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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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이 되었음에도 루카는 공작 성에 돌아가지 않았다.
모처럼 저주가 풀려 사람의 몸이 되었으니 어서 공작 성으로 가 보라고 했건만, 루카는 뾰로통한 얼굴로 답할 뿐이었다.
“공작 성의 사람들은 재미없어. 다들 할 일이 너무 많고, 날 유리구슬처럼 대해. 근데 레이나는 아니잖아.”
음, 그건 그렇지. 할 일도 없고, 루카를 썩 애지중지하지도 않았다.
뭔가 방금 악의 없는 말의 폭력을 당한 것 같은데, 맞는 말이라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팔짱을 낀 레이나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납득하고 있자, 따뜻한 브로콜리 수프 컵을 손에 든 루카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레이나가 놀아 줘. 어차피 조금 있으면 형이 찾으러 올 테니까 오늘 딱 하루만. 응?”
저주가 풀렸으므로 루카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10살이 되도록 익히지 못했던 귀족으로서의 예절 교육을 받거나, 공부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혹은 형인 로스틴처럼 몸을 단련하거나, 레이나처럼 마법의 재능을 깨우칠지도 모른다.
그 어떤 것이 되었든, 앞으로 루카가 한가하게 놀 시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루카 역시 사람의 몸으로 하고 싶은 것이 아주 많이 있을 테고 말이다. 북부 외의 다른 지역을 보러 가고 싶기도 할 테지.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자신의 몫이어야 했다. 몇 달간 삐이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던 아이와의 얼마 없는 시간인데, 귀하게 쓰지 않으면 아쉬울 것이다.
“좋아, 그럼 우리 보물찾기 할까? 사실 예전부터 같이하려고 저택 여기저기에 보물을 숨겨 놨거든. 누가 더 많이 찾나 시합하자.”
보물찾기 시합이라는 말에 루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보물찾기’ 하나만으로도 꽤 솔깃한데, ‘시합’이라는 말까지 붙어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따로 준비한 보물은 없었지만, 이제부터 저택을 돌아다니며 숨길 예정이었다.
‘너무 많이 먹고 마셨으니까.’
저주가 풀려 기쁜 마음에, 루카는 현재 과할 정도의 음식을 섭취한 상태였다.
그러니 좀 굴리며 몸을 움직이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게 목적이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말이다.
그런 레이나의 속셈을 모르는 루카가 빨리 시작하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 응! 하자!”
“좋아, 하나, 둘, 셋! 하면-”
출발하는 거야, 라고 말을 이으려고 했거늘. 이미 루카는 쏜살같이 자리를 뜬 뒤였다.
배가 불러서 잘 못 뛸 것 같았는데, 뭐가 저렇게 날쌔담.
“어려서 그런가.”
응접실에 덩그러니 남은 레이나가 피식 웃었다. 그녀도 이제 막 성인이 되었으면서, 역시 젊은 피는 못 속인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
한편, 북부에 마물이 나타나진 않았을까 순찰하던 로스틴은 갑작스레 사라진 겨울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북부의 끝없는 겨울 마법은 대신관이 걸어 준 것이건만.
그러나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루카가 위험했다.
로스틴은 서둘러 방향을 틀어 공작 성으로 돌아갔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마법사 동행인이 없는 탓에 말을 달려 돌아가는 길이 퍽 멀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이나 쉬지 않고 달려 공작 성에 도착하자, 불행히도 루카는 그곳에 없었다.
“작은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심연의 저택에 갈 테니 공작님께서 돌아오시거든 그리로 방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걱정으로 미치기 직전의 로스틴에게 친히 전언까지 남긴 상태였다. 안심해도 될 이야기였으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벌써 인간이 된 거지?’
하인에게 전언을 남긴 상태라면, 현재 인간의 모습이라는 뜻이었다.
아직 인간이 되는 날까지는 조금 시일이 남았건만, 루카가 어떻게 인간이 된 것인지.
로스틴의 마음이 더없이 다급해졌다. 그는 서둘러 심연의 저택으로 향했다.
“어? 왔어?”
바삐 도착하자 레이나가 몹시도 태연한 얼굴로 그를 반겼다. 그러고는 로스틴이 묻기도 전에 루카의 상태를 알렸다.
“루카는 자고 있어. 내가 보물찾기를 시켰거든. 신나게 뛰어다니더니, 얼마 놀지도 못하고 잠들었어.”
레이나가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나 자신만만해했으면서, 한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주에서 풀려나 많이 먹고, 이래저래 많이 움직인 하루여서일까. 루카는 보물을 얼마 찾지도 못하고 숙면에 들어가 있었다.
손님방에 곱게 누워 잠을 자는 루카를 확인한 로스틴이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왜 벌써 돌아온 거지…….”
그러면서도 의문을 감출 수가 없어 루카의 앞머리를 넘겨 주며 혼잣말하자, 그런 그의 손목을 붙든 레이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일로 긴히 할 말이 있어. 북부의 겨울이 없어진 것도 포함해서.”
“이유를 알고 있나?”
고개를 끄덕인 레이나는 로스틴에게 제가 아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는 마물과 마물의 소환자만 없애라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대신관이 쓰러졌고, 그 뒤 저택으로 돌아와 보니까 루카의 마법이 풀려 있었어. 북부의 겨울도 사라졌고. 아마 빈사 상태에 빠진 대신관이 마법을 유지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해.”
“……그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뜻이군.”
로스틴이 한 음절, 한 음절을 씹어 뱉으며 답했다.
확실히 이보다 더 완벽한 추리는 없었다.
그가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몹시도 타당한 결론이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대신관이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는 신의 부름을 받은 자가 아니었던가. 아니, 정말 이 세상에 신이 있는 것인가? 신탁이란 게 존재하긴 하는 것이고?
이 세상의 근간을 흔드는 끔찍한 현실에 로스틴은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고, 작고 어린 하나뿐인 동생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자를 수년간 믿고 따랐다니.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 정도였다.
로스틴의 얼굴에 자괴감이 깃들자, 레이나가 그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개며 말했다.
“그래, 맞아. 다 대신관 짓이야. 하지만 속인 놈이 문제지, 그쪽이 문제인 게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이고.”
모두가 피해자였다. 루카는 물론이거니와 로스틴, 레이나, 그리고 이 세계에서 소환당한 세라까지.
아직도 대신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신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본질을 보지 못하느냐며 화를 내고 추궁할 필요는 없었다.
마물을 부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모두를 속인 장본인에게만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었다. 속은 사람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라는 말을 건네자, 로스틴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손을 뒤집어 레이나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쥐더니,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퍽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대신관을 죽여 버리겠어.”
“아니! 잠깐! 안 돼! 기다려!”
마음이 누그러지고 정리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니, 정리된 것은 맞는데, 그답지 않게 조금 극단적인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대신관이 지금 빈사 상태이긴 한데, 그렇다고 찾아가서 바로 죽였다간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쓸 거야. 아직 추종자가 어마어마하다고. 대신관이 좀 아프다고 신관들이 세라를 노예처럼 부리던 꼴을 네가 봤어야 해.”
대신관은 한두 해 입지를 다진 것이 아니었다. 그가 천 년의 세월에 걸쳐서 사람들을 길들여 왔기에 섣불리 공격했다간 역풍을 맞을 것이 분명했다.
“그냥 해치운다고 끝이 아니잖아. 그간 사람들을 농락하고, 그쪽과 루카에게 큰 상처를 준 죗값을 받게 해야지. 그간의 행적을 다 까발려서 말이야.”
게다가 아직 힘도 다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겨우 돌아오나 싶었던 힘을 조금 아까 마물을 해치우며 전부 소모하여 소형 이동석 하나도 사용할 수 없었다.
사실 레이나 역시 퍽 극단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기에, 힘만 남아 있었다면 상황을 깨닫자마자 신전으로 날아가 대신관을 죽이고도 남았을 위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그녀는 대신관에게 생채기 하나 남기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마력을 소모하고 반나절이나 지났는데, 힘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속내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로스틴은 레이나의 말에 공감했다.
5년이나 찾고 또 찾았던 마왕의 정체를 드디어 알게 돼 잠깐 분노로 정신이 나갔었는데, 레이나의 말이 맞았다.
아무런 증거도 확보하지 못하고 다짜고짜 대신관을 죽인다면, 대신관은 그저 미쳐 버린 북부 대공에 의해 살해당한 가여운 순교자가 될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늘 거침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갔던 로스틴은 처음으로 막막함을 느꼈다.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루카와 보물찾기를 하는 내내 그 빌어먹을 자식을 어떻게 엿 먹일까 내내 고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이 하나 있었다.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 나쁜 놈이 했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면 그만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