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04화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애매한 관계였다. 펠릭스와 삐이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눈 뭉치로 변하는 저주에 걸렸다고 생각하기에는…….’
퍽 합리적이었다. 게임 속 세상이었기에 뭔들 없을까 싶었다. 차가운 불꽃이나 머릿속에서 말을 거는 목소리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목소리가 말을 거는 일이 없네.’
종종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을 걸고 명령을 할 때가 있었는데, 최근 들어선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평판이 올라서 그런가?’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곡창 지대를 개간하고 구경꾼들이 몰린 덕분인지, 이따금 평판이 올랐다는 메시지 창이 뜨곤 했으니까.
레이나가 삼천포로 빠진 사이, 로스틴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군.”
루카를 데리러 왔으면서, 사라진 루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왜지? 어째서?’
궁금증이 일었으나, 굳이 먼저 말하지 않는 일을 물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사정이 있겠지. 아주 조금 짐작은 갔지만, 직접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려도 무방한 일이었다.
펠릭스와 삐이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던 레이나가 이내 방문을 닫으며 로스틴을 향해 돌아섰다.
“응. 밤길 조심하고.”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 보는군.”
오히려 자신을 조심해야 할 자들만 수두룩할 것이라며 로스틴이 작게 웃었다.
“내일 전문가들을 곡창 지대에 보내도록 하지. 성인식도 얼마 남지 않아서 바쁠 텐데, 어서 쉬도록 해.”
“그쪽도.”
이제는 익숙해진 손 인사를 끝으로 로스틴이 심연의 저택을 떠났다.
처음에는 무슨 이런 어색한 인사가 다 있나 싶었는데, 이제는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꼭 손을 흔들게 되었다.
물론 레이나 한정이기는 했다. 다른 놈들에게 손 인사를 했다간 다들 거품을 물고 기절할 것이다. 딱히 하고 싶지도 않았고.
‘아니, 생각해 보니 역겹군.’
불쾌함을 지나쳐 역겨웠다. 레이나 외의 사람들과는 절대로 손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잡생각을 털어 낸 로스틴은 아까 보았던 루카와 펠릭스를 떠올렸다.
오늘 처음 만났다고 들었는데, 또래라서 그런지 금방 친해진 모양이었다.
‘정체까지 밝히고…….’
아직 자정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아마 의도치 않게 밝혀진 것일 테지만, 누가 온지도 모르고 옆에 누워서 자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을 연 것이겠지.
그리 생각하자 로스틴은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늘 혼자 고립되어 날을 세우고 있던 제 동생에게 드디어 친구가 생긴 것이니 당연했다.
부디 그 친분이 오래갔으면 좋겠는데. 루카가 자신과는 다른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마차 등받이에 몸을 기댄 로스틴이 눈을 감았다.
*
그 시각, 방으로 돌아가던 레이나는 복도에서 트리버를 마주쳤다.
“트리버, 아직 안 잤어? 안 피곤해?”
레이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분명 아까 굿나잇 인사를 한 참이었는데, 왜 아직도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트리버는 제 목과 손목, 발목에 걸린 불꽃을 확인하는 레이나를 짙은 붉은 눈으로 빤히 응시하며 답했다.
“손님이 온 것 같아서 나와 봤어.”
“그래? 상태가 꽤 호전되었나 보네.”
다행이네. 하아암. 작게 하품을 한 레이나가 너무 피곤해서 진짜 자러 간다며 제 방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트리버가 물끄러미 좇았다. 이미 그림자마저 사라진 뒤이거늘, 그의 시선이 레이나의 흔적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 왜 힘을 더 빼앗지 않았지? 모처럼의 기회였거늘……!
트리버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얼마 전, 레이나에게서 받아 온 놈이었다.
레이나의 불꽃이 몸에 생긴 뒤로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트리버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나를 뛰어넘을 힘을 갖고 싶지 않나?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힘을 주겠다. 너는 그런 운명으로 태어난 존재이다. 더 강해질 방법을 알려 주겠다.
목소리는 트리버와 마주칠 때마다 그를 유혹했다. 암흑에서 태어난 트리버가 살길은 이것밖에 없다고도 했다.
“내가 살 길……?”
- 그래. 어둠에서 태어난 네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손을 잡는다면, 나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필시!
“원하는 것 모두…….”
트리버는 생각에 빠졌다. 사실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지독히도 소유하고 싶은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게다가 레이나에게서 힘을 나누어 받아 생을 지탱하던 그였기에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의도치 않았겠지만, 트리버의 몸에 설치한 불꽃 고리가 그에게 지속적으로 힘을 전달하고 있었다.
케일란이 본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물 태생의 트리버는 레이나의 힘을 통해 성장했고, 능력을 유지했다.
물론 마물을 흡수하여 마력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이는 레이나에게서 받는 마력에 비교하면 미비하기 짝이 없었다.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던 트리버가 제안을 승낙하자, 목소리는 곧 레이나의 힘을 타고 트리버에게로 넘어왔다.
- 하, 하하! 하하하! 드디어 세상을 암흑으로 물들일 존재를 만나게 되었군!
트리버와 하나가 된 목소리는 크게 기뻐했다. 내내 제 말을 무시하며 명령을 듣지 않았던 레이나를 떠나 속이 다 시원하다는 말투였다.
그렇다고 해서 트리버가 목소리의 말을 전적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
불행히도 트리버는 원작의 레이나처럼 분노로 이성을 잃고 힘을 갈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내키지 않은 것까지 군말 없이 따르진 않았다.
오늘 일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나의 어깨에 기대 아닌 척 힘을 흡수하던 트리버는 그녀가 빠르게 지쳐 가는 기색을 보이자마자 행동을 멈추었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분개하는 목소리에 트리버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 이상 힘을 빼앗으면 들켜. 들키면 안 된다며.”
욕심을 부리다간 마을 축제 때 얼렁뚱땅 넘어갔던 의심이 다시 피어오를 것이다. 그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레이나에게 무해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 흐음, 네놈이 상당히 강해진 것은 확실하니……. 어쩔 수 없지.
다행히 목소리는 곧 납득했다. 트리버가 본격적으로 레이나의 힘을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강해져 버렸기 때문에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 그래도 시간이 나는 대로 계속 힘을 흡수해라. 그것만이 네 살길이다.
목소리의 말에 트리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지금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선 레이나의 힘이 필수 불가결했다.
머리까지 때리며 꺼지라고 외치던 레이나와는 달리 고분고분한 그 태도에 목소리가 만족스럽다는 듯 킬킬 웃었다.
*
다음 날, 로스틴의 소개를 받은 작물 재배 전문가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레이나, 베로니카와 함께 곡창 지대 예정지를 둘러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재배 방법입니다. 물길도 이보다 더 깔끔하지 않을 수가 없게 잘 터놓으셨군요!”
“이런 환경이라면 대부분의 작물은 무리 없이 잘 자랄 겁니다. 말씀하신 밀이나 벼, 감자 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음, 음. 좋아. 아주 좋아.
감탄하는 전문가들에 레이나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대부호의 길이 멀지 않아 보였다.
북부의 재정을 탈탈 털어먹고 있는 루벨라이트 공작의 수입원을 빼앗을 날 또한.
전문가들은 베로니카와 함께 드넓은 곡창 지대 예정지를 돌아다니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지대가 너무 넓어 개간 작업을 모두 끝낸 뒤에 작물을 심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조를 나누어서 작업을 세분화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준비가 완료된 곳부터 작물을 심어 나가자는 계획이었다. 모두 같은 작물을 심을 예정이 아니었기에, 타당한 의견이었다.
“본격적으로 작물을 심으면 장난 아니겠는데?”
대머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케일란이 대화를 듣곤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가뜩이나 구경꾼들이 수두룩한데, 작물이 검은 불꽃 속에서 활활 타오르게 되면 제국을 넘어 타국에서까지 구경을 올 것이 분명했다.
“흐음, 역시 그렇지? 아무래도 주변에 상권을 조성해야겠는걸.”
음료만으로는 부족했다. 식당이나 호텔 같은 것도 짓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활활 불타는 작물들을 보며 운치 있게 식사와 휴식을 취한다니, 그보다 더 낭만적인 상황은 없을 것이다.
각 객실에 검은 불꽃으로 만든 등을 설치해 놓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로스틴과 얘기해 봐야겠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로스틴이 곡창 지대를 방문했다.
그는 펠릭스의 상의 주머니에 들어가 눈을 끔뻑이고 있는 루카를 발견하곤 픽 웃음을 흘렸다.
저 아이가 대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조만간 루카의 놀이 시동으로 고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