킨 게 아니었다. 북부에서도 이미 공공연하게 능력과 존재가 알려진 상태였다.

서부보다 더 대놓고 마법을 사용했는데, 알려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레오가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머리를 쓰는 건 영 재능이 없는데, 그런 제가 추리해서 알아냈을 정도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그런 얘기를 순진무구한 얼굴로 해야겠니. 안락한 삶이 끝났다는 설명에 레이나가 이마를 짚었다.

그래. 뭐, 사실 타인 앞에서 능력을 사용한 순간부터 조용한 삶이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사람들을 도울 때 이미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라 이제 와서 ‘어머나,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놀랄 필요는 없었다.

그럴 시간에 처리할 일이나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았다.

레이나가 철창을 열며 말했다.

“알겠어. 그럼 이제 가 봐.”

“앗! 그런……! 저도 공녀님의 부하로 받아 주십시오!”

“부하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부하 같은 거 안 키워.”

“예? 그렇지만 케일란 님과 아덴 경은 받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받아 주십시오! 두 분 못지않게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다시금 바닥에 이마를 내리찍은 레오에 케일란이 버럭 화를 냈다.

“야! 난 부하 같은 거 아니야! 우린 끈끈한 전우애로 뭉친 동료라고!”

“……아니야. 부하도, 동료도 아니라고. 전장이 아닌데 전우애가 왜 생겨. 그리고 뭘 잘하겠다는 건데.”

그냥 이대로 돌아가 주는 게 제일 도움이 되었다. 이제부터 에일린의 작업물을 확인하고 대금을 치러야 해서 바빴다.

귀찮아진 레이나가 어서 썩 꺼지라며 손을 내젓곤 감옥을 떠났다.

“케, 케일란 님! 저는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아덴이 더 믿음이 간다고 할 때는 언제고! 네가 사랑하는 아덴 경한테 물어봐!”

케일란은 이미 잔뜩 성질이 난 상태였다.

그마저 감옥을 떠나 버렸기에, 어쩌면 좋냐며 쩔쩔매던 레오가 허둥지둥 저택 앞마당으로 나와 아덴을 찾았다.

“아, 아덴 경! 공녀님께서 저택에서 썩 꺼지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럼 그냥 집에 가면 되건만.

고급 약초로 정성스럽게 치료를 받고, 레이나의 무용담까지 들은 이상 부하가 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식물들의 잔가지를 치고 있던 아덴이 벽에 세워져 있는 삽을 가리키며 답했다.

“땅이라도 파면서 버텨라. 며칠 지내다 보면 꺼지라는 말을 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여기에서 지내려면 공녀보단 베로니카에게 잘 보이는 편이 좋을 거다.”

아덴의 시선이 베로니카에게 향했다. 레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아덴도 레이나의 허락을 받고 저택에서 머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베로니카에게 할 일이 없냐고 묻고, 그녀가 가지치기를 부탁한다고 해서 그러고 있었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아덴 경이십니다!”

꿀정보를 얻은 레오가 서둘러 베로니카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손이 부족했던 모양인지, 베로니카가 레오에게 돌무더기를 가리키며 치워 달라고 부탁했다.

“무거우면 안 해도 돼. 나중에 공녀님께서 한 번에 처리해 주실 테니까.”

“아닙니다! 제가 다 옮기겠습니다! 힘이라면 저도 자신 있습니다!”

씩씩하게 외친 레오가 그간 레이나가 없어서 잔뜩 쌓인 돌무덤으로 달려갔다.

마법으로 날려 버리면 그만인 것을, 굳이 열심히 옮기는 꼴을 창문을 통해 본 레이나가 혀를 찼다.

이에 그녀의 옆에 있던 에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십니까? 다시 할까요?”

“어? 아냐, 전부 다 마음에 들어. 에일린, 진짜 천재 아니야?”

실제로 에일린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놓은 상태였다. 도무지 불만이 생길 수가 없었다.

금고와 주방은 물론, 파이프를 여러 개 설치하여 욕실까지 전부 개조해 준 덕분에 앞으로 편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찬이십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 저와 인부들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응. 대금 알려 주면 바로 지급할게. 아! 모처럼이니까 모킹주도 한 상자씩 챙겨서 가.”

“오오!”

“감사합니다!”

임금보다 더 비싼 모킹주를 한 상자나 얻게 된 인부들이 신이 나서 돌아갔다.

그렇게 저택의 개조까지 마치고, 마왕 놈이라고 외치던 용사도 처리(?)하여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였다.

쾅!

레이나가 여유롭게 야외 침대에 눕는데, 담에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쾅쾅!

한 번이 아니었다. 사내들의 비명도 함께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진짜…….’

뒤늦게 레이나는 아까 레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멍청한 자신이 은신처를 추리했을 정도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알 거라고 했던 말.

정답이었다. 아무리 행운이 높다고 하더라도 불가역적인 일은 있는 법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갔고, 이는 마물 때문에 한참이나 시달린 황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행히도 그가 레이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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