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32화
“큰 건? 뭔데?”
남자가 흐트러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물었다.
아직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았거늘. 그가 눈을 빛내면서 호기로운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대신관이 부드럽게 웃었다.
“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분명 케일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를 만나게 되겠죠.”
*
“공녀님! 재배 환경이 좋아서 그런지 작물이 너무 잘 자랐습니다. 많이 남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얼릴까요?”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작물을 수확하고 있던 베로니카가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온 레이나에게 물었다.
심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음, 얼리면 맛이 없어지는데. 그리고 어차피 새로 심고 재배할 거 아니야?”
그럼 또 빨리 잘 자라서 남아돌게 되겠지. 이렇게나 금방 자란다면 얼리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차라리 신선하게 먹을 수 있는 양만 남기고, 나머지는 팔아 버리는 것이 나았다.
“예. 그렇습니다. 중간중간 휴지기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작물들의 재배 속도가 평균보다 빨라서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럼 필요한 사람들에게 팔자. 마을에 채소 구하는 사람 없어?”
야채 싫어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없으면 좀 싸게 팔고.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많을 겁니다. 북부에서 채소류는 없어서 못 먹는 귀한 것들이니까요. 오히려 보관이 쉬운 육류가 더 값이 쌀 정도로요.”
오호? 레이나의 눈이 반짝였다.
“좋아. 그럼 필요한 사람 있으면 사라고 해. 나름 같은 마을이니까 비싸지 않게 팔게.”
물론 싸게 판다는 말은 아니었다. 적당히 팔겠다는 뜻이지.
“베로니카, 작물은 네 소관이니까 네가 알아서 재량껏 팔아 줄래? 지인 할인 같은 거 넣어도 괜찮아.”
그래도 같은 마을 사람들이니까 선은 지킬 필요가 있었다.
베로니카와 체이스가 사는 곳이기도 하고, 언제 어떻게 엮일지 모르니 너무 비상식적으로 굴면 좋지 않았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이 더 늘어나기만 했거늘, 베로니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일을 한다는 게, 자신에게 믿고 맡겨 준다는 게 이렇게나 기쁜 일이라는 걸 너무 오랜만에 깨달았기에.
“그렇다고 너무 싸게 팔면 안 돼. 내가 아무리 공녀라고는 하지만 가진 게 별로 없거든.”
“하핫, 알겠습니다. 공녀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담을 농담으로 들은 베로니카가 호탕한 웃음을 흘렸다.
멀찍이 떨어진 나무 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케일란의 눈이 빨갛게 빛났다.
‘흠, 저게 바로 그 신탁의 마왕인 건가. 근데 여자잖아? 그것도 꽤 어린.’
물론 자신 역시 스물둘밖에 되지 않았으나, 어쨌든 레이나는 그것보다 더 어려 보였다.
게다가 마왕이 여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신탁을 들었을 때부터 남자 대 남자의 멋진 대결을 꿈꿔 왔건만.
상대가 여자라니, 어쩐지 김이 샜다.
그렇다고 봐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대신관이 조심하라고 일러 주기까지 했으니, 외형만 저럴 뿐 속은 필시 신탁대로일 것이다.
사방에 깔린 검은 불꽃만 봐도 벌써 소름이 돋았다.
케일란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마왕에게는 부하가 몇 명이나 있었다.
셋, 넷쯤일까.
많지는 않았고 성별과 나이, 복장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상당한 실력자들인가?’
겉보기엔 평범해 보였지만, 몸에 검은 불꽃을 두르고 다니는 걸 보면 범상치 않은 자들이 분명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아무리 나라도 한 번에 상대하는 건 무리겠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긴 했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마왕과 그의 수하들이니까.
케일란은 숨을 죽이고 기회를 노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괴상한 건물만 왔다 갔다 하고 있어서 영 틈이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어째서인지 농기구…… 로 보이는 듯한 도구를 들고 있었다.
이따금 모종 같은 것도 들고 있었고, 풀 같은 것을 수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긴 마왕의 본거지일 텐데. 대체 왜 저런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잘못 찾아왔나. 수십 번을 고민하고 고뇌하며 계속 상황을 살피는데, 마침 케일란의 근처로 한 여성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하녀장 안나였다.
‘흐음? 왜소한데? 저건 이불인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체격이 왜소하고 앞치마를 두른 안나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다.
‘하녀인가.’
하긴, 모두가 다 전사일 리는 없겠지. 일단은 저 여자를 붙잡아 정보를 빼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결심한 케일란은 안나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이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장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입을 막았다.
“……!”
다행히 케일란은 전투 능력이 전혀 없는 안나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녀가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이제 숲 깊숙이 데려가서 조금 괴롭힌 뒤, 정보를 빼내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이 케일란의 얼굴 바로 옆에 날아와 꽂히기 전까지는.
‘헉.’
설마 위치를 들킬 줄이야. 곧장 피하지 않았다면 단검이 이마에 꽂혔을 것이다.
서둘러 도망을 치려는데, 그보다도 빨리 단검을 던진 체이스가 레이나에게 소리쳤다.
“공녀님! 오른편 담 바로 너머에 침입자입니다!”
화르륵!
그와 동시에 레이나의 손에서 뻗어 나온 불꽃이 케일란을 추격했다.
당연히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음험한 불꽃이 날아오는 것이 눈에 똑똑히 보였으니까.
하지만 케일란은 불꽃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어떤 지시라도 따르는 불꽃은 멀리 물러난 케일란을 따라가 그를 불꽃 속에 가두었다.
“……?!”
마물들과 공작에게 던진 불꽃과 같은 종류였지만, 공격을 당했다는 충격에 케일란이 바닥을 굴렀다.
고통이 찾아오리라 예상했다. 혹은 당장 몸이 녹아내리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통은커녕 따뜻하기만 했다.
‘뭐, 뭐지? 정통으로 맞은 게 아니라서 그런가?’
불꽃의 힘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케일란이 다시 훌쩍 나무 위로 뛰어올라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아니, 갖추려고 했다.
안나와 미아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비명을 지르기 전까지는.
“꺄아아아악!”
“헉, 세상에.”
뭐야. 반응들이 왜 이러는 건데.
당황하여 아주 잠시 시선이 흐트러진 케일란의 어깨에 단검이 날아와 꽂혔다.
“윽!”
외마디 비명과 함께 케일란이 조금 더 멀찍이 떨어졌다.
그러면서 제 어깨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어째서인지 손바닥에 닿는 것이 맨살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뭐, 뭐야. 뭐야, 이거……?”
맨살은 어깨뿐만이 아니었다. 불행히도 그의 눈에 닿은 모든 몸이 맨살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요 부위의 옷가지는 남아 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대체.
‘왜……?’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맞닥뜨린 케일란의 몸이 굳었다. 왜 자신이 헐벗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사이 서둘러 안나에게 달려간 집사가 넘어진 그녀를 부축했다.
“부인! 괜찮소?!”
“괘, 괜찮아요……!”
대답은 그러했지만, 발목이 삔 모양인지 안나는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이를 본 레이나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이를 간 그녀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온도 올려. 찜질방 불가마 수준으로.”
화르르륵!
그와 동시에 케일란의 몸에 붙어 있던 불이 몸집을 불렸다.
“으아아악!”
방금과는 달리 엄청난 고온이 그를 괴롭혔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케일란이 나무 위에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떻게든 기어서라도 도망치려고 하자, 레이나가 그를 기어코 기절하도록 만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체이스가 단단히 구속했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안됐군. 모근까지 사라진 게 아니라면, 다시 자라려나.’
감히 안나를 다치게 한 나쁜 자식이거늘, 휑해진 머리카락을 보니 조금 안쓰러웠다.
어쨌든 본업이 농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농사만 짓던 체이스의 활약으로, 케일란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였다.
단검을 던진 것도 그렇고, 레이나에게 적절한 보고를 한 것도 그렇고, 기사는 기사인가 보다 싶었다.
“어떻게 할까요?”
케일란을 어깨에 둘러업은 체이스가 레이나에게 물었다. 공작 성으로 데리고 갈지 묻는 것이었다.
성에는 뛰어난 심문관이 존재하니 아무래도 조금 더 빠르게 정체와 목적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로스틴은 자신의 영지에서 난폭하게 구는 모든 생명체를 증오하였기에, 공작 성으로 데리고 간다면 필시 생각했던 것 이상의 엄벌이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레이나의 선택은 달랐다.
그녀가 싸늘하게 내려앉은 붉은 눈으로 자신의 저택을 가리켰다.
“안으로 데려가.”
뜨거운 맛을 보여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