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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77화

*

서부로 가는 내내 레이나는 편지를 읽었다. 계속 같은 내용의 반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한 글자도 놓치기 싫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차가 서부의 경계에 다다를 때가 되어서야 겨우 손에서 편지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 벌써? 왜 이렇게 빨리 왔지?”

“공녀님께서 말들에게 불꽃을 둘러 주신 덕분인 것 같습니다.”

따뜻한 옷을 입히기는 했지만, 서부에서 나고 자란 말들은 추위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출발하고 얼마 뒤, 레이나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말들에게 불꽃을 만들어 주었다.

“말들에게 불이 붙어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노엘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말이 잘못된 줄 알고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그러나 퍽 편안해 보이는 말들의 모습에 레이나가 신경 써 준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편지에 몰입한 탓에 말을 걸 수 없어 추측만 한 것이었지만.

“북부는 추우니까. 저택의 말들처럼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인데 미리 알려 줄 걸 그랬나 봐.”

그리 말한 레이나가 바깥 온도를 확인했다. 서부로 접어들어서 그런지, 조금 쌀쌀하기는 했지만 적당히 지내기 편한 날씨였다.

이 정도면 더는 불꽃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말들에게 걸어 놓았던 불꽃을 소멸시켰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서부까지 금방 도착하였고요.”

그나저나, 이쯤 되니 레이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파괴력만 가진 줄 알았는데, 불꽃으로 쓰레기도 치우고, 돌덩이 같은 것도 녹여 없애 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말들에게 며칠 동안이나 유지되는 보온용 마법까지 걸어 주다니.

이렇게 마법을 자유롭게 변형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름 공작인지라 지금껏 여러 능력자들을 만났지만, 대부분은 거의 한 가지 마법에만 능통했다.

반면 레이나는 달랐다. 그녀는 마치 생각하는 모든 것을 검은 불꽃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작이 레이나에게 물었다.

“차가운 불꽃도 만드실 수 있으십니까?”

“차가운 불꽃? 글쎄. 만들어 본 적이 없는데.”

차가운 불꽃이라니. 이건 뭐,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아니고. 아니, 아이스 핫초코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웃긴 조합이었다.

당연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궁금해져 레이나가 차가운 불꽃을 만들어 보았다.

“앗, 차가워!”

손바닥 위에 나타난 얼음장처럼 차가운 불꽃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손을 치웠다.

여느 불꽃과 생김새는 다를 바가 없었다. 차갑다는 말에 노엘도 서둘러 불꽃을 만져 보았다.

“……!”

정말 신기하게도 불꽃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보고, 만지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레이나는 자신의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았다. 이 능력만 있다면 서부의 사람들이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손이 꽁꽁 얼 때까지 차가운 불꽃을 매만지며 공작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레이나가 선선한 불꽃 여러 개를 만들었다.

“편지를 읽느라 몰랐는데, 꽉 닫힌 공간이라서 그런지 좀 답답하네. 여기 몇 개 둘게.”

그리 말한 레이나가 오는 내내 구석에서 짱박혀 있던 아덴에게도 불꽃 하나를 던졌다.

그 역시 조금 답답했는지 후드를 벗고 셔츠 한 장만 입고 있는 상태였다.

갑자기 던져진 불꽃을 아덴이 받았다. 그는 선선한 온도를 가진 불꽃을 매만지곤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네 능력의 끝은 어디지?”

“음, 나도 모르겠네.”

막연히 강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차가운 불꽃까지 만들어 내게 되니 정말 알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근데 너보단 세니까 덤비지 마. 또 대머리 되기 싫으면.”

다행히 대머리가 된 뒤 조금 시일이 지나 아덴은 머리카락이 약간 자란 상태였다. 은색 머리카락이 송송 올라와 있어서 마치 밤송이 같았다.

머리카락을 언급하자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러나 정말 레이나의 말대로 그녀의 힘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무어라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이 이렇게 된 것도 자신이 먼저 저택에 침입해서 그런 것이었고.

“아덴 경의 머리가 왜 그런가 했더니, 공녀님께서 그리 만드신 거였군요.”

상황을 이해한 공작이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아덴은 마검사로만 이름을 떨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차가운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그가 대머리가 되었었다니. 직관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불러 달라고 언질을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공녀님, 이쯤에서 쉬었다가 가는 게 어떨까요? 곧 마을에 도착할 예정이라서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응, 그렇게 하자.”

공작의 제안을 레이나가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뻐근한 참이었다. 엉덩이도 결렸고.

얼마 뒤, 마차가 중간 목적지인 서부 경계 마을에서 멈추었다.

“먼저 내리시죠, 공녀.”

지금까지 마차에서 내릴 때마다 노엘이 에스코트를 해 주었는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먼저 내리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마차에서 혼자 내리자, 놀랍게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마차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뭐야, 이건……? 이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모인 사람들이 하나, 둘, 셋을 세더니 입을 모아 레이나를 환영했다.

“루벨라이트 공녀님! 서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꽃다발을 든 작은 아이가 레이나에게 이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자 아이가 활짝 웃었다.

“곤녀님! 구해 주셔서 감사함니다!”

발음이 조금 새는 것이 귀여웠다. 그보다 환영 인사라니, 갑작스러워 당황했지만 기쁘기도 했다.

레이나가 조금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응, 고마워.”

와아아아아! 사람들이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은 편지를 보냈는데 읽어 보았냐며 묻기도 했다.

“공녀님! 샌디가 편지 보냈어요!”

“저도요!”

아, 쟤가 샌디구나.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진 뽀얀 여자아이였다.

동그란 눈매 때문인지 결코 마물을 줘 팰 수 없을 것 같은 순하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심성이 강한 모양이었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될 일이었다.

레이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응, 다 읽어 보았어. 샌디라고 했지? 꼭 나중에 나처럼 마물을 줘 패는 멋진 마법사가 되렴.”

“네에!”

잘 읽었다며 편지 내용에 대꾸까지 하자, 샌디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레이나가 아이들에게 불꽃을 하나씩 선물했다.

“적당히 서늘한 불꽃이니까 더울 때 사용하렴. 친구들과 한참 뛰어논 다음에도 좋고.”

“네!”

“와! 신기해!”

“이것 봐! 막 던졌다가 받을 수도 있어!”

“감사합니다, 공녀님!”

신이 난 아이들이 불꽃을 허공에 던졌다가 받으며 까르르 즐거워했다.

그런 아이들을 보는 레이나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역시 아이들의 힘은 위대했다. 편지에 이어 환영 인사까지 준비하길 잘했다.

공작의 레이나 꼬시기 프로젝트가 하나씩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

경계 마을에서 한참이나 사람들의 환대를 받은 레이나는 다시 최종 목적지인 서부의 공작 성으로 향했다.

다행히 공작 성은 경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서부 끝으로 갈수록 사막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서부는 생각보다 넓은 영지였지만, 대부분이 사막이라서 쓸모 있는 땅은 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공작 성까지 가는 내내 마을이 촘촘하게 붙어 있었는데, 미리 언질을 해 둔 것인지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열렬한 인사를 보내왔다.

‘뭐지? 뭘까. 내가 탄 걸 모르나? 왜 두려워하지 않지?’

이쯤 되자 레이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일 마왕이라고 천 년 전부터 신전에서 공표한 참인데, 어째서 다들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다들 신탁을 몰라? 왜 계속 인사를 하는 거야? 내가 탄 줄 모르나?”

혹시 공작이 엄청나게 좋은 이미지인가. 그래서 공작의 인장이 새겨진 마차를 보고 저러는 건가.

“아니요. 다들 공녀님이 타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자랑을 했거든요. 공녀님께서 오실 거라고.”

“그렇지만 신탁에선 검은색 마법을 쓰는 사람은 불길하다고 했잖아. 왜 다들 신탁을 안 믿어? 신탁은 절대적인 거 아니었어?”

의문을 감추지 못하는 레이나의 모습에 노엘이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다른 지역이라면 모르겠지만, 서부는 이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전의 신탁이 신기할 정도로 서부만 비껴 나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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