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66화
*
상황이 정리되었음에도 성녀는 곧장 신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친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평화롭게 지내던 사람들은 갑자기 소환된 마물들에 속절없는 공격을 받았고, 개중에는 사망한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순 없었지만, 치료 마법은 배워 둔 참이었기에 성녀는 다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치유의 빛!”
주문을 읊자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아이의 상처가 꽤 아물었다.
완벽하진 않았으나, 한동안 잘 소독하고 깨끗하게 관리하면 아물 정도로는 회복되었다.
갑자기 사라진 통증에 놀란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려도 사리 분별은 가능했는지,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치료해 준 성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선녀님! 감사함미다!”
하지만 아직 너무 어렸던 탓일까. 제대로 된 발음은 아니었다.
갑자기 성녀에서 선녀가 된 그녀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응, 앞으로는 다치지 말고 건강하게 자라렴.”
“녜!”
“성녀님, 저희 아이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그녀는 쉬지 않고 사람들을 치료했다.
몰려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물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 힘들었지만, 보람이 넘쳤다.
이렇게 사람들을 돕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뿌듯했다.
한편, 성녀가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을 복잡한 심경으로 보던 아덴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안전한 곳에서 자리해 있는 대신관에게 물었다.
“대신관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치워도 계속 다시 소환되던 마물들을 직접 정리했다고 지난번에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신 거죠?”
이미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설마 또다시 그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던 대신관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마물이 소환되는 쪽을 살펴보니 소환진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걸 파괴하니 마물도 더는 나오지 않았고요.”
딱히 신경 쓸 가치도 없는 평범한 마법이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물론 평범한 마법이 몇 날 며칠이나 계속될 리가 없었기에 아덴은 대신관의 말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때문에 더 자세히 사건에 대해서 물으려고 하는데, 대화는 여기까지라는 듯 대신관이 먼저 말을 이었다.
“자, 그럼 다음 장소로 가 봐야겠네요. 북부에 마물들이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신의 대리인답게 대신관의 예감은 꽤 높은 적중률을 갖고 있었다.
신탁처럼 정확한 내용을 읽어 내진 못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불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타이밍 한번 대단하군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의 경고에 타이밍이라는 건 없는걸요.”
그 말을 끝으로 대신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성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북부에 마물이 나타날 것 같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어서 가자고 대신관을 재촉했다.
하필이면 마물이 나타났다는 곳이 북부라는 말에 괜히 신경이 쓰인 아덴이, 대신관과 성녀의 뒤를 따랐다.
*
갑작스럽게 열린 아이스베리 마을의 축제는 간소하게 이루어졌다.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것이었기에 평범하게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춤과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축제가 계획된 것이다.
그리고 뜻밖에도 레이나는 축제의 초대장을 받게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스틴에게서였다.
“내일 마을에서 축제가 열릴 예정인데, 공녀도 참석해 주었으면 하는군.”
“추, 추, 축제?!”
그런 엄청난 일(?)에 초대되다니.
사실 초대장이 없어도 참석할 수 있는 작은 마을 축제였고, 그녀 외의 다른 사람들은 초대장이라는 것을 받지도 않았지만.
이를 모르는 레이나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축제라는 행사에 참석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초, 초대장씩이나 줬으니 참석해야겠지.”
바쁘셨을 텐데, 저택에 찾아와 초대장까지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레이나가 속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떨리는 손과 눈, 그리고 말투에서 그 기색을 읽은 로스틴이 낮게 웃었다.
왠지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 줄 것 같아서 굳이 초대장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가져온 건데, 그렇게 한 보람이 있었다.
“잠깐 시간을 내서 온 거라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내일 축제를 즐기려면 미리 일을 끝내 놓아야 하거든.”
“아아, 응! 어서 가 봐.”
레이나가 허겁지겁 대답했다. 잘 가라는 듯 빠르게 움직이는 손에서 흥분의 기색이 느껴졌다.
“레이나, 뭐야?”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서 삐죽 얼굴이 튀어나왔다. 이제 거의 성인이 다 된 트리버였다.
성장이 조금 빠르지만, 특별한 문제나 사고 없이 잘 지낸다는 얘기에 안심했었는데.
‘이렇게 단기간에 빨리 자라는 것 자체가 큰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건가, 공녀는.’
아무리 본인이 강해도 그렇지, 너무 무방비했다.
이제라도 감옥에 가둬 놔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레이나가 초대장을 펼쳐 트리버에게 보여 주었다.
“축제 초대장이야. 내일 마을에서 축제가 열릴 거래.”
“축제? 축제가 뭐야?”
레이나도 가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가 ‘축제’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것들을 읊었다.
“맛있는 거 먹고 재미있게 노는 거야. 게임도 하고.”
게임을 추가해야겠군. 로스틴이 계획을 수정하는 사이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아마 이기면 선물도 줄걸?”
선물도 추가해야 할 것 같았다.
선물이라는 말에 트리버가 눈을 반짝였다.
“선물? 어떤 선물?”
“음, 글쎄. 인형이나 소소한 장식품? 아니면 과자? 사탕? 혹시 장신구 같은 것도 주나? 가끔 현찰도 줬던 것 같기도 하고.”
인형, 장식품, 과자, 사탕, 장신구, 현찰…….
레이나가 내뱉는 품목이 로스틴의 머릿속에 속속들이 추가되었다.
뜻밖의 도움이 된 덕에 트리버를 감옥에 가둬야 한다는 생각은 잠시 뒷전이 되었다.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지. 5년 만에 열리는 축제이니 꼭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
“응, 당연하지.”
오지 말라고 해도 갈 거야. 레이나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웃은 로스틴은 손을 흔들어 그녀와 작별 인사를 마치고는 공작 성으로 향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이 생겼다. 돌아가자마자 축제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축제라는데, 뭘 입고 가지?!”
로스틴이 돌아가자마자 흥분한 레이나가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저택을 돌아다니며 고민에 빠졌다.
축제에 참석하는 것이 처음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역시 대단한 차림으로 가야 할 것만 같았다.
“공녀님! 이건 어떠세요?”
다행히 안나가 센스 있게 미리 드레스를 만들어 놓았다.
허리 뒤의 리본이 포인트인 보라색 드레스였는데, 발목까지 오는 길이라서 예쁜 건 물론이거니와 편하기까지 할 것 같았다.
“머리는?!”
“머리는 이렇게…….”
“신발은?!”
“이 구두가 어떠실까요?”
“화장도 해야 하나?!”
“마침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안나의 준비는 완벽했다. 그리하여 레이나는 거의 무도회에 참석하는 수준의 복장으로 축제에 가게 되었다.
*
“……나 좀 오버했나?”
마차에서 내린 레이나가 뻘쭘함을 숨기지 못했다. 왜 다들 평상복 차림인 건데.
‘왜 나만 혼자 꾸몄냐고……!’
차라리 모두가 꾸민 사이에서 혼자 평상복 차림으로 있는 것이 나았다.
그러면 몰랐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혼자 신이 나서 잔뜩 기대한 티가 났다.
‘다들 왜 말 안 했어……!’
설마 평소에 쌓인 불만을 이렇게 털어놓은 거야?!
함께 축제에 참석한 부하들을 노려보자, 눈이 마주친 그들이 아주 예쁘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어머나! 공녀님!”
“오오! 공녀님이시다!”
“공녀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덕분에 따뜻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눈에 띄는 복장인 탓에 모든 마을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하필이면 선행을 베푼 뒤였기에 모두가 그녀에게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불꽃으로 하늘을 날았던 기억이 생생한 아이들은 처음 보는 예쁜 복장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와! 공녀님 공주님 같아요!”
“정말이다! 공주님이셔! 예뻐!”
칭찬으로 하는 말이 분명할 텐데,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응, 응. 고마워. 그러니까 좀 멀리 떨어져 줄래……? 혼자 있고 싶어졌어…….’
얼굴을 붉히며 레이나가 손바닥에 얼굴을 감췄을 때였다.
로스틴이 흑마를 타고 나타났다.
“어?! 공작님!”
“와아! 공작님은 왕자님 같으셔!”
응? 무슨 소린가 싶어서 손에 묻은 얼굴을 들자, 자신만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껏 차려입은 로스틴이 눈에 들어왔다.
“그쪽은 왜 그런 차림인데……?”
분명 축제를 계획한 로스틴은 평범한 차림으로 와도 된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혼란스러워하는 레이나의 뒤에서 체이스가 방긋 웃으며 로스틴에게 윙크를 보냈다.
레이나가 너무 들떠 있는 탓에 마을 축제에 아무도 그런 행색으로 가지 않는다는 말은 못 하고, 로스틴에게만 상황을 일러둔 참이었다.
덕분에 레이나는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심지어 딱 귀족 둘이 그럴듯한 차림새를 하고 있어서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서민들의 축제에 손수 참석한 소탈한 귀족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공녀, 함께 축제를 돌아보지 않겠어? 5년 만에 참석하는 축제라서 조금 외롭거든. 부관과 기사들도 가족들과 함께 있겠다고 가 버려서 말이야.”
모처럼이니 가족들과 같이 지내라며 먼저 쫓아낸 것이었지만.
굳이 그런 쓸데없는 말까지는 꺼내지 않은 로스틴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엉겁결에 레이나가 그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