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96화
“넌 누구니?”
갑자기 나타나 인사하는 아이에, 레이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어, 어쩌지……?’
펠릭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대로 말을 해도 될지 몰라서였다.
‘누이께선 아버지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이셨는데…….’
그래서 쭈뼛거리며 어떻게 할지 망설이자, 레이나가 펠릭스의 차림새를 훑으며 그의 정체를 가늠했다.
“혹시 하인이니? 공작 놈이 널 놓고 가 버린 거야?”
펠릭스는 집에서 편하게 있다가 뛰쳐나왔기에, 무늬가 없는 하얀 셔츠에 검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질이 아주 좋기는 했으나 귀족의 차림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명색이 공작가의 하인이니, 체면을 지키기 위해 질 좋은 옷을 입혔나 보다 생각할 정도의 복장이었다.
“네, 네……!”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펠릭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거짓말을 했는데,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레이나는 혀를 차며 공작을 욕하고 있었다.
“그 자식,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자기 식솔이면 알아서 잘 챙겨서 데리고 갔어야지.”
사실은 몰래 따라온 것이었는데. 자신의 돌발 행동 때문에 괜히 아버지가 더 욕을 먹게 되어 펠릭스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작은 아이가 안절부절못하는 꼴을 보니 레이나의 마음도 심란해졌다. 그녀가 뒤를 돌며 말했다.
“누가 얘 좀 루벨라이트 공작저까지 데려다줘.”
마침 근처에 있던 집사가 자신이 하겠다며 대답하려던 때였다.
화들짝 놀란 펠릭스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저, 저기! 아, 안 가면 안 될까요?!”
어째서? 레이나가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 나중에 돌아가면 안 될까요……? 지금은…… 돌아가기 싫어요……! 시키시는 일은 뭐든지 할게요!”
모처럼 누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헤어지는 것은 싫었다.
게다가 최근의 루벨라이트 공작은 상태가 몹시도 좋지 않았다.
무언가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두려워했으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조금이라도 그의 곁에서 떨어져 있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엄청나게 멋진 마법을 사용하는 누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이렇게나 멀쩡하다니.’
요양하는 동안 회복한 걸까? 그렇다면 괜히 감동이 밀려왔다.
비록 어머니는 다르지만, 그간 내내 보고 싶었던 누이의 옆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같이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입술을 깨물며 허락을 기다리는 펠릭스의 모습에 레이나의 마음이 상당히 불편해졌다.
사정이 있긴 하겠지만 애초에 이렇게나 어린아이를 하인으로 쓰다니, 너무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그 루벨라이트 공작의 밑에서 일하는 아이이니 상당히 험한 꼴을 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펠릭스를 물끄러미 보던 레이나가 넌지시 물었다.
“너 몇 살이니? 이름은?”
“오, 올해로 열 살이에요! 이름은 펠릭스고요!”
“열 살이라니…….”
펠릭스가 씩씩하게 대답했으나, 레이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열 살은 일할 나이가 아니었다. 신나게 뛰어놀며 여러 가지 경험을 할 때였다.
열 살 때의 자신은 어떠했던가. 레이나가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아, 유폐됐었네. 그것도 여덟 살에.’
안타깝게도 그녀의 처지는 펠릭스보다 결코 괜찮지 않았다.
심지어 전생에선 몸이 아파 밖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었다.
열 살의 자신과 펠릭스를 비교하며 측은지심을 가져 보려 했지만, 불행히도 자신의 상황이 더 좋지 않았기에 입맛이 썼다.
‘……음, 뭐, 어쨌든 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일을 하는 건 가여우니까.’
안타까운 처지에 처한 상태라면 그냥 도우면 될 일이었다.
과연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고민하던 레이나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겠어. 마침 일손이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열 살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까지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충 그렇게 둘러대자 펠릭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할게요!”
펠릭스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정말 아이에게 성인이 하는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흐음, 그럼 무슨 일을 시키지?’
미아처럼 전문적인 기술을 갖고 있어서 정식으로 일을 맡기는 거라면 모를까. 미성년자 노동 착취에 보수적인 K-유교걸 레이나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음료대에서 물을 따라 마시는 한 남성이었다.
‘오호?’
저거라면 다른 일에 비해 크게 힘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저기 음료대 옆에 앉아 있다가 누가 오면 물을 따라 줘.”
물은 원래 셀프였으나, 다들 고생하고 있으니 물 정도는 따라 주는 사람이 한 명쯤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힘차게 답한 펠릭스가 쪼르르 음료대로 달려갔다.
딴에는 진지하게, 재빨리 달려간 것이겠지만, 열 살 아이의 작은 팔과 다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꽤 우습고 귀여웠다.
‘생긴 것도 곱상해서 그런가.’
마치 귀족처럼 하얗고 뽀얀 피부에, 윤기 나는 붉은 머리카락과 맑은 금색 눈 때문에 부티가 났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공작의 머리 색, 눈 색과 같잖아?’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았다. 아이에게 죄는 없겠지만, 갑자기 공작의 얼굴이 겹쳐 보여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왜 자신과 비슷한 외형의 아이를 데려다가 하인으로 부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변태인가?’
레이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게임 초반에 레이나가 공작 일가를 몰살하였기에, 펠릭스는 등장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아이가 제 동생이자 공작의 장남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레이나가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 냈다.
아직 할 일이 태산이었다.
*
잡일이 천직이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펠릭스는 아주 열심히 물을 준비했다.
목이 마른 사람이 오면 그때 물을 따라 줘도 될 텐데, 열정이 넘친 아이는 준비한 모든 컵에 물을 따라 놓고 누군가가 마시기만을 기다렸다.
“물 드실 분 없나요?!”
심지어 호객 행위까지 했다. 남는 것도 없는데, 굳이. 게다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에게 물을 권하는 말투가 퍽 고왔다.
그런 아이의 열정 때문에 근처에서 땅을 일구던 사람들이 목이 마르지 않음에도 괜히 물을 한 잔씩 마셨다.
“거, 한 잔 줘 봐.”
“나도.”
“네!”
그럼 좀 기다렸다가 나중에 또 물을 준비하면 될 텐데. 펠릭스는 누군가가 물을 마시기가 무섭게 잔을 깨끗이 닦아 새 물을 준비했다.
“물 드실 분! 시원한 물이에요!”
“어흠, 그럼 나도 한 잔.”
“나도 줘 봐.”
계속해서 준비되는 물과 호객 행위에, 사람들이 웃으며 물을 마셨다.
서로를 배려하는 퍽 훈훈한 광경이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화, 화장실……!”
“윽, 나도!”
물만 냅다 계속 마신 탓에 화장실이 북새통이었다.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펠릭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화장실을 다녀와 수분이 빠졌을 사람들을 위해 다시 물을 한 바가지 준비해 두었다.
이에 점점 일이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음, 아무래도 다음엔 다른 일을 시켜야겠어.”
레이나가 대단히 큰 바위를 박살 내며 혼잣말했다.
이러다가 큰일이 나겠지 싶었기에, 다음에는 다른 쉬운 일을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
공작저에서도 보였던 레이나의 불꽃이니만큼, 동부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목격하고 몰려들었다.
진짜 마왕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아직 공포심이 다 가신 것이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꽤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눈앞에서 펼쳐진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대체 저게 뭐람!”
“신탁에 나왔던 검은 불꽃으로 농사를 짓다니……!”
세상을 암흑으로 물들일 거라는 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서 무섭기는커녕 좀 어이가 없었다.
물론 신기하기도 했다. 평소에 마법을 쉬이 볼 수는 없지만, 불꽃 마법은 몹시 뜨겁고 얼음 마법은 매우 차갑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한 불꽃이라니, 이건 무슨 뜨뜻미지근한 눈송이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몰려든 사람들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한 번씩 불꽃에 손을 가져다 대어 보았다.
남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아주 신이 나서 구경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케일란이 입술을 삐죽였다.
“야, 말리지 않아도 되겠냐?”
그에 팔짱을 끼고 몰려든 인파를 물끄러미 보던 레이나가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이건 뭐…… 꼭 관광지 같네. 제주도의 유채꽃밭이라든가, 보성 녹차밭이라든가.’
응? 잠깐만, 관광지? 맞아, 지금 여기 관광지 느낌이잖아?
그런데 관광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없어서는 안 될 돈벌이 수단이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레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 엄청나게 좋은 생각이 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