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33화
노엘의 호언장담대로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서부 전역에 벽보가 붙고 소문이 퍼졌다.
작정한 노엘이 기사는 물론, 하인과 근처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물량 공세를 한 덕분이었다.
물론 소문이 빠르게 퍼진 것은 서부 사람들이 신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그래! 뒤가 구릴 줄 알았어!”
“맞아! 서부만 배척했던 게 이상하다 싶었지!”
서부 사람들의 강한 불신으로 소문은 삽시간에 여기저기로 퍼졌다.
그간 어지간히 서러웠던 모양인지, 그들은 벽보가 붙지 않은 동부와 남부, 수도까지 손수 건너가 사람이 많이 오가는 술집에서 대신관의 이야기를 떠벌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두가 한마음, 한뜻인 것은 아니었다.
동부는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입을 닫고 있겠다는 입장을 표했고, 친신전파인 남부는 극도로 분노하며 테이블을 엎었다.
“미쳤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디 감히 대신관님의 모함을! 신성 모독죄로 죽고 싶어?!”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부에 나타난 마물을 해치워 주신 분이거늘!”
“아, 그러니까 이상하지 않냐고! 왜 대신관님이 쓰러진 뒤에 마물도 나타나지 않는 건데!”
“대신관님과 성녀님께서 지켜 주고 계시니까!”
“아니, 대신관님은 쓰러졌다고!”
“그래!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켜 주시다가 기력을 소진하신 것이겠지!”
대단한 신앙심을 가진 남부의 남성이 막무가내 논리를 펼쳤다.
그쯤 되자 서부의 남성은 더는 반박의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모순을 지적해도 돌아오는 것은 텅텅 빈 수레보다 영양가 없는 대답이었기에.
“무슨 이런 멍청한 놈들이 다 있어?!”
“뭐?! 이 거지 촌놈이!”
“야! 서부에서 엄청난 광산이 발견돼서 요즘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 줄 알아?!”
“흥! 그래 봤자 대신관님 험담이나 하는 구닥다리 촌놈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 신의 가호를 받은 우리 남부와는 전혀 다르다고!”
“이 자식이! 감히 우리 서부를 욕해?!”
우당탕탕! 곧장 난투극이 이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먹과 발길질이 오갔다.
수적으로 서부가 밀리나 싶었는데,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은 서부 사람 한 명은 온건하고 느긋한 남부 사람 열 명에 육박한 탓에 오히려 소수인 서부가 남부를 제압하기에 이르렀다.
“으윽, 까, 깡패 자식들……!”
“흥! 깡패한테 맞고 싶지 않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그리하여 아무도 서부를 막을 수 없었기에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황성이 있는 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황실 역시 해당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대신관이 쓰러지고 윈터스노우 공작 영식의 저주가 풀렸다니…….”
우연일 수도 있었으나, 제국의 기둥 중 하나인 북부 공작가의 차남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하니 직접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는 로스틴에게 루카와 함께 황성에 방문하라는 연락을 보냈다.
평소 같았다면 황제고 나발이고 마물 때문에 바빠서 방문할 수 없다고 답신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레이나의 부탁이 있었기에 로스틴은 기꺼이 루카와 함께 황성을 찾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었던 탓에 루카가 제 형을 따라 더듬더듬 예를 차렸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황제 부부는 이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저주가 풀린 루카의 모습이었다.
정말 저주가 풀려서 황성까지 올 수 있게 된 루카에 황제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나 어엿한 소년이 되어 있었을 줄은……! 진정으로 마왕이 소멸한 것인가……!”
그에 로스틴이 서둘러 황제의 착각을 정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신관이 쓰러짐과 동시에 날씨 마법이 풀리고 루카의 저주도 풀렸습니다.”
“호오, 그것참 우연이 아닐 수가 없군.”
황제가 기묘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신관을 전적으로 믿고 있기에, 인과 관계를 유추하지 못한 탓이었다.
다행히 황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하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어머나, 어째서일까요? 대체 저주는 왜 풀렸지요?”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모양인지, 연락을 넣어도 답신이 오지 않아서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당장 연락을 넣어서 오라고 해. 쓰러진 건지, 쓰러진 척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뚱이라도 잡아끌어 시급히 데리고 오라고.”
그때까지 조용히 상황을 관찰하던 황태자가 짜증을 내며 시종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황제 부부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황태자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선 그 방법밖엔 없었기에 소리를 내어 타박하진 않았다.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는 했지만, 상황이 퍽 흥미로웠으니.
때문에 차를 마시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전에서 누군가가 방문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공손히 예를 차린 이는 대신관이 아닌 성녀였다.
“어째서 성녀가? 대신관은 어디에 있지?”
“대신관님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회복 마법은?”
“계속 걸고 있습니다만,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셔서…….”
대신관이 쓰러진 그날 이후, 성녀는 하루도 쉬지 않고 그의 몸에 회복 마법을 걸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다행히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거의 다 나았지만, 이상하게 마력은 전혀 채워지지 않았다.
흡사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건만, 여전히 대신관은 일말의 차도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혹여나 그가 죽은 건 아닌지 의심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로스틴의 연락을 무시한 것도, 도무지 무어라 답을 보내야 할지 몰라서였다.
신전 내 모든 이들이 혼란에 빠졌고, 성녀 역시 이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와중에 대신관에 대한 소문까지 듣게 되어 신전은 분노와 혼돈, 슬픔에 빠진 채였다.
그렇다고 황실의 연락까지 무시할 순 없었기에 성녀가 나선 참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성녀에게 황태자가 삐딱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놈이 쓰러짐과 동시에 북부의 날씨 마법이 풀리고 저 꼬맹이의 저주가 풀린 게 맞아?”
성녀의 시선이 일순 루카에게 향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전에 레이나를 의심하던 자신에게 갑자기 감자를 던진 아이였으니까.
“시끄러워! 공녀가 왜 마왕이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하지 마!”
아직도 똑똑히 기억나는 그 아이가 공작 가문의 차남이었다니.
적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에 괜히 당시의 상황이 다시금 떠올랐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힌 성녀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물과 마물의 소환자를 없애라는 공격에 대신관님이 쓰러지신 것은 사실이고,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다시는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아는 사실만 말하자, 일순 정적이 일었다.
뭐야, 그건 또. 마물을 공격했는데 대신관이 쓰러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믿을 수 없다는 듯 황족 일가가 눈을 끔뻑였다. 루카 역시 처음 듣는 소리에 제 형의 팔을 꼭 붙잡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성녀가 설명을 이었다.
“레이나의 공격 마법에 마물이 사라짐과 동시에 대신관님께서도 쓰러지셨습니다. 저를 비롯한 다른 신관들도 마법에 노출되었지만,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레이나라면, 설마 레이나 루벨라이트 공녀?”
황태자의 물음에 황제 부부는 곧장 레이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얼마 전에 충격적인 드레스를 입고 성인식에 참석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황성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
황제 부부는 레이나의 마법이 마물을 없애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트리버가 소환한 마물 때문에 황성이 뒤집혔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에도 레이나의 검은 마법은 황성 전체를 뒤덮었고, 마물만 쏙 골라 없앴었다.
황제도 황후도 황태자도 레이나의 마법에 휩싸였었지만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그녀의 마법은 오직 마물만을 공격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황성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었다.
때문에 성녀가 본 것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바로 알 것 같았다.
상황을 파악한 일동이 침묵을 고수하자, 로스틴이 성녀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계속해서 나타나던 마물이 대신관이 쓰러진 이후론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건 사실인가?”
“……네, 사실이에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혼란을 가중하려 질문을 던졌을 뿐, 대답까진 바라지 않았거늘. 뜻밖에도 순순히 답하는 성녀에 로스틴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이후 잠시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상황은 꽤 간단했지만, 연결을 지어 생각하면 퍽 끔찍한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내 황제가 제 수염을 쓸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장본인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 할 상황 같군.”
“기절했다는데 무슨 설명을 듣습니까? 역시 수상한 놈이었어, 대신관 그 자식!”
그간 쌓인 게 많았던 황태자가 이를 갈았다. 그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딜 가는 게냐!”
황제가 호통을 치자, 고개도 돌리지 않은 황태자가 단호하게 답했다.
“신전에 가서 그놈을 두드려 패서라도 깨우겠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기에, 황제가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