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52화
콰과광-!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나의 손바닥에서 대량의 어둠이 뻗어 나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무수한 마법이 마물이 있던 자리에서 쉴 새 없이 폭발했다.
다른 마물들을 상대했을 때와는 달랐다. 과연 미궁의 주인답게 순순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레이나가 버거움을 느낄 때까지 마물을 공격하던 불꽃이 사라진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어둠이 걷히고 마물이 있었던 자리에는 검은색의 잔해들만 덩어리져 있었다.
“공녀,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로스틴은 서둘러 레이나의 상태를 살폈다.
스스로 그녀를 감싸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제 상태를 확인하는 것보다 레이나가 어떤지 먼저 걱정이 되었다.
‘괜찮은데,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데. ……이게 대체 다 뭐야……?’
레이나가 눈을 깜빡였다.
마법이 끝난 순간, 어디선가 폭죽 소리가 들리며 눈앞에 불투명한 네모 박스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북부 미궁의 최종 보스를 처치하여 명성이 올랐습니다!]
[레이나 루벨라이트 Lv. 1,000]
체력 1,000
마력 1,000
매력 1,000
행운 1,000
평판 –1,000
명성 100
왜 이게 여기서 나오는데?! 레벨은 여주만 오르는 거 아니었어……?!
여주가 레벨을 올리지 못하게 막으러 왔는데, 어째서인지 자신의 레벨이 올라 버려 레이나가 당황했다.
혼란스러움도 잠시, 또다시 폭죽 소리가 터지며 직사각형의 박스가 눈앞에 나타났다.
[축하드립니다! 레벨 1,000을 달성하셨기에 보너스 능력치를 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능력치를 골라 주세요!]
‘이건…… 여주가 레벨 1,000을 달성했을 때 주는 선물이잖아……?’
사실 고작해야 레벨 1이 높다고 여주가 레이나를 처치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여주가 레이나를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레벨 1,000을 달성한 기념으로 받는 보너스 능력치 말이다.
괜찮냐고 물었는데 레이나가 말없이 굳어 있자, 진심으로 걱정이 된 로스틴이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공녀, 공녀! 괜찮아? 어디 다친 거야?”
그의 말투가 다소 조급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레이나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마법을 쓰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레이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로스틴의 뺨을 꼬집었다. 아무런 감각도 들지 않았다.
“아파?”
“……몹시.”
아, 이쪽이 아니구나. 실수를 깨달은 레이나가 제 뺨을 꼬집어 보았다.
“아파.”
아팠다. 그것도 엄청 많이.
계속되는 레이나의 이상 행동에 로스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나가 제 얼굴 앞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이거 보여?”
“아니, 뭐가 있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설마 환각이라도 보고 있는 거야, 공녀?”
그는 진심으로 레이나를 걱정했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행동까지 하면서 말이다.
로스틴이 레이나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다리, 손까지 하나하나 살펴보던 그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작은 뺨에 제 큰 손바닥을 대며 ‘열은 없는데. 왜 이러는 거지?’라고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아냐, 괜찮아. 진짜야. 잠깐 어지러웠어.”
그제야 수치심이 호기심을 이긴 레이나가 뒤늦게 로스틴과 거리를 두었다.
괜히 뻘쭘해진 그녀가 잠깐 쉬겠다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5분만 이러고 있자. 마법을 너무 많이 써서 정신이 없네. 쉬어야 할 것 같아.”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내 어깨에 기대서 쉬도록 해. 잠깐 자는 것도 괜찮겠지.”
로스틴이 레이나의 머리를 자신 쪽으로 기대게 했다.
아니, 진짜 괜찮은데.
라고 하기에는 이미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뒤였다. 키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어깨와 팔 사이였지만.
‘……흠, 흠. 조금 민망하지만 편하니까.’
편의를 봐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조용히 사색할 시간을 벌게 된 레이나는 아직도 자신의 얼굴 앞에 동동 떠 있는 직사각형의 박스에 집중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 1,000을 달성하셨기에 보너스 능력치를 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능력치를 골라 주세요!]
자신이 여주였다면 망설임 없이 마력을 찍어서 레이나를 물리치러 갔을 텐데.
입장이 전혀 다르다 보니 눈에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다.
[평판 –1,000]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0도 아니고 –1,000을 찍어 버린 평판이었다.
‘정말 너무하네. 조용히 살았는데 왜 평판이 낮아지고 난리야.’
속으로는 투덜댔지만, 사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나름 세계관 최종 보스이니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무섭긴 할 것이다.
대체 레벨이 오른 걸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평판이 낮아지는 건지.
‘……현실이 아니긴 하네.’
갑작스러운 자각이었으나,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만약 보너스 능력치로 평판이 올라간다면, 더는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하지 않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마이너스인 걸 보면, 어쩌면 더 내려갈지도 모르겠고.’
확실히 위험 부담이 컸다.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네모 박스가 말해 주지 않았기에, 평판은 건드리지 않는 게 현명해 보였다.
그다음으로 거슬리는 것은 행운이었다.
[행운 1,000]
어떻게 필요한 것만 쏙쏙 생길까 의문이었는데 행운이 높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만약 여기서 행운을 올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보다 더 운이 좋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여주가 레벨 올리기 짜증 난다면서 싫증이라도 내며 사라지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혹은 우여곡절 끝에 레벨 1,000을 찍은 여주가 실수로 평판이나 명성에 능력치를 몰빵한다든가.
상상하니 재미있기는 한데, 이것도 변수가 너무 많았다.
지금은 운에 맡길 때가 아니었다. 여주에게 퇴치당하기 전에 확실하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올려야 했다.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던 레이나는 드디어 능력치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선택을 마치자 눈앞에 있던 불투명한 박스가 일제히 사라지더니, 새로운 창이 하나 생겨났다.
[레이나 루벨라이트 Lv. 1,000]
체력 1,000
마력 2,000
매력 1,000
행운 1,000
평판 –1,000
명성 100
그녀가 고른 것은 다름 아닌 마력이었다. 능력을 선택함과 동시에 전신에 엄청난 기운이 솟아났다.
미궁 정도는 껌으로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북부 전체를 단박에 날려 버릴 수 있을지도.
새로 얻은 마력을 시험해 보고자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나가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미궁 모든 곳에 불을 켜.”
그 순간, 촤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작은 공간이 아니기에 대량의 마나가 소요되었거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몸이 아무렇지 않았다.
“공녀……?”
분명 피곤해 보였는데, 또다시 거대하고 쓸데없는 마법을 사용하는 레이나에 로스틴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그런 로스틴을 돌아보는 레이나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쉬었더니 괜찮아졌어. 그쪽을 업고 미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업히는 건 사양하지. 공녀가 아무리 기력을 회복했다 하더라도 다리가 끌릴 것 같거든.”
자신에게 업혀서 다리가 질질 끌리는 로스틴을 상상한 레이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렇게 갑자기 회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농담으로 던진 말에 레이나가 웃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로스틴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그래, 걸어서 돌아가야 할 테니 서둘러야겠어.”
마물의 잔해가 사방에 깔려 있어 아까 떨어뜨린 소형 이동석은 찾기 힘들어 보였다.
저택까지 걸어가기에는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오히려 도란도란 소소한 대화라도 나누면서 돌아가면 심심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왔던 방향을 되돌아가려 걸음을 내딛는데, 등 뒤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꾸룩.”
마치 질퍽한 무언가의 기포가 터지는 소리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조금 아까 죽은 그놈의 잔해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겠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레이나와 로스틴이 동시에 뒤를 돌았다.
“꾸룩, 꾸룩.”
불행히도 아니길 바라는 예감만큼 맞아떨어지는 것은 없었다.
진흙처럼 묽어진 잔해가 기포를 터뜨리며 점점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레이나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강해졌다는 것이었다.
“아아, 정말 귀찮게 말이야.”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풀며 다시 손을 뻗었다.
로스틴에게 업혀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에야말로 온 힘을 다해서 놈을 조져 버릴 생각이었다.
자신의 허리까지 부풀어 오른 잔해 속에서 말간 얼굴의 소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