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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29화

일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집사를 가둔 방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렇게 생각됐다.

때문에 로스틴은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생각보다 더 좋지 않은 현실이었다.

“아! 윈터스노우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스틴을 발견한 대신관이 늘 보이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로스틴은 그의 인사에 응대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신관의 뒤로 보이는 집사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관의 인사를 무시한 로스틴이 다급히 집사의 상태부터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숨을 쉬지 않았다. 심장도 전혀 미동이 없었다.

사색이 된 의사가 그를 살려 보려 했지만, 이미 영혼이 떠난 집사의 상태가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대신관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입니까.”

로스틴이 혼란스럽다는 눈으로 대신관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앞에 사람이 죽어 있는데, 대신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음, 딱히 이상한 상황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루벨라이트 공작의 부탁을 받아서 집사를 치료하려고 왔을 뿐입니다.”

“치료요? 그런데 그는 지금 죽었지 않습니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동상과 고문으로 조금 다친 상태이기는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레이나가 불꽃으로 몸을 데워 준 데다가, 회복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나아지는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죽다니. 그것도 대신관에게 치료를 받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로스틴의 말에, 대신관이 머쓱함을 감추지 못하고 뺨을 긁적였다.

“아, 그게…… 그러니까 죽이려던 의도는 없었는데, 실수를 해 버렸네요.”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그것도 대신관이?

레이나만큼은 아니었으나, 그는 눈이 된 루카에게 아주 잠시나마 따뜻함을 선사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북부의 여름을 영원히 없앨 만큼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실수라고? 그것도 사람을 죽이는 수준의 말도 안 되는 실수라니.

로스틴의 표정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그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께서 실수를 하실 때도 있다니, 처음 듣는 얘기군요.”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도 나름 사람인지라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대신관이 눈을 반달로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러니한 반응이었다.

설마 칭찬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아니, 아닐 것이다. 그는 눈치가 빠른 자였다.

대신관은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겉보기에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으나, 그는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15년 전에도 저 얼굴이었다.

추측건대 그 전에도 저 얼굴이었을 것이다.

대신관을 만나는 모든 이들은 그의 변함없는 얼굴에 놀라곤 했다.

그게 설령 노인이라고 할지라도.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미소 짓는 대신관의 저의를 가늠하며 로스틴이 생각에 빠졌다.

이상했다. 무엇이 어떻게 이상한지 몰랐기에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사이, 집사가 확실하게 죽었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루벨라이트 공작이 대신관에게 정중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걸었다.

“대신관님. 용무가 끝났으니 이만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내하겠습니다.”

“아아, 그렇죠. 시간은 금이니까요. 다음 일정이 더 중요하기도 하고.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늘 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기를.”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 사람 하나를 ‘실수로’ 죽여 놓고,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다니.

로스틴은 이대로 그를 보낼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아직 제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신관을 팔을 붙잡자, 루벨라이트 공작이 곧장 로스틴의 손을 쳐 냈다.

“감히 대신관님의 일정을 방해하다니, 참으로 무례하시군.”

따져 보면 무례한 것은 로스틴이 아니라 막무가내로 찾아와 사람까지 죽인 대신관이었으나, 그는 법보다 위에 있는 자였다.

로스틴이 북부의 법이듯, 대신관은 대륙 전체에서 법에 저촉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오늘처럼 실수로 사람을 죽인 행위라 할지라도.

하지만 루벨라이트 공작은 아니었다. 로스틴이 그에게 물었다.

“제 의문은 공작님께 있습니다. 급히 대신관님까지 모셔 오셔서 살리려고 했던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는데, 이대로 그냥 가겠다고요?”

질문의 대상자가 바뀌자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어졌다.

귀찮은 질문을 받았다는 듯 루벨라이트 공작이 한껏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아니, 살리는 게 급한 거지요. 이미 죽어 버려 천천히 데려가겠다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소. 차후에 사람을 보내리다. 일정이 바쁘니 감히 대신관님의 앞을 가로막지 마시기를.”

헛소리를 끝으로 공작은 대신관과 함께 공작 성을 떠났다.

공작이 죽인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대신관이 한 짓이라 문제 삼을 수도 없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루벨라이트 공작과 대신관의 조합이라니. 악마와 천사의 조합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질적인 관계였다.

물론 아무리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해도, 아주 잠깐 의견이 맞물려 행동을 같이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지.’

대신관이 누군가를 데리고 다니는 걸 본 적도 없었고.

아무래도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저 둘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이 처음부터 어그러져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로스틴의 머리 한구석을 채웠다.

*

공작 성을 빠져나온 대신관과 루벨라이트 공작은 곧장 심연의 저택으로 향했다.

“대신관님, 앞으로 뭐든지 다 할 테니……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공녀와 공작께서 관련이 없는 사이라고 말해 달라던 그 얘기 말씀이시군요. 전 공작 부인께서 외도하셨다고.”

“흠, 흠. ……예. 저와 닮은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외도가 확실합니다.”

대신관이 작게 웃었다.

분명 아까는 유폐된 사이에 눈과 머리 색이 변해 버려 가문의 특징이 사라졌다고 했으면서.

고작해야 몇 시간 사이에 전 공작 부인이 외도한 것처럼 말을 바꾸다니.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는 자에게도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는 게 웃기고 재미있었다. 유쾌한 자였다.

“전 공작 부인께서 정말 외도하셨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공녀가 친자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런 개인사에 관한 것까진 제가 잘 모르니까요.”

사정을 모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작이 뭘 어떻게 말하고 다니든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레이나의 정체를 아는 자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으니, 대신관만 입을 닫는다면 자신이 무어라 떠든다고 한들 반박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에게 충성을 다하여 가문의 쓰레기를 없애는 일뿐.

마음이 편안해진 공작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저택으로 향하는 길이 꽤 험난했던 것 같은데, 아까부터 계속 너무 평탄하기만 했다.

“……윈터스노우 공작께서 눈을 치우고 길을 정비하셨나 보군요. 쯧, 쓸데없는 짓을.”

누군가를 쫓아내기 위해 일부러 험한 극지에 저택을 지었는데, 이렇게나 길을 제대로 다듬어 놓아서야 의미가 없었다.

“덕분에 우리가 이리 편하게 저택까지 갈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좋은 일이지요.”

대신관이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참으로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아니, 벌써 몇십 년째 저 얼굴이었기에 사람이 맞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가 목적지에 다다랐다.

해가 떨어진 상태라 주변이 어두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저택 부근이 그럭저럭 밝았다.

“공녀께선 제 마법을 숨길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저택 담을 둘러싸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대신관이 혼잣말했다.

짧게 주문을 외워 제 손에 투명한 보호막을 만든 그가 조심스럽게 레이나의 불꽃에 손을 대었다.

“……공격성이 없는 따뜻한 불꽃이라. 게다가 칙칙하기는 하지만 소량의 빛까지.”

마왕의 마법치고는 퍽 낭만적이고 귀여웠다.

아무리 마왕이라고는 하지만 이제 갓 성인이 된 여성이라서 그런 듯싶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는 마왕이었다.

곧 이 불꽃으로 세상을 어지럽힐 존재.

어째서인지 신탁과는 행보가 조금 달랐으나, 어디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 알아냈으니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두 눈으로 확실하게 레이나를 확인하기 위해 대신관이 주문을 읊었다. 그의 몸이 투명하게 물들었다.

“헉, 대, 대신관님?!”

갑자기 사라진 대신관에 놀란 공작이 때와 장소를 잊고 큰 목소리를 내었다.

“쉿.”

그에 대신관이 재빨리 공작의 손을 잡으며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그제야 공작은 대신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불투명하게 변한 자신의 몸도.

“이, 이게 대체……!”

“투명화 마법입니다. 짧은 시간밖에 유지하지 못하니, 들키지 않게 조용히. 손도 놓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대신관이 맞잡은 공작의 손을 끌어 벽을 통과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투명화 마법이라더니,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것뿐만 아니라 벽까지 뚫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놀라서 다시금 큰 목소리가 나올 뻔한 공작이었지만, 서둘러 손바닥으로 입을 가려 소리를 막았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숨을 죽이고 저택 본관 쪽으로 향하는데, 앞마당 온실에서 이상한 것을 본 대신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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