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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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성 주변의 마물을 처리한 레이나와 로스틴은 북부 각지에 소환된 마물들을 처리하러 흩어졌다.
두 사람 모두 혼자 마물들과 대치한다고 어떻게 될 위인이 아니었기에, 단독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었다.
처음 시작이 북부의 가장 높은 곳이었던 터라, 레이나는 서쪽에서 남쪽으로, 로스틴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형식으로 갈라졌다.
그 외 기사들도 각자 조와 동선을 짜서 움직였다.
물론 공작 성 주변에 다시 마물이 나타날 수도 있기에 몇몇은 공작 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체이스와 케일란이 이에 속했다.
“칫! 나도 혼자 마물 때려잡을 수 있는데.”
공작 성 주변을 순찰하며 케일란은 모처럼 활약할 기회를 놓쳤다고 툴툴대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저택 식구들을 직접 지킬 수 있어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케일란, 너는 강하니까 여기 남아서 모두를 지켜 줘. 알겠지?”
라고 신신당부한 레이나의 말도 있었고.
“흠, 흠. 어쩔 수 없지. 걔가 날 믿고 그렇게까지 말했으니까, 뭐.”
케일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러곤 마물이 눈에 띄기만 하면 다 족쳐 버릴 거라면서 의지를 불태웠다.
갑작스럽게 마물이 나타났음에도 다행히 초반 희생이 없었던 덕분에 북부는 순조롭게 마물들을 물리쳐 나갔다.
동선을 효율적으로 짠 것도 도움이 되었다. 체온을 유지해 주는 레이나의 불꽃도 한몫했다.
물론 개중 마물을 가장 많이 해치운 것은 레이나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서쪽 끝까지 정리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꽤 힘을 많이 쓴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안 지치지?’
공작 성을 나온 직후에는 눈에 보이는 마물들 위주로 해치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되는 작업이 귀찮아져서 근방에 있는 마물들을 다 소멸시키라며 대형 마법을 난사했다.
일반적인 마을의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거대한 규모의 마법을 연달아 사용하였기에 금방 지칠 수도 있겠다는 각오를 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레이나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대체 이 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 거야?”
뱉고 나니 손발이 오글거렸다. 정말 문장 그대로의 뜻이건만, 뜻밖의 흑염룡 감수성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까지 쭉 밀고 왔는데도 지치지 않았으니…… 북부와 서부 경계까지 한 번에 밀어 볼까?’
제국의 지형은 꽤 깔끔한 편이었다. 주변국을 계획적으로 삼킨 덕분인지,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사각형에 가까웠다.
중심에 동그란 형태로 수도가 자리했고. 위아래, 양옆으로 북, 남, 동, 서가 자리했다.
그러다 보니 북부 경계의 일부는 서부와 맞닿아 있었다.
그곳이 레이나의 최종 목적지였다.
북동부는 로스틴이 알아서 잘할 테니, 이쯤에서 무리하여 힘을 전부 소비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좋아. 무의미하게 힘을 쪼개서 사용하느니, 그냥 한 번에 밀어 버리자.”
그리고 돌아가서 쉬자. 행운 때문인지 게임에서 모든 경품을 차지해 버렸기에 서둘러 돌아가 아이들에게 나눠 주기도 해야 했다.
다음 할 일이 떠오르니 레이나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녀가 힘을 사용할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북부와 서부의 경계까지. 마물이 있다면 흔적도 남기지 말고 전부 없애 버려.’
명령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대량의 검은 불꽃이 뻗어 나갔다.
이번에야말로 말도 안 될 정도로 방대한 마법을 사용해서인지 마력이 훅 줄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쓰러지진 않네?’
진짜 얘는 어떻게 되어먹은 몸인 거야. 푸념과 감탄을 동시에 마친 레이나가 소형 이동석을 사용해 북부와 서부의 경계로 넘어갔다.
일이 잘 끝났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 조우하게 되었다.
“어째서 공녀가 여기에……?”
후드를 깊숙이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누구인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대머리?”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내내 감옥에 갇혀 있었고, 대화도 별로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일란처럼 분노의 노동이라도 했다면 모르겠는데, 그는 딱히 임팩트가 없었다. 좀 병약했던 것 정도가 끝이었다.
“뭐였지?”
“아덴 크로니클이다! 크로니클 자작가의!”
“아하.”
레이나가 크게 관심이 없다는 듯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정말 관심이 없었다.
살갑게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레이나가 주위를 둘러보려고 할 때였다.
아덴의 너머로 좋지 못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으아아아악!”
“거기! 거기 막아!”
“젠장! 수가 너무 많다!”
“사, 살려 줘! 살려 줘!”
서부의 사람들이었다. 북부처럼 초기 진압에 성공하지 못한 탓에, 마물들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더불어 서부는 원래 북부에 이어 마물이 출몰할 예정이었던 지역이다.
이미 대신관이 만들어 놓은, 보이지 않는 소환진이 숨어 있었다.
거기에 레이나를 목격한 대신관이 분노하여 추가로 소환진을 만든 탓에, 타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마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아덴도 혹시 그렇지 않을까 싶은 직감이 들어서 서부로 온 참이건만.
아니나 다를까, 정답이었다.
서부 역시 북부만큼은 아니지만 꽤 무력이 강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마물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내리자 전혀 상대할 수가 없었다.
“어, 엄마! 악!”
“으아아악!”
“꺄아아악!”
심지어 민간인들은 거의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기사와 용병들이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꼴을 눈앞에 가만히 두고 볼 레이나가 아니었다.
다행히 아직 마력이 조금 남아 있었다. 서둘러 대형 불꽃을 흩뿌리자, 마물들이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어……?!”
“헉?!”
갑작스럽게 검은색 마법에 휩싸였다가 사라진 마물들에, 서부 사람들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 설마 내가 죽었나……?’
그래서 더는 마물이 보이지 않는 건가? 착각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기사들이 떼로 달려들어도 어떻게 되지 않았던 마물이 갑자기 어둠과 함께 사라졌으니까.
벌써 두 번째로 마주한 상황이지만, 볼 때마다 숨이 멎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법에 아덴 역시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런 그의 팔뚝을 가볍게 툭 건드린 레이나가 조금씩 결려 오기 시작하는 어깨를 풀며 물었다.
“서부는 다 이 모양인 거야?”
“……?!”
화들짝 놀란 아덴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나도 조금 전에 온 탓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어휴.”
대체 이 마물을 만든 놈은 무슨 목적으로,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에서 가장 나빠야 하는 자신도 가만히 있는데, 왜 굳이 나서서 사람들을 괴롭히냐는 말이다.
‘아니, 잠깐만. 내가 가만히 있어서 이러는 건가?’
무언가 게임 시스템적인 요인에 의해서 자동으로 마물이 생성된다든가?
확실히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래야 게임이 원래 내용대로 돌아갈 테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오해만 계속 늘어날 텐데……. 일단 눈에 보이는 마물들이라도 적극적으로 해치워야 하나?’
반은 정답이었으나 반은 착각에 기인한 판단을 내린 레이나가 손을 탈탈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좀 더 해치워 주면 제압 가능하지?”
“……?”
그러나 아덴은 그녀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것이 아니었기에 상관없었다.
힘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마을 스무 개 정도의 마법은 사용할 수 있겠지.
‘나 집에 돌아갈 정도의 힘만 남기고 근방의 마물들 다 쓸어 버려.’
명령을 내린 그녀가 곧 힘을 방출했다.
주마등인가 싶었던 검은 마법이 또다시 나타나 빛처럼 빠른 속도로 멀리 퍼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식겁했다.
“히익?!”
“헉?!”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당연하게도 레이나에게 꽂혔다.
검은색 마법, 검은색 불꽃, 그리고 그 힘을 유일하게 사용하는 신탁의 마왕.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이제는 퍽 익숙해진 시선에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이곤 소형 이동석을 꺼내 들었다.
“근처의 마물들은 다 없앴으니까, 여기서부턴 너희끼리 알아서 하든가 말든가.”
그러고는 나타났을 때처럼 쿨하게 다시 사라졌다.
“마, 마왕……?! 마왕 맞지……?!”
“마, 맞아! 거, 검은색 마법을 쓰는 걸 똑똑히 보았어!”
“오오, 신이시여!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히 만인의 앞에서 똑똑히 마물을 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마왕을 보았다며 겁에 질려 수군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덴이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자신들이 본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도 안 해 보고, 미신같이 전해지는 신탁 이야기만 하는 것인지.
“공녀는 마왕이 아니다. 방금 막 그대들을 구해 주고 떠난 참인데, 어째서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흉을 보는 거지?”
아덴은 괜히 화가 났다. 자신이 욕을 먹는 것도 아닌데 짜증이 났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화를 표출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더 짜증이 난 그가 멀뚱멀뚱 서 있는 기사들을 향해 한마디 했다.
“뭣들 하고 있어? 서둘러 정비하고 다른 곳에 지원 갈 준비나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